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 접근을 막는 펜스 바깥,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벤치가있었다. 평생 ‘밟지 마세요‘라는 표지판만 보고 살아온 유자는 걱정 없이 잔디를 밟고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그 벤치가 좋았다. 그게 실은 조경용이라 결코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 앉으라는 의도가아니었다는 걸 몰랐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후에도 가끔씩 잔디밭안으로 들어갔지만 전처럼 생각 없이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펜스 앞에도 벤치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암벽을 등지고 앉아 잔디밭 한가운데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잔디를 밟을 때의 폭신하고, 미끌하고, 심지어는 바삭하기까지 한 감촉이 그리움처럼남았는데, 그게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기억인지 금지된 것을 안후의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때때로 발밑이 아찔한 것을 보면, - P120

시작은 그랬다. 그게 유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 때로는 앙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모진 마음 그대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죄책감으로 변환해가며 살았다. 자기를 먼저 놓아버린 아빠 대신 쩔쩔매느라 자기를 놓아버리지도 못한 엄마를미워했던 건 그게 쉬웠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사이가 나빠진 후은율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매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엄마는 할퀴기도 쉽고 꼬집고 물기도 쉬웠다고. 꿈속에서는 주먹질도 했다고. 유자는 이해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다가 나중에는 일 년에 한두 번도 안 만나게 된 아빠에게는, 품고 있는 마음이 무엇이든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을 테니까.
잔뜩 준비를 하고 나가도 다 쏟아붓기는커녕 잠깐 미워하기도 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는 은율을 집으로 보낼 때마다 버스 창밖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나의 상처야, 안녕, 해맑은 웃음을 감추지도 못하며, 그래도 너무 해맑게 보이는 건 아닐까 잠깐씩 망설여가며.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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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있을까. 어떻게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옳은지",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는 마음은 어느 고개 너머에 있는것일까. 너머라는 말은 거창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거창하지 않은 오해로부터 마음을 가늠할 수 있는 고개를 넘고 넘는다. 누구에게나 생활이 있다. 생활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정황들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너머에는 호명되지 않은 생활과 마음이 있다. 그곳에는 "같이 살기 싫던 마음"과 "같이 살게되던 마음이 동거하고 있다. 오해를 거듭하는 생활은 도처에놓여 있던 그림자의 그림자" 같은 마음들과 고개를 넘어가고있다. 먼저 생활하고 있다.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선생이라 부를 것이다. 그들은 고개 너머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먼저 묻는 사람생활이라는 숭고한 일을 어떻게 바르게 오독할 수 있을지 받아 적는 사람일 것이다.
시인은 살다보니 "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나는 열심히 했다고 살 것 같던 마음을 오독했노라고 말할 테지만 읽고 있자니 "살 것만 같던 마음"이 "반짝이며 헤엄쳐" 범람하고 있었다고 되레 고백하고 싶어진다.
비로소 "살 것만 같던 마음"으로 "사라져서 더는 나타나지 않던 얼굴들"을 하고 있는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라보고 있자니 숭고해진다고, 그 얼굴들을 사랑하지 않을 용기"가 도무지 없다고.
홍지호 시인 - P-1

시인의 말


시 쓰는 시늉을 해온 것 같다. 시는 크고 나는 작다보니 별수가 없었다. 연인이었던 인연들을 인연인 연인들로 바꾸어모시려 한 것이 한 시절 내 시늉이었던 듯하다. 나는 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고 느끼지만 이 봄에도 어느 바람결에나 다시 살아나는 것들이 많다. 온전해지고 싶어 험난하게 애쓰는, 그 모든 실성기를 사랑한다.

2024년 늦봄
이영광 - P-1

평화식당


오래전에는 식당에 혼자 가면 미안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식당에 혼자 가면 받는 홀대에 분개하는 인간으로 바뀌었고요 얼마나 옳았는지 몰라요 쉰이 넘자 다시, 식당에 혼자 오면 미안해지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벌레처럼요 얼마나 옳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안한지..…

기뻐하지 않기 위해 기뻐할 것
자랑하지 않기 위해 자랑할 것
옳지 않기 위해 옳을 것
옳음의 불구처럼 옳을 것

구가하지 않을 것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가난할 것
분개하지 않기 위해 분개할 것
미안하지 않기 위해 미안할 것
미안의 불구처럼 미안할 것

구가를 구가하지 않을 것 - P8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할 것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
죽지 않기 위해 죽을 것
죽음의 불구처럼 죽을 것 - P9

강가에서


떠남과 머물이 한자리인
강물을 보며,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미워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쁜 생각인 줄
모르고서
흘러도, 답답히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따지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상하지 않고
오직 나만 피 흘리는 중이란 걸
모르고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서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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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모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모는 큰이모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녀의 돈으로 공부해 대학까지 마쳤다. 그 언니가 평생 자신을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고, 문병 한번제대로 온 적이 없었어도, 단번에 팔백사십만원을 내놓는다면,
그래, 받을 수 있다. 이모에게 필요한 돈이니까. 필요하다면, 그래, 받아야지. 그리고 큰이모는 말을 원래 그렇게 하니까. 가족들에게 베푸는 만큼 대접받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싶어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청춘을 보상받고 싶어하니까. 그래. 그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까. 무슨 말을 하든 내버려둘수 있다. 어렵지 않다. 그러려니 하며 돈을 챙길 수 있다. 십년 넘게 자신을 돌본 작은언니에게 "누가 너한테 얘 도와주라고 했니? 네가 좋아서 한 거잖아. 네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분에 취하는거, 그게 좋았던 거잖아. 덕분에 그간 둘이 나 욕하는 세월이 즐겁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걸 못 들은 척할 수 있다. 그때는 작은언니가 더 미웠을 테니까. 자기 돈을 훔친 파렴치한 사람에 불과했을 테니까. 때문에 큰언니가 "이제 진이도 빨리 시집보내. 신부가 나이 먹으면 드레스 입어봤자 별로 예쁘지도 않아" 그렇게까지 말해도 화내지 않을 수 있다. 그래. 그렇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P93

가슴 한가운데가 불에 활활 타는 것 같았다.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듯했다. 어느 날은 누군가 내 허벅지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콱콱 쑤셔박는 것 같았고, 또 어느 날은 내 머리를 벽에 쿵쿵 짓찧는 것 같았고, 또다른 날에는 등의 가죽을 생으로 쓱쓱 벗겨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실감나는 고통 속에서도 도와달라고소리치지 않았다. 내가 약간이라도 소리를 내면, 그래서 진짜로아프다고 외치면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모든 것들이 다무너질 것 같아서.
그러다 또 어느 날, 나는 은행에 가서 오백이십만원을 인출해왔다. 당장 이 정도 돈은 이모에게 무리 없이 줄 수 있었다. 다음달에 월급이 나오면, 백만원이든 이백만원이든 또 보내면 될 것이다. 팔백사십만원. 그래.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랬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둔 채 매일 밤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모에게연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신경쓸 일이아니라는 말을 또 들을 것 같아서? - P96

많이 아팠다. 일단 잠을 못 잤다. 뜬눈으로 이 주를 지새웠다. 살이 많이 빠졌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땅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었다. 모든 일과 원고를 미뤘다. 겨울부터 돌아오는 겨울까지. 그렇게 단편을 쓰지 않고 지냈다. 계속 아파서 그랬던 건 아니다. 나는 에너지를 조금 되찾았고, 그리움과 미움을 많이 포기했다. 수업을 하고, 틈틈이 장편소설을 쓰고 좋은 책을 읽었다. 제철채소도 많이 먹었다.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미뤘던 단편소설을쓰기 시작했을 때 무척 신이 났다. 드디어 단편소설을 쓴다! 그래서인지 문득, 좀 길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랜만이니까. 그리고 또, 좀 못된 것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얄밉고 짜증나는 인간이 한 명 나와야겠어. 하지만소설을 다 쓰고 보니, 그런 인물이 한 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이 그러면 그렇지 싶어서 우습고 슬펐다. 거푸집으로 찍어낸듯한 이 비슷한 인간들. - P107

강화길 소설을 중층적으로 감싸는 폭력과 불안의 공기를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듯하다. 돋보기로 빛을 한 점으로 모으듯, 이완없이 수축해들어가는 신경증적 긴장감. 그 끝에 점 하나가 조용히 타들어갈 때 매캐한 내음과 함께 드러날 듯 증발하는 범인들.
강화길의 「음복」과 「가원」은 가부장제라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선율 속에서 미세하게 어긋난 음정들을 포착하는 작품이었다. 왜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그 어긋남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거나 생존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반면 남성들은 둔감한무지 속에서 해맑고 다정다감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 강화길은 사소한 일상에서 그 낙차의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섬뜩한 가정 스릴러를 완성했다. 「거푸집의 형태」에서는 이모와 조카라는 방계 혈통으로 얽힌 여성들 사이의 기묘하고 매혹 - P109

적인 애증이 으스스한 오르골의 선율처럼 흘러나온다. 가족 안에서조차 처치 곤란한 잔여물로 밀려난 존재들. 그 삶을 덮친 쓰라린 실패와 질병, 돌봄과 기만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마침내 비틀린 두 겹의 껍데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기묘하게 겹쳐져 빛을발하는 이 껍데기들. 자주 "미친 상황에 빠져 "돌아버린 상태"
로 살아온 이 여자들은 어쩌자고 이런 것을 만들어냈는가.
거세게 비가 내리는 날,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이모의 낡은 아파트를 찾는 여자와 그 아파트 앞에서 비에 홀딱 젖은 채 달려드는검은 고양이가 겹쳐지는 음울하고 불길한 장면은 곧장 고딕소설의 어두운 정조를 환기한다. 고딕 문학의 환상성은 ‘여성 고딕‘이라는 명칭이 따로 존재할 만큼 뚜렷한 젠더적 특질을 지닌다. 폐소공포를 느낄 정도로 고립된 삶을 견뎌야 했던 이들, 또 그 운명이 대물림됨을 끔찍하게 직감했을 존재들이 누구였을지 떠올려보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 P110

실패와 수치와 불안과 고통으로 빚어진 두 개의 단단한 거푸집 앞에서 음악취향 같은 건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돌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유약한 불순물로 남는다.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향해 "못생긴 게"라 중얼거리는 화자의 마지막 말은 자기혐오를 거쳐야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의 뒤늦고 뜨거운 고백이다. 이는상처를 입히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삶을 흡수하듯 징그럽게 이해하는 사랑으로 응고되어, 꿈틀대는 무형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모의 아파트로 향하던 길의 배경음악이었던 <More thanwords>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셜리 잭슨이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는 문구,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delight in what I fear"는 이 소설의 정동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소진되고 고립된 자들의 자기혐오와 구별되지 않는 사랑,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며 파열하는 사랑.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이 사랑을 끌어안으며 우리 소설이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정동의 미답지에 들어선다. 끔찍한 두려움과 희열에 떨면서.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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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영과의 면담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면담 일지를 작성하다보면 김춘영이 나를 방문객 자리에 위치시키는 건 당연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김춘영과 나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을 풀 땐 내가김춘영한테 어떻게 방문객일 수만 있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기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김춘영과 나는 일 년 전 구술자와 면담자로 처음 만났고 여전히 구술자와 면담자라는 구도 안에 있었다. ‘라포‘ 형성을 위해 사적으로 더 다가간다고 해서 그 구도가 벗겨지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특별한 순간들이 없지 않았다. 김춘영의 집에 앉아 김춘영의 말을 듣던 몇몇 날들엔 그의 생애 기억 속 한 지점으로 접속해 들어가는 듯한 깊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이 대화가 분명한 목적과 테마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김춘영도 알고 나도 알았다. - P10

특정한 일에 대해 말할 때, 김춘영은 사실의 나열이나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했다. 면담자가 유도하지 않아도 그랬다. 오랫동안 자신의 경험을 곱씹어온 사람 같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으로돌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사건을 겪고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처럼 말할 수 있는 건아니었다. 김춘영은 ‘귀한 자원을 가진 분‘이었다. - P13

김춘영의 자원을 내가 알아보았다는 걸 김춘영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면담 중간중간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구자인 나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반응을 살피곤 했는데, 그것은 어떤 수위로 어떤 이야기를 더 내보일지 타진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타진의기미가 느껴지면 나 또한 내가 가진 자원이 당신을 향해 있다는것을 은연중에 어필했다. 시골 노인이라도 이름을 알 수 있는 대학의 박사학위, 사명감 있는 연구 기관에서 착실하게 쌓아온 경력. 구술자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배운 여자‘라는자원이었다.
나는 이전 면담이 김춘영에게 아쉬움으로 남았을 거라고 느꼈다. 김춘영이 백과 했던 면담 내용은 오년 전 한 재단에서 발간한 탄광사회사 구술자료총서에 실려 있었다. 거기서 김춘영은 화운갱 주변의 생활상을 건조한 관찰자 톤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표현력과 표현욕이 있는 구술자와의 면담이라기엔 질문도 답도 전형적인 틀 안에서 맴돌았다. 어떤 요인 때문이든 보통은 구술자와 - P13

면담자 간의 상호작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나는 백과 다를 거라는 것, 당신과 나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홀러가지 않을 거라는 것. 나는 김춘영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믿어주길 바랐다. 실제로 김춘영과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해온 작업은 나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과 텀을 두고 면담에 집중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섣불리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호의와 호감을 놓지 않았다. 서로가 가진 자원을 필요한 만큼 끌어내고 내보이며 신뢰를 쌓아왔다.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은 그간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로 세울 것이다. 이것은 탄광사회사도 주민운동사도 노동생활사만도 아닌, 각 여성의 이름 석자를 전면에 내세운 생애사 작업이었다.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 주인공은 김춘영이었다. - P14

구술 흐름이 그 사건을 향해 가지 않는 건 다섯 면담 중 김춘영과 나의 작업뿐이었다. 안은 내게 말하곤 했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 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4월의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안과 그동안 해온 언쟁을 반복하며 내 속마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안의 말을 들었다.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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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끝냈다.

이번 토지읽기는 이미 아는 내용, 소설로 익숙한 듯 했으나 처음처럼 새롭게, 다시금 읽혔다.
처음엔 서희와 길상을 중심으로한 주인공 위주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았다면 두번째에는 ‘임이네‘, ‘강포수‘등의 초기 인물들과 질긴 생명력이, 이번에는 ‘송관수‘, ‘정석‘, ‘김강쇠‘, ‘소지감‘, ‘해도사‘, ‘임명희‘... 또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활동한 많은 이들과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더 많은 이들의 생애와 발걸음이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느낌이다.
관수가 남긴 편지는 오래 남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었던 토지는 솔출판사에서 찍은 1995년판 16권짜리다.

"혼자 있을 땐 그럼 어떻게 해요?"
해놓고 명희는 무의미한 자신의 물음 역시 선혜가 말하는 공염불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런 시대, 참담한 이 시대, 언어란 그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사람이야 있으나마나, 백두산 꼭대기에 홀로 있어도 매한가지, 누구 들어달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겠고, 그냥 그래. 그냥 그렇다니까. 너무나 오래가고 길어. 끝도 보이지 않게 길어. 피를 다 말린뒤에 끝날 건가 봐."
얘기가 끊어졌다.
칠월도 막바지, 해는 힘겹게 아주 힘겹게 중천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은 뭉쳤다가는 흩어지고,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지상의 형세를 비웃듯 유유히. 계절이 데리고 온 더위만은 아니었다. 전쟁의 그 숨막히고 뜨거우면서도 내일이 없는 허공과도 같은 시간이 몰고 온 더위가 한층 참담한 것 같았다. 소개를 독려하고 서두르는 서울의 풍경, 시민들의 소개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각종 시설물을 분산하고 있었으며 의용군 조직에 광분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개미집에서 미친 듯 알을 나르고 터전을 재정비하듯, 이런 차중에도 내노라! 했던 작가의 소개기(疏開記) 따위가 신문 구석지에 밀려서 실려 있곤 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서울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타일렀다는 둥, 옹색한 얘기, 그는 결코 조선 민족의 꽃도 희망도 아니었으며 이제는 총독부의 꼭두각시도 아니었다. 하수인이 가야 할 망각 지대, 언제일지는 - P375

모르지만 민족 반역자의 처단이 있을 때까지 망각 지대에 은신하여 일본의 명운에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칠월 초에는 본토결전부민대회(本土決戰府民大會)가 덕수궁 광장에서 있었고, 수천 대씩 날아와서 일본 본토를 벌집 쑤시듯, 미국 항공기의 활약은 말할것도 없지만 조선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일본 사군관구 (4軍管區)에 이천여 기의 B29를 포함한 미군 항공기가 날아와 폭격을 감행했는데 조선에서도 청진(淸津) 부산(釜山) 여수(麗水) 등지에 미군기가 출격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가엾은 일본은 목제(木製) 비행기를 만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 P376

주거니받거니, 결국 그 안은 없었던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장연학의 현실을 보는 시각은 명쾌했고 판단도 옳았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특히 강쇠는 서운해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늙음을 절감했고 뒷방 신세가 된 것같이, 무용지물인 것 같은 자기 자신을 느꼈던 것이다. 광주리며 체 같은것을 칡넝쿨에다 꿰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사방팔방 내 집 앞마당밟듯 두루 다니면서 일을 도모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역발산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던 장사 김강쇠, 죽은 김환의 얼굴이며 송관수 생각도 났고 화살같이 가버린 세월, 황혼의 길목에서 강쇠는 말할 수 없이 쓸쓸했던 것이다. - P403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 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ㅡ끝ㅡ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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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홀릭 2025-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대단하세요
저는 내년으로 미뤘어요
늘 내년이지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