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벤야민의 「번역가의 책무」를 분석하는 「바벨의 탑」이라는 글을 썼다. 데리다는 먼저 바벨이 혼란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바빌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Ba‘는 아버지를, ‘Bel‘은 신을 뜻하므로 바벨이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유명사는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속 ‘will‘ 처럼 여러 의미를 내포한 단어 역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바벨은고유명사면서 다의어다. 바벨은 우리에게 번역을 처벌로서 강제하면서, 동시에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바벨의 자리에 숱한 의미가 겹치면서 단 하나의 적절한, 진실한, 투명한 읽기는 불가능해진다. - P31

번역은 신이 우리에게 지운 짐이자, 바벨 이전의 상태ㅡ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하나의 언어로 말하려는노력이다. 혹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여러 갈래로 흩어진 불완전한 언어의 속박을 풀고 순수한 의미를 정제해내는 행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기호도 거치지 않고 바로우리 마음에 와닿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과 오용이 없는 곳. 번역 과정에서 아무것도 손실되지 않는 곳으로.


번역에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기호를 탑처럼 쌓아 올리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피천득 시인이 ‘will‘을 ‘월(意志)‘이라고 번역한 것도 한자리에 두단어 이상을 얹으려고 시도한 작은 탑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롤리타], [창백한 불꽃』등의 소설도 썼지만 번역도 많이 했다. 나보코프는 집필 언어를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바꾸면서 언어적·문화적 차이에 민감한 언어 감각이 자랐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자기 작품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꾸준히 번역했으며 독창적인 번역론을 펼치기도 했다. 푸시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면서 쓴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오네긴]을 원문처럼 각운을 맞춰 번역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직역하되 주석을 달아서 모든 의미와 내포와 배경과 의도와 오류를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나보코프가 번역한 [예브게니 오네긴]은 네 권으로 출간되었다. [오네긴]이 5,446행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운문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뻥튀기다. - P32

튀기다. 200년가량의 본문이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으로 한 권씩 있고, 나머지 두 권은 무려 1,200면에 달하는 주석과 역자해설이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대한 각주가 달린 번역을 원한다. 각주가 초고층 건물처럼 책장 꼭대기까지뻗어 주석과 영원 사이에 텍스트 한 줄이 언뜻 비칠 틈만 남을정도로." 나보코프는 하얀 책장 위에 탑 이미지를 그린다. 번역문에 담을 수 없는 모든 의미를 각주에 쌓아 올린다. 각주는한없이 높이, 영원을 향해 솟구친다. 주석이 설명하는 텍스트한 줄이 탑 꼭대기에 보일 듯 말 듯 비치고, 그 위는 여백무한-신의 영역이다.
각주가 모든 가능성을 다 다루고 있으니 본문은 간결한직역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런 주석과 절대적인 문자적 의미를 원한다. 어떤 삭제도 덧붙임도 없이?" 이 글에서 나보코프는 "가장 서툰 직역이 가장 예쁜 의역보다 천 배는 더 유용하다"며 ‘가독성‘이 좋은 번역을 ‘범죄‘, ‘악행‘, ‘횡포‘ 등등 심한 말로 비난한다. 나보코프는 "문자 그대로의 번역이라는이상"을 위해서라면 "우아함, 좋은 소리, 명료함, 취향, 현대적 용례, 심지어 문법까지도" 전부 희생시킬 수 있다. 13 드높은 탑의 제단에 나보코프는 모든 것을 바친다. 번역에서 잃은것을 신이 독자가 알아주기를 기대하며 충성스럽게 탑을 쌓아 올린다.
자, 나보코프는 잡힐 듯 말 듯한 흰 고래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해서, 결국 잡았나? 탑이 높아질수록, 가능한 한많은 의미를 더할수록, 흰 고래는 점점 시커메지고, 번역이 실 - P33

패했다는 증거는 쌓여간다. 주석의 탑은 번역 불가능성의 웅대한 증거다. 번역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번역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조바심이 탑을 이룬다. 이 탑은 무한의 영역으로 뻗는다. 번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번역은 무한하다.
번역의 탑은 쌓이는 동시에 허물어진다. 주석은
 원문을보충하여 벽돌로 강화하고 역청으로 단단히 만드는 것 같지만, 번역의 탑이 높아질수록 원문은 불완전하며 그 의미는 자명하지 않음이 드러날 뿐이다. 바벨 이후에 그런 자명함은 사라졌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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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니까


동그란 눈알과 동그란 입술이
나란히 벌어질 때까지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이 튀어나올 때까지
뺨이 번질 때까지
휘파람이 될 때까지
숲에서 바람이 새지 않을 때까지
구역을 잃어버릴 때까지

허공을 건너는
긴팔원숭이가 되어

떨어지는 꽃잎들을 받아먹을 것
꽃나무 옆에 게워낼 것
토사물의 울음소리가 될 것

0이 될 때까지 셀 것 - P78

후렴


웅크린 채로 알게 되었죠
상자 속에 있었어요


빛은 언제 출발했는가 - P88

사람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 P133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품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 P134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 P135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사람은 절망하라/사람은 탄생하라: 이상, 「선에 관한 각서 2」에서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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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원은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2년 계간「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가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시작작품상, 시로여는세상작품상을 수상했다. - P-1

시인의 말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은 끝내 모를 것인가
끝내 모를 것을 사랑하면 아름다움이 될 것인가

2017년 8월
이원 - P-1

모두의 밖


의자의 편에서는 솟았다
땅속에서 스스로를 뽑아 올리는 무처럼

마주해 있던 편에서는 의자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그림자의 편에서는 벽으로 끌어 올려졌다

벽의 편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긁혔다
얼른 감춰야 했다

의자는 날았다 그림자는 매달렸다 속은 알 수 없었다

그림자는 옆을 본 채벽에
의자는 앞을 본 채 허공에 정지했다

의자와 그림자는 모양이 달랐다
의자의 다리 하나와 그림자의 다리 하나를
닿게 한 것은 벽이었다

의자와 그림자의 사태를 벽은 알 수 없었다 - P9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깊은 발은 희망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바닥을 모를 테니
깊은 발은 실밥 푸는 곳을 모를 테니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식탁 의자에 몸 냄새가 밴 카디건을 걸쳐 
두었지만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다시는 환청과 만나지 못한다 해도
그림자의 무릎 뼈가 미처 펴지지 못했다 해도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이상한 봄
달아나는 발목

엄마 아빠 - P12

피가 흩어지는 축제

비명과 꽃잎과 누수를
돌멩이와 비닐봉지의 중력을
나란히 이해해

땅을 오래 두드린 발
열리지 않은 땅
풀들은 담장 위로 위로 솟아오른다

이상한 봄
춤을 추다 발목만 남았어
내용을 생각할 틈이 없었어
온몸에 죽음의 불이 붙었었거든

작은 점 하나가 목젖 부근에
눈물을 참으면 울퉁불퉁하다
지구에서처럼 - P13

홈리스는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다
새들은 허공을 깨고 간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타본 적이 없어도
바다와 하늘이 바로 다음 언덕에서 만나고 
있어도
사방의 벽마다 출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해도

구겨진 틈 아니면 조롱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등 너머에서 붙잡던 목소리를 혀처럼 뽑아 쥐고 
있어도

나는 사람이다
팔다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너는 사람이다
예쁘고 연한 발목을 가졌다 - P14

자를 게 남았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지구로 못 돌아와도 좋다: 2023년 편도행 화성 정착 프로젝트 공개 모집을 다룬 기사 제목. - P15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 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텅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 P23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 한 개에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고
벽과 나란히 잠드는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꼭 껴안을수록 뼈가 걸리는 당신을 가진 - P24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하나의 창에서

인간의 말을 모르면서도
악을 쓰며 우는 신생아처럼
침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노인처럼

물을 마시고
다리를 접고 펼치고
반은 침묵
반은 허공

체조 선수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제 속을 불 지르고 만 새벽 두 시 도로처럼 고독하다
열두 살에 죽은 아이의 수목장 나무 앞에 놓인 딸기우 - P25

유처럼 고독하다

막힌 문을 향해 뛰어가는 비상구 속 초록 인간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시체를 뜯어 먹는 독수리들과 함께
높은 곳의 바람과 함께
다른 말을 하나로 알아듣는 이상한 경계와 함께
우리는 고독하다

흰 변기가 점령한 지구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변기의 무릎을 갖게 된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펭귄은 지구에서 고독하다
토끼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오로지 긴 귀가 머리 위로 솟아 있다
주파수 93.1MHz가 잡히는 지구는 고독하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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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포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 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 P36

절벽인데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 P37

모란의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 P54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 P55

백조의 호수 옆에서


고독은 아무리 고독해도
충분하지가 않다
가난은 아무리 가난해도
다 가난하지가 않다
고독한 사람은 주소가 없는 신전에
시간도 없는 신전에 산다
천장에 형광등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고독이 울타리 안에 무럭무럭 자라서
흙의 성분에 따라 여기저기서 다른 색깔로 피어나는 수국처럼
파란 꽃송이 연분홍 꽃송이 하늘색 꽃송이 결국은 하얀꽃송이 되어가며
고독은 도도한 명패를 걸어둔다
어처구니없게도 고독은 가난조차도 도도하다
춤추며 몸을 떠는 백조처럼 차고 도도하다
닫힌 방에 꽃이 너무 만발하면
꽃이 공기를 다 먹어치워 캄캄한 폐에 당도한다
고독은 그런 병을 가졌다
벌레도 꿀벌도 없는 꽃이 되어가는 병이다 - P64

닫힌 문의 고독은 그렇게 질식의 경지에서 만발한다
고독은 그렇게 고독사가 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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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9일 저녁, 올리버가 《마음의 눈》 출간 기널 파티를 열어 뉴욕의 친구들(작가, 신경학자, 올리버와 밀접하게협업하는 음악치료사, 올리버의 물리치료사와 피아노 선생님, 양치식물광 동료 등등)을 초대했다. 케이트가 내게 연락해 이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서 몇 마디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 아침 일찍 맨해튼행 열차에 올라 그리니치 빌리지와 트라이베카를 걸어 다니며 내 짧은 연설을 중얼중얼 외웠다. 그리고 파티에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다음 연설문을 암송했다.


2002년, 제 시력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평생 사시인이자 입체맹인으로 살았지만 48세에 시력 훈련을 받으면서 두 눈의 초점을 한곳에 맞추고 - P291

3차원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세상이더 길고 넓고 질감이 풍부하고 세밀해 보이고, 사물사이의 빈 공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척 기쁘지만 다른사람들에게 이 변화를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입체시는 유아기의 결정적 시기에만 발달할수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결코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반세기간 정설로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제게는매우 심오하고 기쁘고 계시적인 이 경험을 과학자와의사가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할까 봐, 제가 미쳤거나너무 순진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과장이 심한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3년간 입을 다물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2004년 12월 말의 어느 날 밤, 제 이야기가 몸 밖으로터져 나올 것만 같았고, 결국 일필휘지로 올리버에게 보내는 기나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 올리버와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올리버가 입체영상을좋아한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그의 책은 여러 권 읽은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믿을 수 있다면, 그가 자기환자의 말에 귀 기울였듯 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줄지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올리버는 제 편지를 읽고답장을 보내 저를 만나러 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쩜 좋지? 올리버 색스가 나를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 P292

찾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올리버를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저는 올리버가 어떤인물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의 책들을 다시 읽었고, 무엇보다 저희 집 손님이 될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싫어하는지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리버가찾아왔을 때 저는 함께 수영을 하러 갔고, 갈색으로푹 익은 바나나를 비롯해 올리버가 좋아하는 음식을대접했습니다.
올리버는 저의 입체시를 검사하려고 입체그림 장치와 도구를 잔뜩 이고 지고 왔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올리버는 그저 제시력이 얼마나좋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3차원 세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러한 변화가 더넓은 세상에서의 제 자아 감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올리버는 호기심을보이며 저를 면밀히 살폈지만, 그와 동시에 늘 친절했고 종종 재미있었습니다. 저를 대상화하거나 내려다보는일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올리버는 저를비롯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서 본질에 가 닿을 수있었습니다. 이 점은 《마음의 눈》이나 올리버의 다른책들을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우리의 관계는 작가와 글감에서 친구로 - P293

바뀌었습니다. 올리버는 훌륭한 스승이자 멘토이기도합니다. 올리버, 실제로 당신은 저의 엉클 텅스텐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열성적인 독자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 그러하듯이요.
멋진 책이 또 한 권 나온 것을 축하드리며, 다음 책도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엉클 텅스텐은 올리버가 가장 좋아했던 삼촌의 별명이다. 엉클 텅스텐은 올리버를 화학의 세계로 인도했고, 올리버는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록에 《엉클 텅스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마지막에 올리버가 나의 엉클 텅스텐이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의 탄성이 들렸고, 나는 연설을 마친 뒤 주위를둘러보며 올리버를 찾았다. 올리버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내 우주에 있는모든 별과 행성이 나란히 정렬하는 것 같은 때. 이날도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소리 높여 말했다. - P294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2011년 3월 17일, 올리버가 사무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졌다. 수술이 필요해서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지만 그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입원기간에 올리버는 척추 마취가 자기 몸에 미치는 영향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새 책 《환각》에 들어갈 수백 단어 분량의 원고를썼으며, 《롤링스톤》과 인터뷰를 했다. 나는 온라인에 있는 복고풍 장난감 가게에서 발견한 태엽 장난감 여러 개를 그에게 보냈다. 올리버는 특히 스테고사우루스 장난감을 좋아했는데, 힘겹게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이 꼭 자기 같다고 했다. - P301

덕분에 병원에 입원하고 처음 며칠간 큰 위로를받았습니다. ㅡ얼마 전부터는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수영도 못하고 체육관에도 못 가고 혼자서 산책도 못하는 이 답답한 회복기를 글을 쓰며 버틸 수 있겠지요.
...
제 어머니가 78세에 돌아가셔서, 저는 78세라는 제나이에 어떤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의여신들이 부디 고관절 골절에 만족했으면 좋겠습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은 올리버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2011년11월 22일에 진창이 된 언덕을 걸어 내려가다 미끄러져서 오른팔 요골이 부러졌다. 그리고 올리버의 선례를 따라, 부러진 팔의회복 과정을 나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하는 과학 연구로 삼기로했다.
팔이 부러진 날, 초등학생이 주로 사용하는 흑백 표지 공책을하나 사서 회복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 부상은 요골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팔이 부러지고 5일 후에 나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상처 입은 동물이 된 것 같다. 깁스가 내 팔을 숨기고 보호하듯이 나도 안으로 숨어드는 느낌이다. 감각이 달라졌다. 냄새가 달라졌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속이 메스껍다." - P302

올리버에게,

저는 지금 왼손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손)으로 이 편지를쓰고 있습니다. 11월 22일에 걷다가 넘어져서 오른팔요골이 부러진 이후로 계속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있어요. 글씨가 불안정하고 어린아이 같긴 하지만 이방식이 꽤 마음에 듭니다. 글씨를 천천히 쓸 수밖에없어서 결과적으로 생각도 더 천천히 하게 되고 마음도더 편안해지거든요. 지난주에는 제 책의 스페인어판 출간기념회에 참석하러 마드리드에 갔는데요. 왼손 서명을익히고 가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사인을 엄청 많이 해야했는데, 아마 오른손만으로는 다 못 했을 거예요.
팔이 부러지고 6주간 깁스를 했고, 그사이 요골은알아서 붙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붙지는 않았어요. 요골과 그 위에 있는 손목뼈가 전처럼 완벽하게 정렬되지않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는데, (재활의학과 의사였던)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의사도 이에 동의해서 먼저재활을 해 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나중에 수술을 받기로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재활 훈련은 무척 즐겁습니다. - P313

수에게,
2015년 2월 5일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지난달에 저의 안구 (포도막)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암은원래 잘 전이되지 않는 편이지만, 저는 이 괴물이몸에 퍼지기 전에 9년간 좋은 (그리고 생산적인) 나날을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이된 암은치료가 쉽지 않은데, 몇몇 처치로 속도를 지연시킬수는 있습니다-아마도 ‘생존‘ 기간을 6~9개월에서15~16개월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늘린 몇 달이좋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에 글을 쓰고(일부 또는 거의 다 - P360

쓴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 여행을다니고, (철없이 군다거나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ㅡ 제가 이 상황에 ‘적응‘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과 대상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 갑작스러운 ‘시간의 끝‘ 앞에서 평정심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지난 삶을 돌아보는 짧고 굵은 에세이 (제목은 <나의 생애>>를 쓸 생각입니다. 흄이 (1775년에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깨닫고 하루만에 쓴 글처럼요.
이 일이 닥치기 전에 자서전을 완성할 수 있어서정말 다행입니다. 출판사 측에서도 상황을 이해하고출간일을 9월에서 5월 1일로 앞당겨 주었습니다. 조만간 ‘가제본‘(사진이나 인덱스 등이 없는 미수정 원고)을 받으면이 편지와 함께, 또는 추후에 한 권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이래 교수님은 언제나 저의 중요한 (그리고 애정하는) 친구 (그리고 멘토)였습니다. 앞으로 몇 달간 교수님을 (자주) 만나 뵐 수 있기를바랍니다.
- P361

올리버가 현재 읽고 있는 책을 내게 보여 주었다. 파블로프에 관한 커다란 벽돌책이었다. 그는 등을 대고 누워 책을 높게 치켜든 자세로 독서하는 것을 좋아해서, 몇몇 책을 여러 덩이로 자른 뒤 각각을 바인더 클립으로 고정해 놓았다.
함께 녹차를 마시면서 올리버에게 연말에 교직에서 은퇴할예정이라고 말했다.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올리버는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일과 사랑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라고쓴 적이 있다. 글쓰기는 올리버의 일에서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나와 알고 지낸 10년간 그는 연이은 외상에도 굴하지 않고 굵직한 책을 네 권이나 집필했다. 우리가 처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 올리버는 IBM 셀렉트릭 타자기로 두 손가락을이용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것이 힘들어지자 손으로 직접 편지를 썼다. 말년의 몇 주간은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했 - P369

다. 그는 한 번도 일과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편하게 쉬려는 게 아니라 글을 더 많이 쓰기 위해 은퇴하는 것이라고 황급히 덧붙였다. 실제로 충격받은 올리버의 얼굴이 내내 잊히지 않아서 그 기억을 원동력 삼아 내 두 번째 책 《내게 없던 감각》을 완성했다.
헤어지며 포옹을 나눌 때가 되자, 나는 양팔을 벌리고 올리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올리버의 귀가 안 좋았기 때문에) 아주 큰목소리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올리버도 알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소리 내어 직접 말하고 싶었다. - P370

2015년 5월의 만남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다.
2015년 7월 9일, 82세 생일을 맞이한 올리버는 늘 그래왔듯 자기 아파트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다. 이번이 올리버의 마지막 생일임을 본인도 알고 우리도 모두 알았지만, 그는 연민의 대상이되거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올리버와 케이트는 언제나처럼 훈제 연어와 초밥을 준비했고, 이내 스물다섯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올리버와 나는 우리의 우정이 피어난 주제, 바로 시력에 관해이야기했다. 그가 거실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나를 데려가서 멸종한 절지동물인 삼엽충 화석을 보여 주었다. 5억 4천만 년 전에생성된 이 삼엽충 화석들은 눈으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동물의 존재를 명백하게 드러낸 최초의 화석이었다. 비록 7주 뒤세상을 떠났지만 이날 올리버는 다음에 무엇을 쓸지 여전히 고 - P372

민하고 있었고, 여러 동물이 세상을 보는 다양한 방식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성게의 경우 수많은 관족에 빛을 감지하는 세포가 있다고 신난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성게로서 세상을 보는 것은 어떤 경험일지 궁금해했다.
한번은 문어를 관찰하는데, 지능이 대단히 높은 생명체인 문어가 자신이 문어를 관찰하듯 똑같이 집중해서 자신을 뜯어보는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올리버는 문어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처럼 커다란 전방향 눈을 가진 여우원숭이에게도 친근감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그다음 주에 여우원숭이 센터를 방문하러 노스캐롤라이나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 대화를 나눈 직후 댄과 나는 시간이 늦기도 했고 올리버가다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조용히 아파트에서 나왔다. 올리버는 눈물 젖은 작별 인사를 원하지 않았다.
올리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 자신이 동물을 관찰했던 경험을 돌이켜보았다. 나는 과연 동물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마음까지 읽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틀 뒤 그에게 다음 편지를보냈다. - P373

편지는 "수에게"가 아니라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 인사말을 보니 2009년 12월에 올리버와 나눈 대화가떠올랐다. 그때 올리버는 "친애하는"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친애하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일반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자신이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운을 뗐을때, 나는 여기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사실 이 편지는 내가 호르헤 이야기를 전한 편지보다 9일 앞서 쓰였지만, 2015년 8월 30일에 세상을 떠난 올리버의 이 편지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


친애하는 수에게,
2015년 8월 9일

2004년에 교수님의 일지를 발췌한 첫 번째 편지를 받았을때, 우리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돈독한 우정이 피어나게될 줄은 저도 교수님도 몰랐습니다. 그 우정은 점점크기를 넓혀 댄까지 아우르게 되었지요. 지난달 제 생일파티에서 두 분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한 달간 제 상태가 급속도로 - P381

악화되었습니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고 매일 복수가1리터 이상 차서 아침저녁으로 빼내고 있습니다. 허나큰 불편은 없고, 케이트와 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헌신적으로 지원해 주는 덕분에 힘닿는 한 활발하게지내며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 생활에관한 글을 포함해 진행 중인 여러 프로젝트를 과연 끝낼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손님을 맞이하거나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나도멋진 조그만 그림들이 들어 있는) 교수님의 편지는 늘즐겁게 받아 보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제 삶에 추가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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