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를 끝냈다.

이번 토지읽기는 이미 아는 내용, 소설로 익숙한 듯 했으나 처음처럼 새롭게, 다시금 읽혔다.
처음엔 서희와 길상을 중심으로한 주인공 위주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았다면 두번째에는 ‘임이네‘, ‘강포수‘등의 초기 인물들과 질긴 생명력이, 이번에는 ‘송관수‘, ‘정석‘, ‘김강쇠‘, ‘소지감‘, ‘해도사‘, ‘임명희‘... 또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활동한 많은 이들과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더 많은 이들의 생애와 발걸음이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느낌이다.
관수가 남긴 편지는 오래 남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었던 토지는 솔출판사에서 찍은 1995년판 16권짜리다.

"혼자 있을 땐 그럼 어떻게 해요?"
해놓고 명희는 무의미한 자신의 물음 역시 선혜가 말하는 공염불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런 시대, 참담한 이 시대, 언어란 그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사람이야 있으나마나, 백두산 꼭대기에 홀로 있어도 매한가지, 누구 들어달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겠고, 그냥 그래. 그냥 그렇다니까. 너무나 오래가고 길어. 끝도 보이지 않게 길어. 피를 다 말린뒤에 끝날 건가 봐."
얘기가 끊어졌다.
칠월도 막바지, 해는 힘겹게 아주 힘겹게 중천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은 뭉쳤다가는 흩어지고,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지상의 형세를 비웃듯 유유히. 계절이 데리고 온 더위만은 아니었다. 전쟁의 그 숨막히고 뜨거우면서도 내일이 없는 허공과도 같은 시간이 몰고 온 더위가 한층 참담한 것 같았다. 소개를 독려하고 서두르는 서울의 풍경, 시민들의 소개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각종 시설물을 분산하고 있었으며 의용군 조직에 광분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개미집에서 미친 듯 알을 나르고 터전을 재정비하듯, 이런 차중에도 내노라! 했던 작가의 소개기(疏開記) 따위가 신문 구석지에 밀려서 실려 있곤 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서울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타일렀다는 둥, 옹색한 얘기, 그는 결코 조선 민족의 꽃도 희망도 아니었으며 이제는 총독부의 꼭두각시도 아니었다. 하수인이 가야 할 망각 지대, 언제일지는 - P375

모르지만 민족 반역자의 처단이 있을 때까지 망각 지대에 은신하여 일본의 명운에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칠월 초에는 본토결전부민대회(本土決戰府民大會)가 덕수궁 광장에서 있었고, 수천 대씩 날아와서 일본 본토를 벌집 쑤시듯, 미국 항공기의 활약은 말할것도 없지만 조선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일본 사군관구 (4軍管區)에 이천여 기의 B29를 포함한 미군 항공기가 날아와 폭격을 감행했는데 조선에서도 청진(淸津) 부산(釜山) 여수(麗水) 등지에 미군기가 출격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가엾은 일본은 목제(木製) 비행기를 만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 P376

주거니받거니, 결국 그 안은 없었던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장연학의 현실을 보는 시각은 명쾌했고 판단도 옳았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특히 강쇠는 서운해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늙음을 절감했고 뒷방 신세가 된 것같이, 무용지물인 것 같은 자기 자신을 느꼈던 것이다. 광주리며 체 같은것을 칡넝쿨에다 꿰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사방팔방 내 집 앞마당밟듯 두루 다니면서 일을 도모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역발산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던 장사 김강쇠, 죽은 김환의 얼굴이며 송관수 생각도 났고 화살같이 가버린 세월, 황혼의 길목에서 강쇠는 말할 수 없이 쓸쓸했던 것이다. - P403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 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ㅡ끝ㅡ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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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홀릭 2025-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대단하세요
저는 내년으로 미뤘어요
늘 내년이지만 ㅎㅎ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P12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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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18


날벌레떼가 잔 날갯짓을 비벼대던 하늘이다
날벌레들은 닳아서 모두 떨어졌고 지금은 
별빛들이 잉잉거리고 있다

강 물줄기가 환하다 내 발등도 밝다

어느 날은 눈자위 꺼지고 귓속 깜깜한 저녁에

나는 걸어가며 몇 번이나 더듬대고 내 발걸음보다 더디게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물줄기보다 더딘 발걸음으로 어디까지 오래 걸었던가 내 발걸음보다 더딘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얼마나 길게 귀 기울여서 들었던가

자정에는 한 별자리가 내려와 등에 얹혔고

나는 내내 걸어서 강 물줄기를 뒤따라간다 물에 떠 흘러가는 별빛 몇이 깜박이며 뒤돌아보며 걱정스레 - P100

두런거리는 여러 말들을 고작 한두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강 밑바닥에 별빛이 꽉 찼다 - P101

탐진강 19


읍에 가서, 예양리의, 가파르고 비좁고 이리저리굽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간다 길의 끝에는 강이다

모난 모퉁이에 부딪혀 나뒹굴고 굽은 굽이를 돌며 휘어지고 튀어나온 처맛날에 눈썰미가 잘리기도 하는 이 길을 누구의 한 生이라 이름 지어 부를 것인지, 염려한다

한때는 강을 끌어다가 내 가까이에 매어두었다 징검돌을 딛고 가며 물 위를 걷고 물길 저 너머로 조약돌을 팔매질하던, 그때는 강을 건너며 발을 적시지 않았다

지금은 강에 닿아 다만 강을 본다 먼 길을 흘러와 잠깐 닿은 강이 길을 내며 더 멀리 흘러가는 것 본다 강에 닿은 사람이 멈추지 못하고 걸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본다 - P102

발바닥 젖고 발목 잠기고 무릎 안에 고이고 가슴 가득 차오르고

강 건너에서 누구인가 오래전에 잊었던 내 이름을 부른다 강에 안개 짙다 - P103

백목련꽃


그걸 알아보라고 했다. 꽃이 피기는 필 것인지를, 꽃 피는 날은 날이 개이고 하늘이 훨씬 가까울 것인지를, 그런 하늘에서야 꼭 꽃이 피는지를,

장지에 눌린 창호지가 툭, 툭, 뚫리듯

머리 위 여기저기서 하늘이 뚫린다. 불쑥, 
불쑥, 꽃봉오리들이 목을 빼 들이민다. 가득하게 한 입씩 햇살을 베어 문다. 이를테면 지금 백목련꽃이 피었다. 하늘은 파랗고 저렇게 꽃이 희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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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안에


잘라낸 뒤엔 모체 가까운 곳에 두세요
고무나무의 삽수를 설명하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밝다

물을 너무 자주 갈아주어도 안 됩니다
가지치기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과정이에요

흠칫 놀라게 되는 말들이다
밝음을 신뢰하지만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난간에서 바닥으로
벽에서 창으로
주인은 나의 거처를 여러 번 옮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
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중이다

밤이 되면 독 안에 든 기분이 들 거야
그때까지 햇볕 이불을 충분히 덮어야 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우후죽순 밀어올리는 계절,
봄이라 했다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여름  - P130

마른잎을 전리품처럼 매달았다, 가을
생장점이 닫히는 계절, 겨울
독 안에서
독 안에서

깨버리면 그만일 독이더라도
연두를 밀어올리려는 발걸음

당신은 나의 가지를 잘라 간다
무성하다는 뜻이다 - P131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
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 P144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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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그는 다섯 개의 칼을 가졌다

나는 색이 곱고 결이 유순한 나무 도장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넨다

그는 먼저 구획을 나눈 뒤
칼을 골라 든다
이 자리에서 삼십 년을 했어요
요즘은 기계로 파는 데가 많지만 도장이라는 게 필시 칼맛이거든요
묻지 않은 말끝엔 잘 왔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는 잘 왔다는 말을 생일 축하인 양 곱씹으며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한쪽 벽면 가득 열쇠가 걸려 있고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침침해서
이름을 일으키려면 그의 이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안내삼아야 한다

그는 여러 번 칼을 바꿔 든다
곡선을 위한 칼과 직선을 위한 칼
도려내는 칼과 깎는 칼
시작하는 칼과 끝맺는 칼을 지나 - P110

서서히 떠오르는 이름을 보면서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겠군요
저 먼 지평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들을 열쇠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열쇠 이전의 열쇠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 열거나 잠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여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잠그는 방향이 더 아플까요

너무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 의자가 되어버린 적막에게
잠시 속내를 털어놓는 동안

도장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울퉁불퉁하고 기계로 판 것만큼 정교하지 않다

값을 치르고 미닫이문을 끼익 연다
등뒤에 다섯 개의 칼, 골몰하던 뒤통수를 남겨두고

문턱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본다 - P111

칼과 열쇠가 한통속인 이유를
도처에 문이 있는 세계에
나를 외로이 남겨둔 이유를 묻고 싶었다 - P112

물색


그 집에선 낙엽 냄새가 났다

순간 위령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신
단지 끝에 공원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던데 한번 가볼까. 말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지는 않고

우리는 살 집을 찾으려는 거잖아
오전 열한시인데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어

살아 있는 집은 따로 있다는 듯이
말했다


*

그날은 도망치듯 낮잠을 잤다

수박 속살을 뭉개며 노는 아이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다홍빛 물

창을 열고 초를 켠다 - P116

집은 가진 것을 내보이는데
그럼 나는 무얼 내보이는 사람인가 
생각하면서


*

집을 본다. 이불을 깨지 않는 집
집을 본다. 파충류를 기르는 집

서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어요 암막 커튼이 필요 없거든요
벽면 가득 곰팡이가 피었는데 두 사람이 살기엔 이만한 집이 없다고


*

경사로를 따라 굴러간 수박은
너무 커서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
결국 쪼개져 붉음을 들키고 만다


*

모든 절단면은 칼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 P117

집은 듣고 있었을까
유리컵에 실금이 가는 소리

모르고 물을 따라 마셨는데 목이 따끔하다
잔가시가 가득한 날들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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