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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뜻밖의 철학
그레고리 베스헴 외 지음, 박지니 외 옮김 / 북뱅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철학 에세이 [호빗 뜻밖의 철학] 그레고리 배스햄 外, 북뱅, 2013
영화 [뜻밖의 여정]을 염두에 둔 이 책의 원제목은 [호빗과 철학]이다. 톨킨의 소설을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글을 묶어 놓았으니, 제목에 철학이란 말을 붙인 것이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본격적인 철학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앞부분에 있는 [빌보 베긴스의 영광]편을 보면 플라톤의 전승 속에 있는 “가정생활의 미덕과 그 단순한 기쁨”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호빗]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을 인용해서 “가정생활의 미덕과 그 단순한 기쁨”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이해는 되지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진 철학적 함의들이 [호빗]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함의와 같은가. [호빗]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을 ‘메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가.
철학자 김영건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골똘하게 반성해 본다면, 아마 철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요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메타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정당성, 그것이 갖고 있는 함축들을 메타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철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철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책이나 [호빗] 속에서도 철학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단면이지 그것을 본격적인 철학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철학이란 것은, “그것을 진짜 잘하는 것은 철학자의 생각, 즉 철학책을 메타적으로 반성하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김영건 선생님의 말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철학적 사유이고, ‘생각의 정당성’의 함축들을 ‘메타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면 철학이 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정당성’과 ‘메타적’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논증해하지만, 이것들의 의미 또한 ‘철학’처럼 모호하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책을 메타적으로 반성”할 수 없다면 함부로 ‘철학’ 이란 단어를 써서는 안 되고 그것을 ‘철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철학적인 사유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철학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논증되지 않는다면 철학도 아니고 철학책이라고도 말 할 수 없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포장된 개똥철학이 마치 진정한 철학인 것처럼, 혹은 자신의 주관적 감흥이 철학의 핵심인 것처럼, 혹은 어떤 철학적 명언들을 앞 뒤 문맥을 다 잘라먹고 거기에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기 소감을 덧붙이는 것이 마치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것들을 기초로 해서 더 깊게 혹은 더욱 합리적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단단한 철학적 사유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독자들도 스스로 훈련해서 이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스스로 훈련해서 이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다면 철학과 문학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플라톤의 대부분의 저작들이 드라마 형식이지만, 최고의 철학책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철학과 문학은 한편으로 묶일 수 있다. 그렇지만 훈련되지 않은 독자가 ‘철학’ 이란 제목만 보고 그것을 ‘철학’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개똥철학이 되고 만다.
플라톤 이래로 문학과 철학은 엄연하게 구분되었다. “문학은 환각이라고 그가 누차 말하지 않았던가... 소설가는 현실을 보고 환상을 만든다면 그는 환상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려는 것 같다”고 말한 소설가 박완서의 말처럼, 문학은 창조해낸 현실이고, 철학은 현실에 접근하려는 몸부림이다.
이 책에는 [호빗]이라는 판타지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접점을 밝혀내려는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 대한 정답도 들어있지는 않다. 고대인들은 칼에 피를 묻혀가며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영광을 위해서 살았고, 중세인들이 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영광을 위해서 살아왔는가. 톨킨의 책 속에는 고대인들도 살고 있고 중세인들도 근대인들도 살고 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살아갈 뿐 현실로 뛰쳐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이 책의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지만, 그 책 속에서도 이 책 속에서도 우리가 처한 차갑고 무거운 현실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
“하늘에서 한방에 목돈이 떨어지는 것을 기대”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문학적인 글들을 읽고 그것에 감동하고, 그 감동의 정체를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즉 메타적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한다는 의미에서 성숙이다.”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훈련해서 성숙해졌다면, 그렇다면 이 책도 훌륭한 철학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훈련해서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위대한 철학책 속에서도 우리 삶의 정답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어쩌면 일생에 한 번도 접해 보지 않는 철학책이라도 읽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의미에서 영광일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명예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가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영광을 돌리듯이, 지금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2013.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