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영과의 면담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면담 일지를 작성하다보면 김춘영이 나를 방문객 자리에 위치시키는 건 당연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김춘영과 나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을 풀 땐 내가김춘영한테 어떻게 방문객일 수만 있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것 또한 사실이었다. 거기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는 않았다. 김춘영과 나는 일 년 전 구술자와 면담자로 처음 만났고 여전히 구술자와 면담자라는 구도 안에 있었다. ‘라포‘ 형성을 위해 사적으로 더 다가간다고 해서 그 구도가 벗겨지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특별한 순간들이 없지 않았다. 김춘영의 집에 앉아 김춘영의 말을 듣던 몇몇 날들엔 그의 생애 기억 속 한 지점으로 접속해 들어가는 듯한 깊은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이 대화가 분명한 목적과 테마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김춘영도 알고 나도 알았다. - P10

특정한 일에 대해 말할 때, 김춘영은 사실의 나열이나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했다. 면담자가 유도하지 않아도 그랬다. 오랫동안 자신의 경험을 곱씹어온 사람 같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대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엇을 나중으로돌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사건을 겪고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처럼 말할 수 있는 건아니었다. 김춘영은 ‘귀한 자원을 가진 분‘이었다. - P13

김춘영의 자원을 내가 알아보았다는 걸 김춘영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면담 중간중간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구자인 나를 만족시키고 있는지 반응을 살피곤 했는데, 그것은 어떤 수위로 어떤 이야기를 더 내보일지 타진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타진의기미가 느껴지면 나 또한 내가 가진 자원이 당신을 향해 있다는것을 은연중에 어필했다. 시골 노인이라도 이름을 알 수 있는 대학의 박사학위, 사명감 있는 연구 기관에서 착실하게 쌓아온 경력. 구술자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배운 여자‘라는자원이었다.
나는 이전 면담이 김춘영에게 아쉬움으로 남았을 거라고 느꼈다. 김춘영이 백과 했던 면담 내용은 오년 전 한 재단에서 발간한 탄광사회사 구술자료총서에 실려 있었다. 거기서 김춘영은 화운갱 주변의 생활상을 건조한 관찰자 톤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표현력과 표현욕이 있는 구술자와의 면담이라기엔 질문도 답도 전형적인 틀 안에서 맴돌았다. 어떤 요인 때문이든 보통은 구술자와 - P13

면담자 간의 상호작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나는 백과 다를 거라는 것, 당신과 나의 작업은 그런 식으로 홀러가지 않을 거라는 것. 나는 김춘영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믿어주길 바랐다. 실제로 김춘영과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해온 작업은 나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과 텀을 두고 면담에 집중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았고 섣불리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호의와 호감을 놓지 않았다. 서로가 가진 자원을 필요한 만큼 끌어내고 내보이며 신뢰를 쌓아왔다.
‘지역과 여성의 기억‘ 아카이브 연구팀은 그간 광부의 가족으로만 소환되던 탄광촌 여성을 주체로 세울 것이다. 이것은 탄광사회사도 주민운동사도 노동생활사만도 아닌, 각 여성의 이름 석자를 전면에 내세운 생애사 작업이었다. 내가 완성할 텍스트의 주인공은 김춘영이었다. - P14

구술 흐름이 그 사건을 향해 가지 않는 건 다섯 면담 중 김춘영과 나의 작업뿐이었다. 안은 내게 말하곤 했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하지만 나는 구술자들의 고유한 생애를 사건으로 환원하려는 안의 방식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김춘영의 구술이 사건의 증언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이 작업의 주체는 사건이 아니었다. 김춘영이었다. 나는 오직 김춘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김춘영이 말하는 김춘영의 기억을 들음으로써 김춘영이라는 대체 불가능한한 개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갈 것이다. 다른 연구자가 아니라 나여서 가능한, 오직 나와 김춘영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김춘영과 나의 공동작업이기 때문에 포착 가능한 어떤 진실에 접근해갈 것이다.
4월의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김춘영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안과 그동안 해온 언쟁을 반복하며 내 속마음을 쏟아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안의 말을 들었다.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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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끝냈다.

이번 토지읽기는 이미 아는 내용, 소설로 익숙한 듯 했으나 처음처럼 새롭게, 다시금 읽혔다.
처음엔 서희와 길상을 중심으로한 주인공 위주의 인물들이 기억에 남았다면 두번째에는 ‘임이네‘, ‘강포수‘등의 초기 인물들과 질긴 생명력이, 이번에는 ‘송관수‘, ‘정석‘, ‘김강쇠‘, ‘소지감‘, ‘해도사‘, ‘임명희‘... 또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활동한 많은 이들과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더 많은 이들의 생애와 발걸음이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느낌이다.
관수가 남긴 편지는 오래 남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었던 토지는 솔출판사에서 찍은 1995년판 16권짜리다.

"혼자 있을 땐 그럼 어떻게 해요?"
해놓고 명희는 무의미한 자신의 물음 역시 선혜가 말하는 공염불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런 시대, 참담한 이 시대, 언어란 그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사람이야 있으나마나, 백두산 꼭대기에 홀로 있어도 매한가지, 누구 들어달라고 하는 얘기도 아니겠고, 그냥 그래. 그냥 그렇다니까. 너무나 오래가고 길어. 끝도 보이지 않게 길어. 피를 다 말린뒤에 끝날 건가 봐."
얘기가 끊어졌다.
칠월도 막바지, 해는 힘겹게 아주 힘겹게 중천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은 뭉쳤다가는 흩어지고,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지상의 형세를 비웃듯 유유히. 계절이 데리고 온 더위만은 아니었다. 전쟁의 그 숨막히고 뜨거우면서도 내일이 없는 허공과도 같은 시간이 몰고 온 더위가 한층 참담한 것 같았다. 소개를 독려하고 서두르는 서울의 풍경, 시민들의 소개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각종 시설물을 분산하고 있었으며 의용군 조직에 광분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개미집에서 미친 듯 알을 나르고 터전을 재정비하듯, 이런 차중에도 내노라! 했던 작가의 소개기(疏開記) 따위가 신문 구석지에 밀려서 실려 있곤 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서울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타일렀다는 둥, 옹색한 얘기, 그는 결코 조선 민족의 꽃도 희망도 아니었으며 이제는 총독부의 꼭두각시도 아니었다. 하수인이 가야 할 망각 지대, 언제일지는 - P375

모르지만 민족 반역자의 처단이 있을 때까지 망각 지대에 은신하여 일본의 명운에 한 가닥 희망을 걸면서. 칠월 초에는 본토결전부민대회(本土決戰府民大會)가 덕수궁 광장에서 있었고, 수천 대씩 날아와서 일본 본토를 벌집 쑤시듯, 미국 항공기의 활약은 말할것도 없지만 조선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에 일본 사군관구 (4軍管區)에 이천여 기의 B29를 포함한 미군 항공기가 날아와 폭격을 감행했는데 조선에서도 청진(淸津) 부산(釜山) 여수(麗水) 등지에 미군기가 출격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가엾은 일본은 목제(木製) 비행기를 만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 P376

주거니받거니, 결국 그 안은 없었던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장연학의 현실을 보는 시각은 명쾌했고 판단도 옳았다.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 중 특히 강쇠는 서운해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늙음을 절감했고 뒷방 신세가 된 것같이, 무용지물인 것 같은 자기 자신을 느꼈던 것이다. 광주리며 체 같은것을 칡넝쿨에다 꿰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사방팔방 내 집 앞마당밟듯 두루 다니면서 일을 도모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역발산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던 장사 김강쇠, 죽은 김환의 얼굴이며 송관수 생각도 났고 화살같이 가버린 세월, 황혼의 길목에서 강쇠는 말할 수 없이 쓸쓸했던 것이다. - P403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뚝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기는 어디다 벗어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 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ㅡ끝ㅡ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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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홀릭 2025-10-30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대단하세요
저는 내년으로 미뤘어요
늘 내년이지만 ㅎㅎ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P12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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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18


날벌레떼가 잔 날갯짓을 비벼대던 하늘이다
날벌레들은 닳아서 모두 떨어졌고 지금은 
별빛들이 잉잉거리고 있다

강 물줄기가 환하다 내 발등도 밝다

어느 날은 눈자위 꺼지고 귓속 깜깜한 저녁에

나는 걸어가며 몇 번이나 더듬대고 내 발걸음보다 더디게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물줄기보다 더딘 발걸음으로 어디까지 오래 걸었던가 내 발걸음보다 더딘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얼마나 길게 귀 기울여서 들었던가

자정에는 한 별자리가 내려와 등에 얹혔고

나는 내내 걸어서 강 물줄기를 뒤따라간다 물에 떠 흘러가는 별빛 몇이 깜박이며 뒤돌아보며 걱정스레 - P100

두런거리는 여러 말들을 고작 한두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

강 밑바닥에 별빛이 꽉 찼다 - P101

탐진강 19


읍에 가서, 예양리의, 가파르고 비좁고 이리저리굽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간다 길의 끝에는 강이다

모난 모퉁이에 부딪혀 나뒹굴고 굽은 굽이를 돌며 휘어지고 튀어나온 처맛날에 눈썰미가 잘리기도 하는 이 길을 누구의 한 生이라 이름 지어 부를 것인지, 염려한다

한때는 강을 끌어다가 내 가까이에 매어두었다 징검돌을 딛고 가며 물 위를 걷고 물길 저 너머로 조약돌을 팔매질하던, 그때는 강을 건너며 발을 적시지 않았다

지금은 강에 닿아 다만 강을 본다 먼 길을 흘러와 잠깐 닿은 강이 길을 내며 더 멀리 흘러가는 것 본다 강에 닿은 사람이 멈추지 못하고 걸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본다 - P102

발바닥 젖고 발목 잠기고 무릎 안에 고이고 가슴 가득 차오르고

강 건너에서 누구인가 오래전에 잊었던 내 이름을 부른다 강에 안개 짙다 - P103

백목련꽃


그걸 알아보라고 했다. 꽃이 피기는 필 것인지를, 꽃 피는 날은 날이 개이고 하늘이 훨씬 가까울 것인지를, 그런 하늘에서야 꼭 꽃이 피는지를,

장지에 눌린 창호지가 툭, 툭, 뚫리듯

머리 위 여기저기서 하늘이 뚫린다. 불쑥, 
불쑥, 꽃봉오리들이 목을 빼 들이민다. 가득하게 한 입씩 햇살을 베어 문다. 이를테면 지금 백목련꽃이 피었다. 하늘은 파랗고 저렇게 꽃이 희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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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안에


잘라낸 뒤엔 모체 가까운 곳에 두세요
고무나무의 삽수를 설명하는 전문가의 목소리가 밝다

물을 너무 자주 갈아주어도 안 됩니다
가지치기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는 과정이에요

흠칫 놀라게 되는 말들이다
밝음을 신뢰하지만 밝기만 한 사람은 무섭다

난간에서 바닥으로
벽에서 창으로
주인은 나의 거처를 여러 번 옮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곁
홀로서기 좋은 위치를 궁리중이다

밤이 되면 독 안에 든 기분이 들 거야
그때까지 햇볕 이불을 충분히 덮어야 해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우후죽순 밀어올리는 계절,
봄이라 했다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여름  - P130

마른잎을 전리품처럼 매달았다, 가을
생장점이 닫히는 계절, 겨울
독 안에서
독 안에서

깨버리면 그만일 독이더라도
연두를 밀어올리려는 발걸음

당신은 나의 가지를 잘라 간다
무성하다는 뜻이다 - P131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
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 P144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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