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안녕


어떤 여자가 밀고 가는 유모차에서 개가 근심스럽게 세상을 내다본다

계사전에 이르길 겨우 봇짐이나 질 자가 수레를 타면 사방에 도둑이 들끓는다고 한다

골목의 개가 밤마다 열심히 짖는다
너무 애쓰지 마라
그냥 살면 된다

도연명은 쌀 몇말 때문에 하급 관리들에게 머리를 굽히기 싫어 관인을 끌러놓고 전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생각이 짧은 것이다
저자에서 지키지 못한 졸(拙)이 전원에서 지켜질 리 없는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나기를 전원에서 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세상에, 아직도 남의 땅을 빼앗는 나라가 있다니 - P-1

거기다가 어떤 나라는 무기를 팔고
어떤 나라는 돈을 댄다
죽는 건 아름다운 청년들뿐

어떤 사람들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세월호 타령이나 하는 건 이제 지겹다고 한다

나치에게 당한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가자에서 그 짓을하고 있다

갠지스강 가에 가득한 모래알만큼 그만큼의 갠지스강이 또 있다 한들*

이번 나의 생은 이것으로 끝이다



*금강경 - P-1

세계문학을 버리다


세계문학을 버렸다
수심에 잠긴 셰에라자드도 덮고
햄릿이나 그레고르 잠자 같은 군상들은 노끈으로 묶어
폐지 장수에게 줘 보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한때 그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세상이 있었고
그들 따라 웃고 울던 무리들이 있었다
수십년 동안 하드커버로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을 내다 버렸다
교산은 어린 길동을 달래 사천 외가로 보내고
불쌍한 아Q도 울며 집을 나간 지 오래
그들은 세상에 버림받았고 혁명도 끝이 났으며
인간도 이전의 인간은 아니다
세계를 버렸다
이사업자들에게는 최악의 상대이며
비용 견적만 높이는 세계문학을 버렸다
나는 이미 세계인이 된 지 오래되었고
많은 미래가 과거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는 세계가 들어갈 데가 없다 - P-1

폐지 장수 리어카에 실려 가는
조르바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분개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므로
미련 없이 그들을 버렸다 - P-1

수행자의 노래


모차르트를 높여놓고 설거지를 한다
세제 향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설거지에는 설거지의 도가 있어
먼저 더운물에 그릇을 불리고
거품을 일으켜 애벌 씻은 다음
부드럽게 헹구고 물을 찌워
마른행주로 닦아 말리면 뽀송해진 그릇들이 좋아한다
어느 과정 하나 소홀하면 안 되고
깊고 얕고 넓고 좁고 그릇에겐 그릇의 품성이 
있어
마땅히 예로써 존중해야 한다
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해놓으면 좋아한다
어떤 때는 그릇에 얼룩이 그냥 있다거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한 지적으로 나의 공부는 나날이 깊어간다
애들이 식기 세척기를 사준다 해도
기계는 일은 알지만 살림의 도리를 모르고
마지막으로 행주를 짜 널고
바라보는 재계(齋戒)의 기쁨을 모른다
어떤 날은 이 일 말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지만
그릇을 닦는 일은 세상을 닦는 일이고
나의 경계는 나날이 높아간다. - P-1

괜히


불가에서는 붙잡힌 짐승이나 물고기를 가엾게 여겨 놓아주는 것을 방생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잡아 오는 사람과 놓아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어느덧 이 일은 양쪽에 다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 극락에 간다면 이는 극락을 사고파는거나 마찬가지이고 영문도 모른 채 잡혔다 놓여나는 것들 입장에서 보자면 극락을 가고 못 가고는 저들에게 달렸고 목숨까지 걸린 일인데도 아무것도 손에 쥐는 게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불전함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계시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괜히 극락 같은 걸 만들어 사람들을 놀리거나 불쌍한 것들 고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 P-1

시인의 말


이 시집에 실린 시편은 대부분 내가 아무 일도 없이 생애의 가장 한가로운 시기에 쓴 것들인데 나를 따라 시도 무사하기만 한 게 싫어서 틈만 나면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거나 새벽에 일어나 비를 바라보기도 하고 천변에서 새들과 놀기도 했다.


세상에 아무런 공덕도 없는데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긴다. 가을과 헤어지고 나면 눈을 이고 겨울이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이들의 살핌과 찬을 받아 시집을 묶는 일도 그렇다. 그리고 그것들이 갚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더없이 즐겁기만 하다.
2025년 12월
이상국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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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도 힘들다


물푸레나무,


꽃은 봄에 가지 끝에 모여 피고
열매는 늦여름에 익어 짐승의 밥이 된다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르스름한 물이 우러나는데
그걸 달인 물에 먹을 갈아 글을 쓰면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희고 부드러운 몸은 척척 휘고 질겨서
조선의 포졸들이 죄인을 다스리던 육모방망이나 곤장질로는 당할 나무가 없었고 일본놈들은 그걸로 순사 방망이를 만들어 식민지 조선 사람을 패는 데 썼다고 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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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기 뭐하니까


신경림 시인이 세상을 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을갔습니다

화환이 즐비하고 문상객이 북적여서 작별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글쟁이들과 밥 먹고 술 먼저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막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다음 날 부조는커녕 빈소에는 들르지도 않은 걸 알았습니다

이 일을 아는 이에게 말했더니 그 양반이 그래도 그냥 가기 뭐하니까 시 한편을 주고 간 거라고 했습니다 - P-1

화진(花津)


절집 마당에서 헤어졌지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버지는 아직 거기 계시는지
산그림자 화진 깊이 영가를 밀어 보내며
나는 철없이 울기만 했지
무릎이 아프도록 절만 했지
부모에게 가엾지 않은 자식이 어딨겠어
그게 벌써 언제 적 일이라고
어느 해 봄 다시 그곳에 갔을 때
무당집처럼 요란한 법당에서
부처님도 울고 계시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 죄짓지 않은 자식이 없는 것처럼
세상에 아프지 않은 부처가 어딨겠어
그러나 부처에겐 부처의 일이 있고
중생에겐 중생의 일이 있어
살자고만 하면 무엇이 섧겠냐며
절 마당을 돌다 내려오는데
강마을이 그때처럼
화진에 잠기고 있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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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시가 늘지 않는다

꽃은 저 혼자서도 피었다 지고

송아지도 어미 말을 알아듣는데

시가 늘지 않는다

살다보면 사랑도 늘고 술도 늘고

이별도 늘어가는데

나의 시는 늘지 않는다

인생이 늘지 않는다 - P-1

핑계


어떤 사람이
눈이나 꽃처럼
거저 오는 걸 좋아하면 가난하다는 것이고
가난하면 세상에 미안한 일이 적다

어떤 이는
사람이 살려고
너무 애쓰는 일을 재앙이라고도 했는데
가난하면 사랑하는 자식들이 다툴 일이 없고
세상 떠날 때도 소풍 가듯 가벼워서 좋다

가난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힘이 세고
가난은 비싸다

사랑과 가난은 감출 수도 없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사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 P-1

희망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고

여태껏 그걸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희망과 불화한 적은 없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

희망에 지치기도 하였지만

희망은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버려도 누가 가져가지도 않습니다

희망이 혼자인 것처럼

시도 늘 혼자입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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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일


가까운 사람을 잃는 건 외로운 일이지
높은 장대를 뛰어넘는 것도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나는 꽃을 주었는데
그대는 가시를 받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외로운 일이지

기침을 참는 것도
물가를 걷는 것도

밤을 지나온 차의 범퍼에 잔뜩 붙어 있는
죽은 벌레들
빗에 엉겨 있는 머리카락
한쪽 방향으로 일제히 누운 칫솔모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고
아, 지겨운 초록

같은 곳을 오래 바라보는 것도 외로운 일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 P-1

공평하게 늙어가는 것도
또 꽃을 사는 것도




*이대흠의 시 「에서의 거리」에서 빌려 변용함. - P-1

흰 빛


회벽에
흰 빛이 어른거린다

어디서 온 걸까, 너는

대야에 담긴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요사를 떨고 있었다 - P-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슈퍼에 가 ‘설레임‘ 아이스크림 있냐고
묻는다는 것이
망설임 있어요. 라고 잘못 말했는데
가게 주인이 아무 망설임 없이
설레임을 꺼내다준다

영화관에서 단적비연수 두 장 달라는 것을
단양적성비 두 장 달라고 말했는데
단적비연수 표를 내줬다는.
형식과 내용이 합일하는 이런 경이로움을
나는 사랑한다

문득, 비 오는 바다가 보고 싶어
아침 일찍 오도리 해변에 나갔다가 돌아와
밀란 쿤데라가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뉴스를 본다
시간당 60mm,
비가 저렇게 오면 바다도 넘치지 않을까

이름이 ‘나보라‘인 신입 직원에게
영문 이름을 지어줬다
Look at me!

해피 투게더를 - P-1

햇빛 두 개 더, 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후배 시인이 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로
알고 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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