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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주이론에 관한 뛰어난 물리학자인 제바스티안과 오스카 그리고 형사 실프를 통해서 펼쳐지는 추리의 유희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이하 실프)은 독일 문학의 특징은 특유의 철학적 논지와 사색 그리고 이성적인 절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저자 율리 체는 뛰어난 글 솜씨와 지적인 영역확장은 독자로 하여금 단단한 논리의 전개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든다.
<실프>는 분명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작품 속 살해 동기와 증거 그리고 상황은 추리소설 작품을 읽어 본 이들에게 이미 범인은 이 사람이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탄탄한듯 보이는 살인 교사는 우연이라는 변수에 의해서 뒤틀리고 망가진다. “우연은 인간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의 이름입니다.”라는 형사 실프의 확고한 진술처럼 작품 속 우연함은 완벽한 살해사건이 아님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그렇기에 완벽함 뒤에 숨은 범인을 찾아 나가는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모습을 이 작품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율리 체가 보여주는 탁월한 심리묘사와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추리의 유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작품 전체에는 작가 율리 체의 유희가 펼쳐진다. 논리의 유희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기 위해 제바스티안과 오스카 두 물리학자는 우주이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또한 형사 실프와 그의 후계자인 리타 스쿠라는 하나의 사건을 둘로 나누어서 서로 논쟁을 벌인다. 심지어는 작품의 시작에 해당하는 살해 사건의 계기인 벌어진 사건과 벌어지지 않은 사건은 독자에게 앞으로 펼쳐질 유희의 즐거움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 율리 체의 사고를 거쳐 정제되어 손 끝을 타고 기술되어져 독자들을 끌어 당긴다. 단순히 무겁고 어려운 추리가 아니다. 작품은 추리를 유희의 단계로 이끌어 내어 독자로 하여금 머리아픈 소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미 독일 문학의 대가로 발돋움 하고 있는 율리 체의 <실프>는 위트있는 휴식처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생동감있는 문장의 구성력과 논리적 전개만 보더라도 <실프>가 뛰어난 작품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아마도 그녀의 작품들은 시간이 흘러 고전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될 작품을 먼저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시간선상에서 작품을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린다. 즉, 작품 속 타임머신 살인사건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타임머신 독서를 즐길 수 있는 혜택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료사고, 내연의 관계, 애증, 갈등, 교살, 열등감, 우월감, 시간의 본질을 의심케 하는 완벽함과 그 완벽함을 무너뜨리는 우연의 역할 그리고 이 모든것을 유희로 버무리는 작가의 탁월한 글솜씨는 분명 현대 작가임과 동시에 후대의 명작가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실프>는 머리 속 상상의 세계 가운데서 펼쳐지는 작품이 아니다. 이론과 현실을 절묘하게 묶어서 삶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영역까지 확장된 작품이다.
더블 싱크는 제거되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물리학과 시간의 본질 그리고 작품 속 범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의 글을 인용하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립 명제 가운데로 내몰리어 어느 한쪽을 선택하거나 양자 사이의 갈등을 제거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현대인의 모순을 잡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