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하는 정신이 든 듯 말했고 오가다는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복도는 말갛게 뻗어 있었으며 호젓했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없었다. 이층 창 밖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옆방도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이튿날 일행은 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달리는동안에도 그랬지만 가다가 어느 역두에 머물렀을 때도 쇼지는 지치지 않고 창 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 녹아 들어간 듯한 눈빛이었다. 척박한 철로 연변의 땅이며 대부분 남루한 차림의 조선인들이 쇼지 눈에 어떤 의미를 지니며 다가오는 것일까? 오가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조선땅 산골에다 쇼지를 풀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부성(父性)의 본능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시시각각 일본 본토에 다가오고 있는 전화(戰火)를 예감하고, 예측 불허, 만주대륙의 상황, 어떠한 대혼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것에 대한 강박이 조선땅 산골에다 아이를 풀어놓고 싶다는 황당한 생각을 유발했는지 모른다. 진실로 오가다는 쇼지를 위하여 이 불행한 시대를 절감하는 것이었다. - P302

한이 된다는 말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희망이 없는캄캄 절벽, 어디서 빛줄이 새어들어 한을 풀 새날을 기다려본단 말인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은 비단 성환할매나 박서방뿐만은 아니었다. 최서희도 지금 평사리에 내려와 있었다. 날개 찢긴 나비같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파닥거리지도 않았고 몸부림치지도않았다. 조용하게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석꾼 살림의 최서희나 나룻배 뱃삯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박서방이나 눈이 멀어버린 성환할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은 상태는 매일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평등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귀신도 달랜다는 말을 하는데그것은 거짓말이다. 산 사람도 달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하물며 서천으로 넘어가는 해를 그 누가 잡을 것이며 망망대해로 흐르는 물을 누가 막을 것인가.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 전쟁이요, 작은 섬나라 대일본제국의 야망이야말로 칼로써 귀신을 잡으려 하니, 재앙은 인간 스스로 만들고서 그 스스로도 덫에 걸리는것이 아니겠는가.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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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은 올라탔다. 삐이! 하고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상과 차단된좁은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가난하고 이지러진 영혼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기찻간은 사람들온기로 몹시 춥지는 않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비슷한 말들이이따금 귀에 흘러 들어왔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위축되고 긴장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차바퀴의 울림조차 정답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나온 길이 어떠했든지 이 순간의 충일함 따사로움만을 소중하게 품에 안듯, 그러나 역시 슬프기는 했다. - P198

얼굴을 들었다. 먼,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보낸다. 하늘과 지상의 선은 뚜렷하건만 어째 사람의 삶이 수없는 곡선으로 이다지도 수없이 얽혀 있는가. 저 하늘의, 지상의선이 뚜렷하다. 인생도 명쾌한 것일 수는 없는가.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흐르는데 저 하늘과 같이 영롱할 수는 없는가. 그러면서도 양현은 영광과의 사랑이 아팠다. 영광이 그렇게 자상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양현은 미처 몰랐다. 영광과 헤어지고 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시니컬한 미소였고 떠밀어내는 것 같은 몸짓이었는데,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이 허둥대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몸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같이 웃는 얼굴, 근심 면 눈동자가 망막 속에 남아 있었다. 송영광이라는 사내,
행복의 느낌, 이미 그런 것은 양현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는데, 확신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양현은 벌써 그것을 잃는 데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목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이를 데리고 땀을 흘리며 병원을 찾아온 젊은 댁네와 손마디가 굵은 아이의 아비, 무척초라해 뵈던 그들이었지만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던 풍경은 아름다웠다. 양현은 그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남자는 인천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다가 낙상했으며 양현이 근무하는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양현은 부르르 떨었다. - P204

분명 그랬다. 영광에게 그 말은 제동을 건 결과가 되었다. 목표도 희망도 없이 찾아온 인천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양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찾아왔고 때문에 결과도 과정도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뭔가에 내맡겨진 자신을 수습할 수 있게한 것이 양현의 말이었던 것이다. 부친 송관수의 얘기를 한 것도그 때문이었다.
욕망만큼, 욕망이 강하면 강한 만큼, 그것을 자제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힘이 상승하는 영광의 심리 상태. 그 미묘한 현상이 나타니는 탓도 물론 있었고 또 자제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양현이 의사 노릇을 하며 생활을 꾸려갈 그러한 정착은 그것이 도시이건 농촌이건 간에 영광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같은 관계는 사랑의 훼손으로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성격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의 능력이충분한 양현은 그러나 생활의 현실을 모를 것이며 생활면에서는부동적(動的)일 수밖에 없는 영광은 현실이 그 얼마나 가열한것인지 노가다로 전전했던 동경생활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체득했다. 영광은 그런 자기 심정을 부친의 예를 들어서 완곡하게 전하려했지만 머리와 꼬랑지를 잘라먹고 한 얘기가 과연 양현에게 어느만큼 전달이 되었는지, 그러나 영광은 더 이상 중언부언할 수가 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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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희가 관음탱화 앞에 섰을 때 백씨는 불상 앞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무엇을 기원하는지 예배를 올리는 한복차림의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눈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화에 대한 상식이 없었고 종교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판쯤으로 인식했던 명희 눈에 처음 관음상이 비쳤을 때 그 현란함과 섬세한 데 호기심을 느끼긴 했다. 보관이며 영락, 투명한 옷자락의 유연한 선과 그것에 싸인 아름다운 자태는 정교했고 색조는 유려했다. 그리고 환국의 부친이자 서회의 남편 김길상에게 이와 같이 숨은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백씨는 계속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오십대 중반의 나이,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오래된 가구의 일부처럼 각별한 의미도 존재도뚜렷하지 않았는데, 하기는 모처럼의 나들이여서 차림이 달라지기는 했다. 은은한 보랏빛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모습은 오랜 세월 한복에 길들여진 독특한 멋이 있었고 또 서울 여자의 세련된 탯거리가 역력했지만 그러나 그저 그런가 보다 했던 사람이 피어오르는 향과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부처님 미소를 향해 나래를 펴듯, - P96

나래를 접듯 일어서고 엎드리는 동작을 반복하며 경건하게 예배를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탱화에서 눈을 떼고백씨를 바라보던 명희는 여간하여 그 예배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다시 관음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명희는 참으로 기이한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현란하게 보이던 관음상이 폐부 깊은 곳, 외로움으로 명희 이마빼기를 치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명희는 자기마음 탓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숙연한 슬픔, 소소한 가을 바람과도 같이 영성을흔들며 알지 못할 깊고도 깊은 아픔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슬픔인 것 같았다.
법당에서 나왔을 때, 선명한 단풍과 아직은 푸름이 남아 있는 맞은편 숲이 투명한 푸른 하늘에 묻어날 듯 명희 시계에 들어왔다. 마치 인생의 한 고개를 넘은 듯 명희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나왔다. 도대체 김길상이란 누구냐 하는 의문도 명희 마음속에서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 P97

그가 출옥한 지 십여년, 그러나 명희가 길상을 만난 것은 환국이 결혼할 무렵에서 그 이후 서너 번인가? 정확하게는 환국이 결혼하던 식장에서 처음 명희는 길상을 보았다. 투사형의 장대한 체구를 상상했던 명희는 뜻밖이라 생각했다. 키는 컸지만 다소 마른 편이었고 몸가짐이 매우 조용했다. 투사형이기보다 오히려 명상적이며현실과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임명빈은
"출신 신분과도 다르고 활동을 한 행적과도 다르고, 학식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뭐랄까? 인간의 존엄성이라 할까, 범치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더군. 그분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야. 말수도 적은 편인데 그 말도 아주 절제된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든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생 - P97

역정에서 갈고 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람의 인연이란 참 신비스럽다는 생각을 했지. 신분이 극과 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어울리는 한쌍의 부부도 세상에 그리 흔치는 않을 거야. 그분들의 인생이야말로 굉장한 드라마다."
그런 말을 했다. 문청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임명빈의 말투를 그때 명희는 민망스럽게 생각했다.
"드라마 아닌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 그야 그렇지만."
해가 떨어지고 저녁을 끝냈을 때 산사에는 어둠이 밀려왔다. 상좌가 와서 불을 밝혀주고 간 절반은 한결 넓어 보였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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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치가 산골에서 처음 이 항구에 왔을 때, 이곳이 그에게는 경이로운 신천지였다. 항구 가득히 정박한 작은 배들과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장식한 어마어마하게 큰 윤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입항하는 광경이며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잡화상의 밤은 화려했으며 홍등가(紅燈街)의 불빛은 그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그러나 몽치는 이내 그런 황홀감과 작별을 했다. 소금에 전 누더기를 입고 파도에 휩쓸리며, 파도가 오면 뒤로 나자빠지고 파도가 가면 앞으로 고꾸라지며 고기떼를 쫓아가는 배,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나뭇잎 같은 배, 어로 작업은 그야말로 혈투였으며 흥분의 도가니였다. 몽치는 생사를 건 것 같은 생생한 그 삶의 현장을 사랑했다. 수만 맹수들의 포효 같은 파도와 맞서는 것이 통쾌했다. 걸걸한 바다사내들의 목청이며 핏발선 눈동자, 힘줄 솟은 적동색 팔뚝이며 짧게 해치우는 대화, 욕설로 정을 주고 속담으로 비아냥거리는 사내들, 누더기의 모습으로, 막걸리 한잔 국밥 한그릇 입가심하고 항구의 거리를 누비는 몽치였지만 그는 자꾸만 가슴이 커지는것을 느꼈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움은 산중, 바람소리밖에 없었던 아비 시체 곁에서 이미 다 겪어버렸다. - P286

산짐승의 울부짖음과 산 속에 있는 모든 생령(生)들의 그 가만가만 부르며 화답하는 숲속을 치닫고 벼랑을 타며 바람이 키웠고 햇빛이 보살핀 아이, 지감은 지식을 베풀었으며 해도사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휘는 우의를, 영선은 누이 같은 사랑을주었다. 그렇게 예비된 육신과 영혼이 파도에 부딪치고 바다에 내던져지고, 나약하며 사악하고 선량하면서 노회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열정과 냉담, 온갖 특성의 인간들 속에서 몽치는 폭을넓히며 대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간신히 소주 한 병을 구한 몽치는 서문고개 언덕, 휘의 집으로 갔다. 빈집같이 집안이 조용했다. 안방은 깜깜했고 작은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 P287

눈을 부릅뜨고 죽은 조준구의 형상은 끔찍했다.
몽치는 부릅뜬 조준구의 눈을 쓸어서 감겨주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오리 한방울까지 훑어내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호박덩이 같았던 두상은 쪼그라져서 조그맣게 돼 있었다. 몸도 줄어들어서 아주 작아져 있었다. 손가락은 모두 펴진 채, 그 다섯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굽어져 있었다. 3년을 넘게 병상에 있었는데 어쩌면 조준구의 마지막 일 년은 살아 있었다기보다 죽음을 살았는지 모른다. 죽은 후의 과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시신을 씻을 때 욕창으로 탈저(脫疽)된 부분이 문적문적 떨어져나왔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의를 입히고 갈고리 같이 된 손가락을 펴고 두 팔을 가지런히 한 뒤 염포(殮布)로 묶고,
그러는 동안 몽치는 땀을 많이 흘렸다. 거들어주는 휘도 땀을 흘렸다. 염습을 끝내고 나왔을 때 별안간
"아이고 아이고오!"
머리를 푼 병수댁네가 들린 사람같이 곡성을 올렸다. 그 소리는 심야의 정적을 찢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곡성은 마치 한줄기 빛이되어 시공을 뚫고 저 머나먼 저승의 나라, 명부(冥府)의 캄캄한 삼도천까지 울리어 가고 있는 듯 이상하고도 이상한 귀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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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양현이, 가족들 사랑을 한몸에 받는 양현이, 의전학생인 양현이, 시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기생의 딸인 양현이,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핏줄도 없는 양현이, 그런 그가 장중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것은 분노를 살 만한 일이 아닌가. 집안의 큰며느리로, 그 역시 귀하게 당당하게 자란 처지고 보면, 덕회의 입장에서보면 절대적으로 약자인 양현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일목요연하게 명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현의 고통을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의 불화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 때문이겠는데 양현의 고통은 참는 것에 있는것이 아니며, 덕회의 악의를 견디어내기 힘들어서도 아니며 서희나 환국이를 기만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명희는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춘 양현은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구겨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고 보니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 P175

올해 한해만 죽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한다면 내년 봄에는 졸업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양현은 자연스럽게 최씨네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양현은 자유로운 천지를 꿈꾼적이 없었지만 하여간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양현에게 초미의 현실이었다.
‘일년만 참으면 돼. 일년만 꾸욱 참자.‘
양현은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만나지 못한 기간을따진다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해서 더욱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 때문에 자기만을 따돌린 덕희의 처사가 그토록 깊이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덕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지나쳤다 싶었는지 요즘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양현이 명희집에서 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사실 덕회는 전전긍긍했다. 명희가 진상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나 남편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여간한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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