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모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모는 큰이모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녀의 돈으로 공부해 대학까지 마쳤다. 그 언니가 평생 자신을 무시하고, 모멸감을 주고, 문병 한번제대로 온 적이 없었어도, 단번에 팔백사십만원을 내놓는다면, 그래, 받을 수 있다. 이모에게 필요한 돈이니까. 필요하다면, 그래, 받아야지. 그리고 큰이모는 말을 원래 그렇게 하니까. 가족들에게 베푸는 만큼 대접받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싶어하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청춘을 보상받고 싶어하니까. 그래. 그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까. 무슨 말을 하든 내버려둘수 있다. 어렵지 않다. 그러려니 하며 돈을 챙길 수 있다. 십년 넘게 자신을 돌본 작은언니에게 "누가 너한테 얘 도와주라고 했니? 네가 좋아서 한 거잖아. 네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기분에 취하는거, 그게 좋았던 거잖아. 덕분에 그간 둘이 나 욕하는 세월이 즐겁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걸 못 들은 척할 수 있다. 그때는 작은언니가 더 미웠을 테니까. 자기 돈을 훔친 파렴치한 사람에 불과했을 테니까. 때문에 큰언니가 "이제 진이도 빨리 시집보내. 신부가 나이 먹으면 드레스 입어봤자 별로 예쁘지도 않아" 그렇게까지 말해도 화내지 않을 수 있다. 그래. 그렇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P93
가슴 한가운데가 불에 활활 타는 것 같았다.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듯했다. 어느 날은 누군가 내 허벅지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콱콱 쑤셔박는 것 같았고, 또 어느 날은 내 머리를 벽에 쿵쿵 짓찧는 것 같았고, 또다른 날에는 등의 가죽을 생으로 쓱쓱 벗겨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상상 속에서도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실감나는 고통 속에서도 도와달라고소리치지 않았다. 내가 약간이라도 소리를 내면, 그래서 진짜로아프다고 외치면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모든 것들이 다무너질 것 같아서. 그러다 또 어느 날, 나는 은행에 가서 오백이십만원을 인출해왔다. 당장 이 정도 돈은 이모에게 무리 없이 줄 수 있었다. 다음달에 월급이 나오면, 백만원이든 이백만원이든 또 보내면 될 것이다. 팔백사십만원. 그래.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랬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올려둔 채 매일 밤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모에게연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신경쓸 일이아니라는 말을 또 들을 것 같아서? - P96
많이 아팠다. 일단 잠을 못 잤다. 뜬눈으로 이 주를 지새웠다. 살이 많이 빠졌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땅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었다. 모든 일과 원고를 미뤘다. 겨울부터 돌아오는 겨울까지. 그렇게 단편을 쓰지 않고 지냈다. 계속 아파서 그랬던 건 아니다. 나는 에너지를 조금 되찾았고, 그리움과 미움을 많이 포기했다. 수업을 하고, 틈틈이 장편소설을 쓰고 좋은 책을 읽었다. 제철채소도 많이 먹었다.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미뤘던 단편소설을쓰기 시작했을 때 무척 신이 났다. 드디어 단편소설을 쓴다! 그래서인지 문득, 좀 길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랜만이니까. 그리고 또, 좀 못된 것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얄밉고 짜증나는 인간이 한 명 나와야겠어. 하지만소설을 다 쓰고 보니, 그런 인물이 한 명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족이 그러면 그렇지 싶어서 우습고 슬펐다. 거푸집으로 찍어낸듯한 이 비슷한 인간들. - P107
강화길 소설을 중층적으로 감싸는 폭력과 불안의 공기를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듯하다. 돋보기로 빛을 한 점으로 모으듯, 이완없이 수축해들어가는 신경증적 긴장감. 그 끝에 점 하나가 조용히 타들어갈 때 매캐한 내음과 함께 드러날 듯 증발하는 범인들. 강화길의 「음복」과 「가원」은 가부장제라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선율 속에서 미세하게 어긋난 음정들을 포착하는 작품이었다. 왜 가족 안에서 여성들은 그 어긋남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거나 생존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반면 남성들은 둔감한무지 속에서 해맑고 다정다감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가. 강화길은 사소한 일상에서 그 낙차의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섬뜩한 가정 스릴러를 완성했다. 「거푸집의 형태」에서는 이모와 조카라는 방계 혈통으로 얽힌 여성들 사이의 기묘하고 매혹 - P109
적인 애증이 으스스한 오르골의 선율처럼 흘러나온다. 가족 안에서조차 처치 곤란한 잔여물로 밀려난 존재들. 그 삶을 덮친 쓰라린 실패와 질병, 돌봄과 기만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마침내 비틀린 두 겹의 껍데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기묘하게 겹쳐져 빛을발하는 이 껍데기들. 자주 "미친 상황에 빠져 "돌아버린 상태" 로 살아온 이 여자들은 어쩌자고 이런 것을 만들어냈는가. 거세게 비가 내리는 날,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이모의 낡은 아파트를 찾는 여자와 그 아파트 앞에서 비에 홀딱 젖은 채 달려드는검은 고양이가 겹쳐지는 음울하고 불길한 장면은 곧장 고딕소설의 어두운 정조를 환기한다. 고딕 문학의 환상성은 ‘여성 고딕‘이라는 명칭이 따로 존재할 만큼 뚜렷한 젠더적 특질을 지닌다. 폐소공포를 느낄 정도로 고립된 삶을 견뎌야 했던 이들, 또 그 운명이 대물림됨을 끔찍하게 직감했을 존재들이 누구였을지 떠올려보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 P110
실패와 수치와 불안과 고통으로 빚어진 두 개의 단단한 거푸집 앞에서 음악취향 같은 건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돌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유약한 불순물로 남는다.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향해 "못생긴 게"라 중얼거리는 화자의 마지막 말은 자기혐오를 거쳐야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의 뒤늦고 뜨거운 고백이다. 이는상처를 입히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삶을 흡수하듯 징그럽게 이해하는 사랑으로 응고되어, 꿈틀대는 무형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모의 아파트로 향하던 길의 배경음악이었던 <More thanwords>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셜리 잭슨이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는 문구,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delight in what I fear"는 이 소설의 정동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소진되고 고립된 자들의 자기혐오와 구별되지 않는 사랑,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며 파열하는 사랑.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이 사랑을 끌어안으며 우리 소설이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정동의 미답지에 들어선다. 끔찍한 두려움과 희열에 떨면서.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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