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진짜 답이 없다 탐 청소년 문학 7
장 필립 블롱델 지음, 김주경 엮음 / 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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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아빠는 진짜 답이 없다] 장 필립 블롱델, 탐, 2012

 

소설을 잘 읽는 방법이 없다. 소설은 즐기는 것이다. 어느 소설가의 이 말은 적어도 책에 대한, 문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소설의 목적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빠 엄마가 사랑을 나누는 것까지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집이다. 거친 숨소리도, 흥분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책은 충분히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걱정하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더 많이 알고 있다. 포털사이트 검색만 해도 이것보다 더 야하고 더 직접적인 것이 넘쳐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정도의 내용은 조숙한 초등학교 학생이면 다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17살짜리에게 커피를 권하고, 술을 권하는 아버지 친구와 아빠는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주인공의 사소한 비밀 중의 하나인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이해해주어야 하나.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이 책을 아이들에게 권해야 할까? 그만큼 가치가 있을까? 자꾸 이런 의문이 든다.

 

아버지가 자신의 블로그에 들어와서 자신의 글을 모두 읽었다는 이유로 이유만으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절교선언을 한다.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는 자식과 화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기장을 아들에게 준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으며 아버지의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되고, 마침내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가 문화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 문화적 차이보다 더 극적이지 못하다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이들은 읽어낼 수 없다. 서두에 나오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만이 아이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17살의 아들이 아버지의 17살 적 일기장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기에 중학생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최소한 주인공 또래의 친구들이 읽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이 가장 필요한 독자는 부모들이다. 프랑스인들이 느끼는 세대 차보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세대 차가 더 크다. 우리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 속도를 감안한다면, 어떤 부모이든지 아이들 눈에는 조선시대의 사람들과 부모는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 아이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를 알고 싶다면,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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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하루키 - 하루키의 인생 하루키의 문학
히라노 요시노부 지음, 조주희 옮김 / 아르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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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과 줄거리 [하루키,하루키] 히라노 요시노부, 아르볼, 2012

 

살아있는 사람의 평전을 쓰는 것은 어렵다. 하루키처럼 말을 아끼고, 집필에만 전념하는 작가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어려움과 함께 살아있는 작가는, 우리가 소설 속에서 느끼던 그는 다음 작품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작가의 평전은 더 어렵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묘사하는 하루키도 다음 작품의 하루키도, 하루키고 하루키일 따름이다.

 

이 책의 저자도 평전 부분을 쓰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게 제대로 접근하고 있는지 조금은 불안”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출판되었고, 만약 이 책을 하루키가 읽는다면 무엇이라고 평가할까? 만약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을 읽는 나는 무엇을 읽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그리고 하루키를 다시 생각했다. 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본 적 없다.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와 [1Q84] 3권 모두 책 먼지와 함께 책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지만, 내가 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마음처럼 몸도 닿지 않았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하루키가 아시아 작가로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해있다고 말하는지를 느끼고 싶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작가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외국 문학에 흥미를 갖지 않고 크게 성공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영문과 출신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불문과 출신의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와 같은 맥락에서 이 책의 저자는 지금도 꾸준히 미국의 무명작가를 발굴해서 번역하는 하루키를 평가하고 있다. 전문 번역가가 번역한 것과 작가의 번역. 어떤 번역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의 힘이다. 작가가 자신 존경하는 작가의 작품을 그의 모국어로 읽고 그 작가와 같은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작품을 집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힘이다. 이 책에서는, 하루키가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을 했다고 하지만, 그는 일 년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봤고, 학창시절 커트 보네거트와 스콧 피치제럴드의 작품을 그들의 모국어로 읽었다고 한다.

 

커트 보네거트도 스콧 피치제럴드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고, 요즘 짬짬이 듣는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다. 그도 그들을 좋아하고, 특히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도 했다. 김영하의 작품도 하루키의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보네커트와 피치제럴드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 속에 그들이 어떻게 녹아들어 갔을까? 궁금해진다. 작가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자신의 감명 깊게 읽은 것에 삶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어느 인지심리학자를 따르면 우리가 자아라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비워진 모습을 거울을 보듯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문학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나를 찾는 것.

 

먼저 읽은 독자로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첨언을 하자면, 이 책은 평전 부분과 주요작품 줄거리로, 거의 스포일러 수준이지만, 나누어져있다. 나처럼 하루키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면, 주요작품 줄거리를 먼저 읽어보고, 평전부분을 읽는 것이 도움될 것 같다. 줄거리를 먼저 읽으면, 수없이 등장하는 하루키 작품과 그 작품들의 평가에 조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01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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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모두 가짜라면 - 영원불변한 '나'는 없다
브루스 후드 지음, 장호연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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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심리학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 모습이 모두 가짜라면] 브루스 후드,중앙북스,2012

 

사회발달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아’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닌, 뇌와 환경적 요인에 의해 얼마든지 변하고 흩어질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뇌과학과 심리학의 연구 결과에 근거한 이 주장은 인식론의 현대적 논의다. 이렇게 과학화된 인식론의 근저에는 철학적 인식론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뇌과학 연구 결과로 본다면, 인간은 “분산된 신경망의 특성으로 고유한 정신 기재를 가지지 못한다.”고유한 정신 기재가 없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아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이 이야기는 “뇌의 모형화 과정에서 일부가 의식적으로 자각되면서 자아의 착각이 일어난다.”내가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것도 나만의 착각이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나도 저자처럼,“텍스트의 일부분을 한 번에 조금씩 접할 뿐이며, 그 사이에 있는 글자들을 정확히 보지 못하고 건너뛰기 일쑤다. 주변부 시야는 흐릿하고 색깔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잘 보인다고 착각을 한다. ”

 

저자의 주장을 따르면, 독서란 ‘자각적 誤讀’이라고 말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비추는 그림자로서 존재”하는 ‘거울자아’를 통해서 책을 읽는다. 감각기관의 자극 즉 시각의 “신경활동 패턴이 뇌의 관련 부위에서 연이어 일어나 이런 특정 경험과 관련된 기억과 사고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다. 결국, 인간 뇌의 메커니즘이 동일하고 같은 경험(여기서는 이 책을 동시에 읽어도) 은 책을 읽는 독자 각자의 특수한 경험과 기억이 다르므로 다른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뇌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뇌과학의,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심리학의, 나처럼 독서에 관심 있는 사람은 독서에 관련된 에피소드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글을 쓴 저자도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편중되어있다. 뇌과학자들이 밝혀낸 과학적 근거 위에, 심리학자들의 실험결과를 통합하고 재구성해서 ‘거울자아’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심리학들도 ‘과학자’로 불리기를 원하고, 그의 주장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적 주장처럼 보인다. 우리는 ‘뉴턴적 세계’에 살고 있다. 뉴턴의 말처럼, “자연 사물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귀납에 의해서 수립된 명제를 정확하게 참이거나 참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간주”해야 하지만, 우리는 ‘계급결집’에 의해서 ‘위상변이’된 집단에 살고 있기에, 그런 집단이 만들어낸 사회적 환경을 심리학 실험실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지울 수는 없다.

 

과학도 이성적 직관에 많은 부분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떠나가는 기억 대신에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어줌으로써 같은 앎으로 보일 정도로 앎을 보존”한다고 한 플라톤의 말처럼,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적 추론을 반박하고 논증하기에 우리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결국 우리는 철학적 인식론의 전통 위에서 ‘실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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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개 장발 웅진책마을 44
황선미 글, 김은정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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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년 창작동화 [푸른 개 장발] 황선미, 웅진주니어, 2012

 

누구에게나 개와 함께했던 추억이 있다. 짧은 추억일 수도 있고, 옆집 개에게 물려보았거나 친구 집에 있던 커다란 셰퍼드에 놀라 다시는 친구 집에 놀러 가지 않았거나 집에서 기르던 반려견이 아파 엄청난 병원비를 감수했던 적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편한 추억도 있지만, 꼬리를 흔들며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에 대한 애틋함은 지울 수 없다.

 

이 작품은 작가 황선미의 추억과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다지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무리 먼 길을 가더라도 나는 내가 지나온 길을 끊어 낼 수 없다.” 작가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비좁고 불편하고 불쾌한 기억이기에 지워버렸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의 편린은 지울 수 없다.

 

나에게도 이런 편린이 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어릴 때는 개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머리가 굵어지니깐 개를 싫어하네.” 할머니 기억 속에 있던 나는 ‘장발’처럼 털이 많았던 하얀 개를 타고 다니던 꼬마였다. 나에게는 그 기억이 없다. 단지 옆집에 놀러 갔다가 강아지에게 옆구리를 물렸고,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친구 어머니는 개털을 자르고 태워서 내 옆구리에 발라주었던 고통스러운 기억과 고물상하던 초등학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나보다 더 큰 셰퍼드에 놀라 다시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개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진돗개 2마리를 사오셨다. 하얀 백구였는데 이름이 누리와 누실이었다. 나는 녀석들이 너무 귀찮았다. 아침저녁으로 개집 청소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녀석들은 내가 제대할 때까지 우리집에서 살았다. 어느 날 누리는 아팠고, 나는 개를 안고 동물 병원으로 달렸다. 당시 수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엄청난 병원비 때문에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다. 녀석을 떠나보낸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애완용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 얽매이고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예견된 죽음과 이별을 알기에 싫다.

 

개의 1년은 인간의 10년이라고 한다. 아무리 장수하는 동물이라도 제가 살던 생태계를 떠나 집 한구석에서 키우면 오래 살지 못한다. 일상에 쫓겨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녀석들은 우리를 떠난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어린 것들은 자라고 늙은이들은 지쳤어. 겨울이 뭘 감추고 있는지 겪어 봐야 안다니까. 겨울은 비밀이 많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늙은 고양이의 이 말이 내 가슴에 박혔다. 겨울은 추운 날씨일 수도 있지만, 죽음일 수도 있고, 우리 삶 곳곳에 널려 있는 불안과 공포일 수도 있고, 인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린 것들은 자라고 늙은이들은 지쳤어.”나도 지쳐가는 중이다. 지금이 내 인생의 초가을인지, 한겨울의 문턱에 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찬바람은 나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할머니 말씀처럼 어릴 적 그렇게 좋아했던 강아지가 왜 싫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릴 적 타고 놀았던 그 친구의 죽음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친구도 쥐약을 먹고 죽었다. 이 책에 나오는 강아지처럼. 굳이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이나 이별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는 어릴 적 맞닥뜨렸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나도 목청씨의 장발처럼, 나에게 그런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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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나이절 워버턴 지음, 박수철 옮김 / 지와사랑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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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 [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나이젤 워버턴, 지와사랑, 2012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국어판 제목을 보면 일반적인 공부법에 관한 책처럼 보인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철학과 교수가 쓴 철학과 학생을 위한 공부방법 안내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 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글을 쓰는 일반인, 인문학,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에게도 유익하다.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다” 이 책의 머리말 제목만 보더라도 이 책이 철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모든 철학적 논술은 그 자체로서 철학의 일부”이기에 “굳이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주장”보다 “적적한 논증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철학은 “관람용 스포츠”가 아닌 선수로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읽고 들은 것에 대해서 비판적 논증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비판적 논증을 위해서 어떻게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어떻게 시험 준비할 것인가를 간단명료하게 알려준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짧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게 아니라, 공부는 “직접 연습”하는 것이다.

 

공부법을 위한 책이 칸트나 헤겔 책처럼 두껍고 어려울 필요가 없다. 그런 책들은 공부법을 학문적으로나 경제적 이유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책을 잘 읽고, 강의를 잘 듣고, 글을 잘 쓰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저자의 말처럼 짧고 명료한 책이 좋다. 모든 행위의 마지막 결과인 짧고 명료한 글쓰기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칸트나 헤겔은 그렇게 난해한 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인물”이지만, “학생 수준의 논술에서 길고 복잡한 문장을 고집하면 자신의 철학적 이해도를 보여줄 수 없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선생들의 난해한 책을 비판적으로 읽고 듣고 논술해야 한다. 잘 읽고 잘 듣고 잘 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학생들은 ‘비판적’이라는 단어에서 착각을 일으킨다.

 

저자는 ‘비판적’이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유론]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부정적 논리에 대한 비난, 즉 긍정적인 진리를 확립하지 않은 채 특정 이론이나 실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행위에 대한 비난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다.”19세기에 지적되었던 이런 잘못은 아직도 유효하다. 어떤 글이나 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글이나 논의가 그 취지에 적합한지, 그 논증이 합리적인지를 추론하는 것이지, 특정 이론이나 작은 실수를 꼬투리 잡아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인 공격과 함께 위험한 것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유명 논객이 트위터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140자로 재구성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 책을 완역한 노교수도 그 책에서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140자로 재구성한 것을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읽고 듣고 토론하고 쓰는 방법을 간단하게 정리한 책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책을 읽는 방법과 읽고 들은 것을 마무리하는 글쓰기이다. 저자는 처음으로 책을 읽으면 메모를 하며 어려운 부분은 가볍게 건너뛰라고 한다. 처음 쓴 글은 며칠 동안 묵혀두라고 한다. 이렇게 간단하고 명확한 방법이 철학과 학생을 위한 것은 아니다.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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