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디밀자 기차표와 거스름돈이 나왔다. 행선지는 수원이었다. 인천서 수원까지, 선로가 좁고 기차도 작은 수인선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동차에 영광과 양현은 올라탔다. 삐이! 하고 내지르는 기적 소리와 함께 기동차는 움직였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유랑길을 끝낸 것처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본다. 서해의 끝없는 개펄, 그리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 염전, 두 사람은 다 같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구 끝을 작은기차가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세상과 차단된좁은 공간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가난하고 이지러진 영혼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오는 것을 느낀다. 기찻간은 사람들온기로 몹시 춥지는 않았다. 독특한 억양과 사투리 비슷한 말들이이따금 귀에 흘러 들어왔고 아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지만 위축되고 긴장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일을 넘어가는 차바퀴의 울림조차 정답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내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나온 길이 어떠했든지 이 순간의 충일함 따사로움만을 소중하게 품에 안듯, 그러나 역시 슬프기는 했다. - P198
얼굴을 들었다. 먼,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보낸다. 하늘과 지상의 선은 뚜렷하건만 어째 사람의 삶이 수없는 곡선으로 이다지도 수없이 얽혀 있는가. 저 하늘의, 지상의선이 뚜렷하다. 인생도 명쾌한 것일 수는 없는가. 푸른 하늘에 실구름이 흐르는데 저 하늘과 같이 영롱할 수는 없는가. 그러면서도 양현은 영광과의 사랑이 아팠다. 영광이 그렇게 자상한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양현은 미처 몰랐다. 영광과 헤어지고 나면 언제나 떠오르는 것은 시니컬한 미소였고 떠밀어내는 것 같은 몸짓이었는데, 얼마나 많이 자기 자신이 허둥대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몸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년같이 웃는 얼굴, 근심 면 눈동자가 망막 속에 남아 있었다. 송영광이라는 사내, 행복의 느낌, 이미 그런 것은 양현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는데, 확신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양현은 벌써 그것을 잃는 데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목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아이를 데리고 땀을 흘리며 병원을 찾아온 젊은 댁네와 손마디가 굵은 아이의 아비, 무척초라해 뵈던 그들이었지만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던 풍경은 아름다웠다. 양현은 그들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남자는 인천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다가 낙상했으며 양현이 근무하는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양현은 부르르 떨었다. - P204
분명 그랬다. 영광에게 그 말은 제동을 건 결과가 되었다. 목표도 희망도 없이 찾아온 인천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양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찾아왔고 때문에 결과도 과정도머릿속에는 없었다. 그냥 뭔가에 내맡겨진 자신을 수습할 수 있게한 것이 양현의 말이었던 것이다. 부친 송관수의 얘기를 한 것도그 때문이었다. 욕망만큼, 욕망이 강하면 강한 만큼, 그것을 자제하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힘이 상승하는 영광의 심리 상태. 그 미묘한 현상이 나타니는 탓도 물론 있었고 또 자제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양현이 의사 노릇을 하며 생활을 꾸려갈 그러한 정착은 그것이 도시이건 농촌이건 간에 영광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같은 관계는 사랑의 훼손으로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성격상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의 능력이충분한 양현은 그러나 생활의 현실을 모를 것이며 생활면에서는부동적(動的)일 수밖에 없는 영광은 현실이 그 얼마나 가열한것인지 노가다로 전전했던 동경생활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체득했다. 영광은 그런 자기 심정을 부친의 예를 들어서 완곡하게 전하려했지만 머리와 꼬랑지를 잘라먹고 한 얘기가 과연 양현에게 어느만큼 전달이 되었는지, 그러나 영광은 더 이상 중언부언할 수가 없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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