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동사형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 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풍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 P39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 P52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차라리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威義를 묻는다 - P56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똥 한무더기 쏟고
그 큰 눈망울에 물기 훙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곧은 뿔 앞세우고
소는 버틴다 - P57

명작


지리산 자락에
백로 한 마리 가로질러 날아간다

산이 푸르니
새 더욱 희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저 필생의 한 획

누구의 그림인가, 시인가
내가 그만 낙관을 눌러버리고도 싶었으나

낙관이 없어서, 서명이 없어서
더욱 명작인,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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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卜孝根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91년 계간 시전문지 <시와 시학》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이후,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등을 냈다. 시선집으로 『어느 대나무의 고백이 있다.
지리산 아래 살면서 산처럼 푸르고 깊은 시를 꿈꾸고있다.

변산바람꽃을 보러간다고, 앉은부채꽃 군락지를 발견했다고 꽃소식을 따라 발길을 재촉하는 그의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을 떠올린다. 그의 전언을 더듬어 춘설이 분분한 낯선 산속을 찾아갔다. 그때 내 앞에 펼쳐진 눈 속에서 피어난 앉은부채꽃의 경이로움이라니, 복효근의 시가 왜 그렇게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가를 슬쩍 엿볼 수 있었다. 서정의 빼어남을 굳이 말해 무엇하리. 절창의 수사를 덧붙여서 무엇하리.
무릇 시를 쓰는 이라면 살아서 꼭 한번은 이르고 싶은 곳이 있다. 마침표를 찍고 싶은 한 편의 시가 있다. 이 시집의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서 막무가내로 밀려오며 울리는 도저한 파문이라니,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치를 떤다. 복효근은 분명 시의 한끝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박남준(시인)

□시인의 말


숫눈 위를 고양이가 지나갔나보다.
그 자리에 얼음이 얼었다.
고스란히 꽃이다.
세상에, 발자국이 꽃이라니!
서늘하고 투명하다.

내 시와 삶은 무엇을 닮아있을 건가.
조심스레 여섯 번째 발자국을 내려놓는다.

2009 새봄
지리산 아래 범실에서

명편名篇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 P11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 P12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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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첨지는 화증을 내며 확신 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일원어치를 채워서 곱빼기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김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물론 셋집이요 또 집 전체를 세든 게 아니라 안과 뚝 떨어진 행랑방 한칸을 빌려 든 것인데 물을 길어대고 한 달에 일원씩 내는 터이다. 만일김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 안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리었으리라.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빡빡 하는 그윽한 소리, 어린애의 젖 빠는 소리가 날 뿐이다. 만일 청각이예민한 이 같으면 그 빡빡 소리는 빨 따름이요. 꿀떡꿀떡 하고 젖 넘어가는 소리가 없으니 빈 젖을 빤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 P139

혹은 김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일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 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무시무시한 증을 쫓아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떨어진 삿자리 밑에서 올라온 먼짓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는 똥내와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썩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첨지의 코를 찔렀다. - P139

방안에 들어서며 설렁탕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꾼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차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뭇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빡빡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개똥이가 물었던 젖을 빼어놓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붙여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 P140

등잔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글 아는 사람 구실 정녕 어려워라


구한말 한일합병에 항거하며 자결한 황현의 절명시 제3수의 일부이다. 요즈음이야 소설가든 기자든 글쓰는 일이 생업이 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해 물으면, 속으로는 이제 그럴싸한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겉으로는 말짱하게 시치미를 떼면서 "웬 그런 부담스런 말씀을......" 하면서 계면쩍어할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문고판도 낡은 책이 되어 내 서가의 구석에 얼룩진 채 숨어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여도 우리네 살림처럼 청천 하늘의 별만큼 수심이 가득한 고장에서는 혼자서 붓을 들고 유유자적하기가 마음 편한 노릇은 아니다. - P143

나는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도 좋아하지만 역시 운수 좋은 날」과 「고향」 같은 작품이 현진건 단편의 정수라고 보았다. 「운수 좋은 날,
은 어쩐지 손님도 잘 걸리고 돈도 다른 날보다 많이 벌리는 한 인력거꾼의 행보와 함께, 집에서 홀로 앓아누운 아내의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된다. 그것은 마치 스릴러 영화같이 불길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왠지 재수 좋은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이 믿음직하지 않고 불안한 까닭이다. 드디어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을 신바람나게 사가지고김첨지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허망하게도 안 나오는 젖을 빨며 울다지친 아기를 안은 채 흰자위를 드러내고 절명해 있다.
식민지 사회의 민중은 모두가 노예에 지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 운수 좋은 누군가는 동포에게 자기의 불운을 전가시키거나 결국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유예시키고 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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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염상섭


X회사 이층에서 하물계 荷物係주임 나리가 감숭한 윗수염 위에 뭉툭한 큰 코를 얹어놓고 또 그 위에는 검정 대모테 안경을 끼어놓고서, 인천 운송점에서 도착한 하물표를 들여다보며 주판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따르릉따르릉 하는 소리가 뒷구석에서 나더니,
"녜, 녜, 그렇습니다. 어디세요? ....... 글쎄 누구세요? ...... 녜에. 그러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전화를 받던 아이 녀석이 시룽대는 소리로 말끝을 길게 빼다가 툭재치는 어조가 저편이 여자인지 놀리는 수작 같다.
"이주사 나리, 전화 받읍죠. 급한 전화랍니다."
여드름바가지의 사환 아이놈은 달뜬 목소리로 한마디 외치고 나서, 저편에 앉았는 출하계出荷係주임인 김주사를 바라보고 콧날을 으쓱한다. - P17

"가다간 이런 일두 있어야 살 자미가 있는 거야."
아씨의 신기가 이렇게 좋기란 결혼 이후에 처음일 것이다.
"그래 아무 소리 없이 내놉디까?"
"마침, 아들두 나와 있겠죠. 영감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전화를 안 내놓거나 하면 돈만 뜰까봐 겁은 나구, 아들은 못 믿겠구 해서뒷구멍으로 알아보느라 이리 직접 편지를 했던가봅니다. 그러나 아들이 오백원에 흥정이 된 거라고 고집을 부립디다마는, 그럼 무르자고 야단을 쳤드니 결국 영감이 수그러지드군요. 칠백원이래두 저희는 이가 되기에 선뜻 또다시 이백원을 내놓겠지."
"흥, 자식이 떼먹은 것이니까 창피한 생각도 들어서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 영감 결국 채홍이에게 아들의 해웃값 무리꾸럭해준 셈이군."
하고 슬며시 아내더러 들어보라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럼 채홍이 집 김장은 김주사가 해줬구려? 흥, 그래?"
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이 아내는 샐쭉 웃다가,
"여보, 우리 어떻게 또 전화 하나 맬 수 없소?"
하고 옷도 채 못 벗고, 턱밑에 다가앉아서 조르듯이 의논을 한다.
남편은 하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하며 아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 P41

염상섭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에 대한 구구한 설명과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소설이란 결국은 세속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화‘는 개발독재시대였던 1970년대까지도 특권의 상징이었는데, 192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라면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추첨을 통하여 ‘매어놓게‘ 된 하물계 주임의 집에 처음 걸려온 전화가 고작 기생의 것이어서, 부부싸움으로 소설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전화‘라는 이 새로운 물건을 누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상태로 생활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면서 그것을 남에게 되팔아넘기고 약간의 시세차익을 얻는데, 주인공의 아내가 ‘어떻게 전화 하나 또 놓을 수 없느냐‘고 조르면서 소설이 끝난다. 식민지 부르주아가 누리는 풍족한 일상이라고 해봤자 이렇듯 시시껄렁하기만 하다. 부르주아였던 발자크의 냉정하고 정직한 현실주의적 시선에 대해, 엥겔스는 "바로 이들 귀족들을 그릴 때 그의 풍자가 더 예리해지고 아이러니가 더 신랄해졌다"라고 말한 것을 읽은 생각이 난다. 염상섭은우울한 시선으로 찍은 퇴색한 사진 몇 장을 늘어놓음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해놓고 있다. - P47

쥐불鼠火
이기영


며칠째 연속하던 강추위가 오늘은 조금 풀린 모양이다. 추녀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린다.
바람이 분다.
그래도 정초라고 산과 행길에는 인적이 희소하였다. 얼음 위에 짚방석을 깔고 잉어 낚기로 생애를 삼던 차첨지도 요새는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강 위에는 벌써 언제 온지 모르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갓모봉의 험준한 절벽 밑을 감돌고 다시 편한‘ 들판으로 흘러내린 K강은 마치 백포를 편 것같이 눈이 부신다. 간헐적으로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풍旋風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올라간다. 광풍狂風은 다시 강상백설을 후려쳐서 강변 이편으로 들날린다.  - P49

「쥐불」은 이기영이 2차 카프 검거 선풍으로 옥고를 치르기 전에 쓴 중편소설이다. 이를테면 그의 「쥐불」과 「고향은 카프 문예운동을 선언한 이래 비로소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작품으로 당대를 형상화한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1933년 무렵은 앞서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좌우합작운동이던 ‘신간회‘가 해체되었으며, 윤봉길의 상해거사가 있었고, 전국적인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총독부는 치안유지법 개정으로 삼천여 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미곡 생산 통제를 위하여 농촌갱생운동신생활운동을 실시한다. 유신이란 단어도 그랬지만 내가 1970년대에 예비군으로 겪은 ‘국민교육헌장‘ 암송은 선배들의 일제시대 ‘교육칙어‘ 암송에 해당되고, ‘새마을운동‘은 ‘신생활운동‘과 흡사하다. - P125

「쥐불」은 돌쇠라는 주인공이 동네 청년들과 정초에 노름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은 소 판 돈을 갖고 있던 이웃집 응삼이의 돈을 따먹으려고 꾀었던 것이다. 응삼이는 사람이 모자란데다 이쁜이라는 이름처럼 고운 아내를 가졌고, 그녀는 속으로 돌쇠를 좋아한다. 면서기 원준이는 자기가 탐내는 이쁜이의 속내를 눈치채고 유지들을 선동하여 마을회의에서 돌쇠를 신생활운동을 저해하는 타락분자로 몰아세우고,
돌쇠는 자책과 함께 어느 지식인 청년의 도움으로 유지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소작농의 현실을 말한다. 지식인의 등장 - P125

과 유부녀인 이쁜이와의 정분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여도, 작가는 민중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작품에 그대로 까발림으로써 당시의 농촌사회를드러낸다.
‘쥐불놀이‘는 해동 무렵에 한 해 농사의 밑거름과 해충구제를 위하여 논밭에 불을 지르는 일종의 정화 행사인데, 아마도 그뒤에 씨를 뿌리면건강한 알곡이 열릴 것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른 신경향파 작가들의 지옥도 같은 생활상이나 경직된 투쟁의 교훈 없이 살아 생동하는 사람살이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기영은 그의 「창작방법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P126

현재에 있어서, 문학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은 대개 소시민적 인텔리층 출신이므로, 그들의 제작하는 작품이, 필연적으로 인텔리적 취미를 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르문학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되는 이상, 모름지기 대중성을 가져야 할것이 아닌가? 더구나 문화의 정도가 얕고 전 인구에 문맹이 대다수를 차지한 이 땅에서는 그럴수록 통속적이고 대중적여야 할 것 아닌가?(동아일보, 1934.6.4.)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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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p.67

대보름


홑이불 같은 구름 헤치고
정월 대보름달
둥실 떠올랐다
연을 시집보내는 애들도 없고
지신밟고 논둑 고사 지내는 어른도 없다
쥐불놀이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부럼을 깨든 단단한 이빨들은
어디서 쓰디쓴 삶을 깨물고 있는지
귀 밝은 술 나 혼자 마신다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다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 할 테다 - P34

하늘은 맑은데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름달
물먹었다
올해도 물풍년은 틀림없겠다 - P35

모범생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몸으로 글자를 익혔다
아주 천천히

이제 몸은 경전이 되었다
걸어가는 모습도 글자가 되어
앞으로 갈 때는 ㄱ자가 되고
누우면 ㄹ자가 된다
서툴게 익힌 글자가 서 있으면
자꾸 뒤로 꺾어진다
몸의 기억은 완고하여 한 번 습득한 글을
결코 놓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서
묵묵히 복습을 하는 사람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첫눈이 지운다 - P43

동행


그녀는 졸면서 국자로 갯물을 떠서
꽃게 등에 붓고 있다
졸음을 참느라 닫혔다가 간신히 열리는 눈꺼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손놀림
배 멀미에 차멀미까지 겹친 꽃게는
뽀글뽀글 힘겹게 바다를 토해낸다
생生이 죽음으로 가는 출발이라고 한다면
꽃게는 지금 생의 종점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바다를
몸으로 지우는 작업을 하는 중일 게다
그렇다면 졸린 눈을 끔벅이며
꽃게 등에 갯물을 떠 붓는
시장통 늙은 여자의 손놀림은
어떤 기억을 지우려는 반복일까
죽음을 기다리며 엎드린 꽃게처럼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몰릴테지만
그때 담담히 자기 생生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사람 - P44

몇이나 될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 발꿈치 아래
바다를 버리고도 의연한 꽃게가
열 개의 발을 오므리며 합장을 한다 - P45

냉이꽃


참으로 모질기도 하구나
오고가는 길섶에
밟혀 죽은 줄 알았더니
겨우내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납작한 이파리마다
어느새 푸른빛 띄우고
모가지 길게 뽑아
눈물겨운 밥사발 가장자리 눌어붙은
밥풀 같은 꽃잎
몇 개 달고
天下의 봄을 호령하는
너는 - P56




한사발의 밥을 먹고 누는
한덩이의 똥
반드시 흙에 누어야 되리

그 똥
맛난 밥이 되어
살찐 흙
우리에게 고봉밥 한 사발 담아 주리니

밥이 똥이고 똥이 흙이고 흙이 밥이고
그 밥
달게 먹고 땀 쏟는 사람
비로소 흙을 닮은 사람 되리 - P66

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 P67

못자리 하던 날


앞산 진달래 혼자 붉어 혼자 지고
황사 바람 속 울던 뻐꾸기 어디론가 날아갔다
일터 잃은 사람들 한숨이 거리를 메우는 오늘도
신문을 꽉 채운 구역질나는 정치 놀음
밭둑 개나리마저 노랗게 질렸다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는 그런 땅에서
더불어 살고 싶은 날
논 한 배미 있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그 고마운 땅에
볍씨 한 움큼씩 뿌리면서
이 어린것들이 캄캄한 세월 틈에
어찌 뿌리 내려 자랄까
근심되는 하루
누런 들판 참새 떼 쫓는 행복을 꿈꾸면
고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P70

새참 때
옛날처럼 싸라기를 빻아
쑥개떡을 빚어 내오신 어머니는
무논 넘치는 개구리 울음은
마른 봄 판 배곯아 죽은 어린 넋이라 하시며
눈시울 붉히는 저만치
四月, 답답한 마파람
구부러진 논둑에서 쉬엄쉬엄 불었다 - P71

햇빛 한 줌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잿빛 무거운 구름 뚫고
칼날바람에 꺾이지 않고
낮은 추녀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마늘씨를 쪼개는
거친 손등 위에
잠깐 머물며
기죽지 말고 살라고
속살거리고
사라지는 - P116

정낙추 시집 「그 남자의 손(애지, 2006)은, 최근 우리 시가 현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음역(音域)을 선명하게 복원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태작이 거의 없는 한결 같은 집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어맨다. 그는 태안에 살고 있는 농부이자 시인이다. 그로서는 첫 시집이 되는 이번 작품집은, 이러한 그의 구체적인 농사체험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상처들을 채집하면서도, 그것들을 깊은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주류 미학에까지 다다랐다가 최근 들어급격한 담론적 소강 상태를 보이는 우리 시대의 ‘농민시‘의 한 전형을 만나게 된다. - P117

시집 맨 앞쪽에 실려 있는 시편들은, 시인이 품안에 품고있는 가장 근원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넉넉하고 따뜻한 대지적 긍정에서 발원하여, 생명에 대한 경이와그 생명을 안아 기르는 섬세한 마음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구체적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시집 전체 속으로 아련하고도 아프게 번져간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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