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무의식 -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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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새로운 무의식]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김명남 역, 까치, 2013

 

“공연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CD로도 좋은 음질의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데도 우리는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에 간다. 공연의 핵심이 음악이고 그 핵심이 특정 매체에 무손실로 입력되고 재생되지만 우리는 공연에 간다. 지금보다 더 스마트한 세상이 와도 공연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 할 수 없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석학들의 강의가 인터넷으로 전송되고 집안에서 편안하게 보고 들을 수 있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왜 가는 것일까? 이것은 공연이나 강의에 직접 참여해보고 다른 매체를 통해서 다시 그 공연이나 강연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를 대면하고 느낀다. 그것을 복제한 매체를 통해서는 느낄 수 없다. 그럼 공연이나 강의를 빛내는 ‘아우라’란 무엇일까?

 

빛으로 상징되는 ‘아우라’는 미국의 철학자 퍼스가 말한 “의식의 다른 지면에 있는 내면의 빛으로”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퍼스는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없다면 “인류는 생존투쟁에서 무능력하여 오래 전에 절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퍼스의 친구이며 심리학자이고 철학자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는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는 비록 흠이 있지만, 무의식을 강조했던 그의 관점”은 타당하고 주장한다. “Id, Ego와 같은 모호한 개념들은 (사회 신경 과학에서 말하는) 뇌의 구조, 연결성, 기능적 지도 등에 그 길을 내주었다. 우리의 대부분의 사회적 인식도 - 시각, 청각, 기억처럼- 우리의 자각, 의도, 의식적 노력과는 무관한 경로에 따라서 전개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말하는 무의식은 “정신분석 요법이 추천하는 자성적 기법(self-refrlection)을 통해서 결코 들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과학적 기법 (예를 들면 fMRI 등) 을 통해서 발견되고, 부모에 대한 “부적절한 성적 욕망이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무의식은 진화의 산물로서 인간 종의 생존”에 중요한 것이라고 전제하는 저자는 과학적 기법으로 통해서 발견된 사실들, 배촉전도체가 무의식적 편향을 유발한다는 과학적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현대 뇌과학자들의 주장과 Kant의 인식론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Kant의 이론은 우리의 마음이 객관적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이다. Kant는 인식이 실재 존재하는 것 만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식은 마음의 일반적인 속성들에 의해 어느 정도 창조 - 또한 제한 - 된다.”

Kant의 인식론이 직면한 생활세계에서 근대 과학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오늘날의 뇌 과학자들은, 적어도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한 일련의 미국 과학자들은, 프래그머티즘이라고 이름 붙여진 퍼시의 사상을 기저에 두고 “철학적 발상이나 이론을 절대적 이론이 아니라 도구로 보아야 한다고 믿으며 그 타당성도 삶에서의 현실적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거부하고 현대 과학을 재정립하려고 한다.

 

‘새로운 무의식’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체계에서 무의식은 근본층위이며 진화의 역사에서 일치감치 발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모든 척추동물의 뇌에 표준적으로 갖추어진 하부구조이지만, 의식은 선택상황에 가깝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은 의식적 기호적 사고력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도 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 반면 무의식이 없다면 어떤 동물도 살아 갈 수 없다.” 이러한 무의식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으로 받아들인 단편적인 정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보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무의식이 식욕이나 성욕 배설욕 같은 동물적 본능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의 통제가능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근본층위인 무의식으로) 인식의 빈틈을 채운다.” 우리는 이러한 매카니즘을 ‘맥락의 부호화’라고도 하고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지만, ‘새로운 무의식’이라는 존재를 가진 나는 뇌가 만들어낸, 무수한 인식의 빈틈을 채운 어떤 것을 잡고 ‘나’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무의식이라는 근본층위가 만들어낸 ‘나’와 그 상부구조인 의식하는 ‘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한다.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진화와 퇴보를 거듭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인식의 빈틈을 메우고 있는 무의식의 층위에서 내가 ‘나’라고 확증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어떤 것을 도출할 수 있는가.

프래그머티즘적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무의식’은 도구일 뿐이고, 그 존재의 타당성도 현실적 결과에 따라서 판단되는 가변적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있고 동일한 공간에 숨을 쉬고 있지만, 그 공간은 어제의 공간이고 내일의 공간일 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대상에 진리값을 부여하며 존재여부를 가늠해보지만, 가변적인 현실의 흐름 속에 놓인 ‘나’라는 존재는 ‘새로운 무의식’이라는 가변적인 도구를 통해서는 어떤 대상에도 어떤 진리값도 부여할 없다. Kant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발견한 ‘나’가 아닌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했지만, ‘새로운 무의식’을 받아들여야하는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확정할 수도 없고, ‘나’라는 존재를 매개로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할 수도 없다. 설령 神이 인간을 불쌍하게 여겨 이간ㅇ게 진리값을 준다고 해도 어떤 ‘나’가 그것을 적용할 것인가. 神이나 진리의 존재가 확증된다고 해도, 나가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공연이나 강연회에 참석을 한다. 그 공연이나 강연회의 핵심 주제 즉 음악이나 정보는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에만 저장되는 그런 일들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 존재한다. 연주자들의 신들린 몸짓,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 관객들의 나지막한 탄성, 학생들의 절망적인 탄식. ‘새로운 무의식’의 작동으로 만들어진, 그 시간과 공간에서 창조되고 다시 우리의 ‘새로운 무의식’에 내재되는 이러한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의 총체는 벤야민이 인식 대상에게 부여한 ‘아우라’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공연과 강연회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무의식의 기반 위에선 아우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 속에 있는 다중적 자아의 착각일 수도 있고 새로운 무의식의 편향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존재한다.

헤겔의 절대적 정신은 부정할지라도, Kant가 그랬던 것처럼 외부에 진리값을 요청할수 있는 ‘나’가 포함된 ‘아우라’는 존재한다. 우리가 공연이나 강연회를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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