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2월이 계속되었다. 단조롭고 하얗고 추운 날들이 숱하게 지나갔다. 하늘은 종종 타운 변두리에 펼쳐진 지긋지긋한 설원처럼 하얀색이었고, 온 세상은 그렇게 끝없이 하얗게 뻗어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얼어붙은 거무스름한 나무들과 낡아서 지붐이 내려앉고 있는 붉은 헛간만이 그 풍경을 깨뜨리고 있었다.
눈은 갑자기 녹았다. 찬란한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은눈 녹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나무에 튕겨 흩어졌다. 세상은 메인스트리트의 보도에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와 눈이 녹으면서 길가에 생긴 개울로 생기가 넘쳤다.
"오늘 같은 날에 불쌍한 영혼은 자살이라도 하겠는걸." 이저벨은 칸막이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확신에 차 말을 내뱉고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잔 받침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토요일 오후 그들은 다리가 끝나는 곳 옆에 있는 리오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비쳐들어온 햇빛은 푸른색 리놀륨 탁자 위에서 한 번꺾여 이저벨이 잡은 금속 크리머에 닿았다가 튕겨나왔다.
"통계치에 따르면 그래." 이저벨이 커피에 우유를 따르려고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살은 대부분 한파가 꺾인 - P101

직후에 일어난다. 첫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날."
에이미는 도넛을 하나 더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안 된다고 할까봐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천천히 씹었다.
"예전에 알던 어떤 남자는, 엄마가 어릴 때 말이야." 이저벨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과묵한 남자였어. 아내는 선생님이었고, 어느 날 아내가 집에 돌아왔더니 남편이 복도에 죽어 있었대. 스스로 총을 쏴서. 불쌍한 영혼.."
에이미는 도넛을 먹다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정말 슬픈 일이지."
"왜 그랬대요?" - P102

낮이 길어졌다. 날도 더 따뜻해졌다. 눈은 더디더디 녹아 계단이나 보도, 도로 가장자리에서 질퍽거렸다. 에이미가 로버트슨선생과 대화를 나눈 날에는, 집으로 걸어 돌아갈 때 이제 엄마가 오기 전에 돌아오려고 학교에서 여유 있게 나섰지만ㅡ낮의따스함은 사라져 있었다. 아직 우윳빛을 머금은 하늘에서는 태양이 빛을 뿜는 하얀 웨이퍼처럼 빛나고 있었지만, 코트 지퍼를연 채로 가슴에 책을 끌어안고 걸어가면서 그녀는 드러난 목과손과 손목에 축축하고 싸늘한 공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라킨데일 들판 위로 펼쳐진 늦은 오후의 하늘, 흰색 비탈 위로 사라지는 돌담, 눈이 녹으면서 거뭇해지는 나무,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봄을 약속하는 신호처럼 보였다. 심지어 저멀리 하늘에서 - P144

조그맣게 무리 지어 나는 새들도 더없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날갯짓을 하며 뭔가를 약속하고 있었다.
에이미가 보기에는 천장도 더 올라간 것 같고 하늘도 더 높아보여서 이따금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으면 팔을 들어 공중에서 휘젓기도 했다. 로버트슨 선생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장난기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면 그녀의 가슴속에 커다란 기쁨이솟았다. 그에게 말하려 했지만 잊어버린 온갖 것들이 뒤엉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내면에는 어둡고꿈틀거리는 것이 가슴속 깊숙이 들어앉은 듯한 작은 슬픔의 조각들이 있었다. 이따금 혼자 고가도로를 걷다가 뭔가를 잃은 듯한상실감이 들면, 그녀는 어쩔 줄 몰라 걸음을 멈추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느낌이 엄마에 대한 생각과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듯했다. 그러면 에이미는 빈집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조바심을 내며 서둘러 집으로돌아갔다. 샤워기 꼭지에는 스타킹이 걸려 있었고 엄마의 서랍장위에는 베이비파우더가 놓여 있었다. 자갈 깔린 진입로로 엄마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처럼 이런 것들은 에이미를안심시켰다. 그러면 괜찮았다. 엄마가 집에 있다는 말이니까. - P145

서점에 난생처음 와본 정도는 아니지만, 맙소사. 책이 정말 많은 것 같았다. 그녀는 제목들을 읽으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자그마한 보급판으로 나와 있는지 몰랐다. 한 권을 집어 보니 책의 두께가 얇고 표지 그림이 아름답고 글씨체가 장식적이라 굉장히 친근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좋아졌다. 『햄릿』.
『햄릿』 이저벨은 카펫 위로 걸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햄릿』에 대해서는 당연히 들어보았다. 어머니와 미쳐버린 여자친구가 등장했다. 어쩌면 그녀가 뭔가 다른 작품을 착각한 건지도몰랐다. 그리스 작품이던가. 계산대 앞에 서서 그녀는 지금 자기가 떠안으려고 하는 것의 어마어마함에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턱에 듬성듬성 금발 수염이 난 젊은 점원이 계산대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심드렁하게 책값을 입력하자 그녀는 기뻤다. 겉보기에는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의미였다. 알맞은 배역을 맡은 것처럼 보일 거야. (그녀는 자기가 방금 소소한 농담을 한 것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구입한 책을 손가방에 넣고 바람 부는 거리를 가로질러 차로 걸어갔고, 다리를 건너 공장으로 돌아갔다. - P150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고, 이저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면서녹아버리고 싶은 욕망,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그녀도 당연히 경험했다. 이슬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생각하면 그건 아름다운 표현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이유도 결국 그거였다. 그는 천재였고, 평범한 우리는 절대 생각하지못할 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 모든 것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자세를 더 꼿꼿이 했다. "영원한 존재가 자기 학살을 금하는 섭리를 마련하지만 않았다면! 오, 신이시여! 오, 신이시여!"
그녀는 이 부분을 몇 번 더 읽었다. "영원한 존재"가 대문자로되어 있어서 그녀는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신을 일컬은 거라고추측했고, 자기 학살에 관련된 부분은 자살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햄릿은 자살하고 싶었지만 신의 섭리가 그것을 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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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근사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전적으로 감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아이라고 여기지 않은 지 제법 되었고, 선생이 자기들을 얕잡아보는 그 순간 그들의 마음에 이 단어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게 아닌가 생각했다.
"너희는 인생의 어떤 시점에 이르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하는 시점에."
에이미는 이 남자가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염과 머리를 길게 기른 것을 보면 불쑥 화제를 돌리면서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주장할지도 몰랐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빈 의자를 옆으로 치웠다. 애초에 자연이 그를 키 크고 체격 좋은 남자로 만들려고 의도했던 것처럼 그의 손은 큼지막했지만, 의자를 옮기는 손의 움직임에는 더없이 부드러운 느낌이 감돌았다.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그뿐이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릴 수있게." - P51

로버트슨 선생이 주먹으로 칠판을 탕쳤다. "이 아름다움을 모르겠나?" 그가 뒷줄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앨런 스튜어트에게 물었다. "장담하건대, 너희가 조금이라도 섬세하다면, 이걸 보고울고 싶어질 거다."
몇 명이 키득거렸지만 그건 실수였다. 로버트슨 선생은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다. 여기 세 개의 선이 있다. 세 개의 단순한 선이지." 그러고는 분필로그 세 개의 선을 따라갔다. "이 선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봐." 그가 갑자기 잠잠해지자 키득거리던 학생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칠판에 그어진 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이미에게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읽은 한 시구였다. 유클리드만이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았네.
로버트슨 선생은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에이미에게 잠깐 시선을 멈추었다. "할말이 있나?" 그가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지쳤는지 어투가 딱딱했다. 에이미는 눈을 내리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 그렇다면, " 그가 한숨을 쉬었다.
"수업은 이만." - P62

이저벨이 나오다가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니 그가 엄마의 이름을 부른 듯했다. 에이미가 다시 고개를 들어 흘끗 보는데 엄마의 하얀 얼굴에 순종과 희망의 표정이 어리다가 사라졌다. 에이미의 가슴속에 구멍이 뚫렸다. 방금 본 장면은 끔찍했다. 엄마의 적나라한 얼굴. 그녀는 엄마를 사랑했다. 그들을 연결하는 검은 선을 타고 맹렬한 사랑의 공이 빛을 번쩍이며 엄마에게 날아갔지만, 엄마는 이제 자리로 돌아가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있었다. 그 순간 에이미는 희한하게 생긴 엄마의 기다란 목과 거기들러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끔찍이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이 싫은 느낌은 오히려 애달픈 사랑을 더욱 키우는 것 같았고검은 선은 그 무게로 바르르 떨렸다. - P83

로버트슨 선생은 에이미에게 자부심에 대해, 품위에 대해, 그리고 예의에 대해 가르쳤다. 정말로, 정말로 그랬다. 어느 날 (2월이었고, 햇빛도 바뀌어 희망을 암시하는 노란색을 담뿍 담고있었다) 그가 책상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옷이 예쁘구나."
에이미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얼굴 옆으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서 처음에는 그가 말을 걸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에이미." 그가 말했다. "옷이 예쁘구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예뻐" 그가 그녀 쪽으로 걸어왔고, 고개를 주억거리며정말 그렇다는 뜻으로 생강 색깔의 눈썹을 치켰다.
"만들어 입은 거래요." 대화에 끼고 싶은지 엘시 백스터가 거들었다. "에이미가 전부 혼자 만들었대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가정 시간 숙제였으니까. 에이미는 이저벨과 함께 포목점에 갔고, 같이 심플리시티 견본책을 뒤지다가 텐트 드레스에 어울리는 무늬를 찾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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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Elizabeth Strout

1956년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메인 주와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베이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일 년 동안 바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그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소설을 썼지만 원고는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작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그녀는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잠시 법률회사에서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와 글쓰기에 매진한다.
문학잡지 등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던 스트라우트는 1998년 첫장편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동시에 인정받는다. 이 작품은 오렌지상, 펜/포크너 상 등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트 세덴바울상‘과 ‘시카고 트리뷴 하트랜드 상‘을 수상했다. 2008년 발표한 세번째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로 언론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HBO에서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이후 버지스 형제」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리고 「올리브 키터리지 의후속작인 ‘다시, 올리브」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1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후속작인 「오, 윌리엄!」을 발표했다. ‘루시 바턴‘을 다시금 화자로 삼아 사랑과 상실, 기억과 트라우마, 가족의 비밀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한때 루시의 남편이었고 이제는 오랜 친구인 윌리엄과 루시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관계를 특유의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사려 깊은 언어로 그려낸다.

로버트슨 선생이 타운을 떠난 그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강물은 한동안 죽은 듯 보였다. 강은 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며 죽은 뱀처럼 납작하게 드러누워 있었고, 그 언저리에는 더러운 거품이 싯누렇게 부글거렸다.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타지 사람들은 메슥거리는 유황 냄새에 차창을 끝까지 올려 닫으며, 강물과 공장에서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사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셜리폴스 사람들은 이미 그런 것에 익숙했고, 이렇게 지독한 무더위에도 아침에 눈을 떴을때에만 그 냄새를 맡았다. 아니, 사실 그 냄새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그 여름, 사람들은 오히려 하늘에서 파란 빛깔이 보이지 않 - P11

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타운 전체가 지저분한 거즈로 덮인듯, 하늘은 밝은 햇빛이라면 스며들지 못하게 아예 몰아내버리고, 그게 뭐가 됐든 사물에 색깔을 부여하는 그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해버려, 타운에는 희미하고 느른한 느낌만 감돌았다. 사람들이 마음을 쓴 것은 이런 것이었고,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다른 걱정거리들도 있었다. 강의 상류로 올라가면 경작이 시원찮았다. 줄기에 달린 덩굴제비콩은 잘고 쪼글쪼글했고, 홍당무는 아이의 손가락 크기만큼 자란 뒤 더는 자라지 않았다. 듣기로는 주 북부에 UFO 두 대가 나타났다고 했다. 정부에서 조사단까지 파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 P12

공장 사무실에서는 여자들이 송장을 분류하거나 서류를 정리하거나 주먹으로 탕탕 쳐가며 봉투에 우표를 붙이면서 하루를보냈는데,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도 꺼림칙한 말들이 오갔다. 어떤 여자들은 이러다 종말이 올 것 같다고 했고, 그 정도까지 극단적이지 않은 이들도 인간을 우주에 보내는 것은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다. 인간이 감히 달에 올라가 걸어다니다니 그건 안 될말이다. 정도의 말은 주고받았다. 하지만 더위는 무자비했고 창문에서 달달거리는 선풍기들은 영 신통찮아서, 결국 여자들은활기를 잃고 큰 나무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살짝 벌린 채 목덜미를 덮은 머리칼을 들어올렸다. 시간이 더 지나자 대화는 "이게 말이 돼?" 정도가 전부였다. - P12

상사인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들을 일찍 퇴근시킨 날도 한 번있었지만, 더 무더운 날이 이어지자 일찍 가도 좋다는 말은 더이상 없었다. 그러니 그런 일이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만히앉아서 버틸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버텼다. 사무실은 후끈후끈했다. 천장이 높고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너른 공간이었다. 책상은 두 개씩 나란히 붙이고 각각 앞 책상과 마주보게 하여 사무실 끝까지 쭉 늘어놓았다. 금속 캐비닛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한 캐비닛 위에는 필로덴드론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점토로 만든 화분처럼 줄기가 똘똘 말린 넝쿨 화분이었지만 길게 늘어져 바닥에 닿은 줄기도 있었다. 사무실에초록색이라고는 그것 하나였다. 창가에 놓은 베고니아 화분 몇개와 얼룩자주달개비는 죄다 갈색으로 시들어 있었다. 이따금선풍기가 뜨거운 바람을 토하면 죽은 잎들이 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 P13

이렇게 나른한 장면 속에 한 여자가 다른 여자들과 좀 떨어져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자리가 나머지 여자들의 자리와 떨어져 있었다. 이름은 이저벨 굿로, 에이버리 클라크의 비서여서 그녀의 책상은 누구의 책상과도 마주하지 않았다. 그 대신유리로 가로막힌 에이버리 클라크의 사무실을 향해 놓여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판자와 커다란 유리를 특이하게 잇대어 전체공간에서 분리한 것으로(표면적으로는 여자들이 제대로 일하는 - P13

지 감시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지만 그는 좀처럼 책상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통 ‘어항‘이라고 불렸다. 비서라는 사실 때문에 이저벨 굿로가 다른 여자들과 다른 지위를 얻긴 했지만 어했거나 그녀는 달랐다. 예컨대 옷차림도 흠잡을 데 없어서 이렇게 더운데도 팬티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언뜻 예뻐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예쁘다고 하기는 그렇고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숱이 적은 진갈색 머리도 둥글게 말아올리거나 틀어올려서누가 보더라도 평범했다. 이런 머리 모양 때문에 고리타분한 선생 같은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실제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고, 짙은 색의 작은 눈동자는 늘 놀란 눈빛이었다. - P14

어디를 뜯어봐도 에이미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 엄마의 머리가 칙칙하고 숱이 적다면 에이미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금발이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귀밑 길이로 들쑥날쑥 잘랐을 때도 눈에 띄게 건강하고 튼튼해 보였다. 게다가 에이미는 키가 컸다. 손은 큼직하고 발은 길쭉했다. 눈은 엄마보다 컸지만 이따금 엄마처럼 겁먹은 빛이 어렸고, 이런 놀란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면 상대는 불편하게 느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에이미는 수줍음을 많이 타서 누구를 빤히 쳐다보는 일은 드물었다. 오히려 흘끔 보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아무튼 예전에는 거울만 보이면 그 앞에 가서 자기 모습을 한참 뜯어보았지만, 사실에이미는 자신의 인상이 어떤지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여름에 에이미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다녔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엄마도 피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사무실에서 같이 일을 해야 했으니까. 이번 여름에 거기서일하게 된 것은 순전히 몇 달 전 엄마와 에이버리 클라크가 멋대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에이미는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듣긴했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일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에이미가 맡은 일은 책상에 수북이 쌓인 오렌지색 송장의 맨 끝세로줄에 있는 숫자들을 계산기로 더하는 것이었다. 딱 한 가지좋은 점은 이따금 생각이 없어진다는 점이었다. - P15

물론 진짜 문제는 엄마와 온종일 붙어 지내는 것이었다. 에이미는 자신이 엄마와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선은 고작 연필로 그은 정도의 굵기였지만 늘 거기 존재했다. 이를테면 둘 중 하나가 사무실을 나서서 화장실이나 현관 식수대에 가더라도 검은 선은 끄떡없었다. 그 선은 벽을 뚫고 그들을연결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나마 책상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되었다.
에이미의 자리는 한쪽 구석, 뚱뚱이 베브와 마주보는 책상이었다. 원래 도티 브라운의 자리였지만 그 여름에 도티 브라운은 자궁절제수술을 받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침마다 에이미는뚱뚱이 베브가 1파인트짜리 오렌지주스 통에 질경이씨 섬유소 적정량을 넣고 세게 흔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넌 좋겠다." 뚱뚱이 베브가 말했다. "젊고 건강한데 뭐가 부러울까. 똥눌 걱정이 뭔지도 모를 거야." 에이미는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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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좋아하는 시인 K를 만나러 간 연희동에서 베를린에서 온 B를만났을 때 나는 베를린에 가게 될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았다. 잎담배를말아 피우던 B는 순수해 보였지만 퇴폐적인 데가 있었고, 명랑하게 우울했고, 자신의 근원에 대한 냉소와 함께 가난한 자신에 대한 자부가 있었고, 세상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열정과 그래서 또 뭐하겠느냐는 허무가 한데 있었다. 나는 B가 내 쌍둥이로 보였다.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식성도, 체취도,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은 완전한 이란성 쌍둥이,
나는 종종 B와 베를린을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그 둘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베를린은 내게 환상의 도시가 되었다. 성가신 환상이었다. 왜냐하면 베를린에 가기 전까지 그 환상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극적이지만 집요하게 베를린을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가 자기 집인 것 같은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내집을 떠나기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그 예감이 매우 버거운 것이었다. - P231

2016년 2월, 삼 개월의 베를린 체류가 결정되었다. 2016년 6월에는 이책을 계약했고, (계약서에 명시된 원고 인도 시기이도 한) 2016년 10월에쓰기 시작해, 2017년 9월에 끝냈다.(내내 이 책만을 쓰고 있던 건 아니지만.) 그리고 2018년 2월인 오늘 에필로그를 쓰고 있다.
베를린에는 2016년 7월부터 9월까지 90일 가량을 머물렀다. 나로서는유래 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그래서인지 집에 돌아오면 어떤 문장도 쓸수 없었다. 한국으로 송고해야 하는 원고를 몇 편 쓰긴 했지만 뭔가 자발성을 갖고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런던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베를린에서 서울로 돌아오기 전 런던에서 열흘가량 머물 일이 생겼다.) 글을 쓸수 없던 이유를 말이다. 길거리에서 펄펄 날뛰고 있는 글자를 해독하지못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에서 간판들, 지하철역의 이름들, 거리의 이름들, 사람들 등뒤에 쓰인 글자들을 읽는데... 더듬더듬 읽는데.... 행복했다. ‘아, 나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었지!‘하는 안도감이 밀려왔고, 마음이 이상해졌다. - P232

참 이상한 일이었다. 베를린에서 나는 내내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접속해 기사를 서칭했고, 한국어로 메일을 주고받았고, 활자중독증이삼십 년 만에 재발해 베를린에서 구할 수 있는 한국어 텍스트(주로 소설)는 모조리 읽었고, 그것도 모자라 전자책 단말기에 담아간 고전들을 읽었는데도,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질서를 갖춘 언어가 아닌 이상한 언어들, 구어에 가까운 날것의 언어들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자극해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 나라‘를 영원히 떠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는 것도. - P232

런던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은 2016년 10월 초. 나는 그해 말까지도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도자도 졸렸고 그래서였을 가능성이 높지만늘 멍한 상태였다. 이 책은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쉽게 써지지 않았다. 써야 할 것은 너무 많은데, 정리는 되지 않았고, 급기야는 챕터가 40개가 넘어가기도 했었다. 두 개의 챕터를 하나의 챕터로합치거나 과감히 없애는 일을 했고, 그래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또 쓰기 어려웠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삼개월을 살아보고 감히 베를린에대해 뭐라뭐라 떠들고 있는 나에 대한 자기검열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 P233

언제나 그렇듯 가장 쓰고 싶었던 테마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다. 이를테면, 베를린의 헬무트 뉴튼, 비오 열풍과 케피르, 오스탈지(구동독적인것에 대한 향수를 이르는 말), 베를린의 부유한 유태인들, 유태인이 끌려간자리의 표식인 길거리의 황금빛 금속, 유태인 카페의 유태 음식, 베를린의 고용지원센터, 텐트 피플, 텐트 피플을 위한 거리의 체스판, 한밤의폐허 관광자들, 구동독 출신 남자, 드레스덴에서 만난 네오나치, 와타나베와 갔던 노이쾰른 음악회, 베를린의 북한 대사관, 베를린 초밥집에서만난 북한 외교관, 크로이츠베르크 걸, 일 년에 한번 열리는 배추 싸움, 보데 뮤지엄 앞에서 탱고를 추는 사람들, 위스키를 파는 약국, 베를린 미용실의 베를린 무드, 푸른 수염의 방 같은 지하실, 에밀 놀데와 브레히트, 타이 음식점에서 만난 포대화상, 유람선 모비딕, 백조로부터의 습격,
나체로 수영하는 호수, 귄터 그라스 와인, 베를린 발코니 아트, 맨발의자유인, 노벨상 수상자의 방, 뉴저먼 시네마, 만날 수도 있었던 다와다요코, 베를린의 서점, 베를린의 프랑스 거리,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르 - P233

코르뷔지에의 아파트, 발터 그로피우스의 말굽 모양 주택단지, 트럭 테러, BMW가 개최하는 롤러 블레이드 마라톤……
이런 것들에 대해 쓰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 
엉킬 대로 엉켜버린 생각의 꾸러미들을 제대로 풀지 못했던 것이다.
오래 품고 있던 이 책을 그만 내려놓는다. 이로써 ‘베를린 시절‘을 마감한다. 내게 자신의 베를린을 보여준 G와 D와 I, 베를린에서 따뜻한 집밥을 여러 번 차려준 Y, 베를린 곳곳의 탐험을 제안해준 K...... 를 비롯한모두에게 감사했다. 누구보다 씩씩해서 또 누구보다 우울할 이 책의 편집자 김민정 시인, 이 책을 쓰는 내내 죄스럽고도 고마웠다.
베를린 사람, 베를린에서 태어난 사람, 베를린에 사는 사람, 베를린에 살았던 사람, 베를린에 잠깐 머물렀던 사람, 베를린을 떠나온 사람, 베를린에 가기로 한 사람에게,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환상을 갖고 있는 2년전의 나 같은 사람에게, 어쨌거나 베를린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 모두에게 이 소박한 책을 바친다. 그리고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당신들 때문에 쓸 수 있었습니다.

2018년 2월
한은형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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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벡이라는 도시로 진입하고 있다고 인지한 순간 느껴지던 그 떨림을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철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뤼벡 중앙역을본 순간부터였는지, 아님 역밖으로 나와 그 오래된 도시를 바라보던 순간, 그러니까 갈색 벽돌과 산화되어 에메랄드색으로 변해버린 뾰족한 박공지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봤을 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걸음을 걷기가 어려웠다. 눈을 뗄 수 없었고, 발을 뗄 수 없어서, 심박수 증가, 심장 통증, 무릎 풀림, 현기증 같은 증상이 동반되었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게 ‘스탕달 신드롬‘인가 싶다. 그림이나 책을 보고 그랬던 적은 있지만 도시를 보고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즉각적이고 강렬한 육체적 반응은. 동행인 C선생님-더군다나 독문학자-께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런 흥분을 감출 만한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래서 호들갑을 떨었고, 바로 그게 뤼벡에서의 나였다.
첫 코스라고 할 만한 곳은 홀스테인 성문이었는데, 기이했다. 육중하고 견고하고 터프한가 싶었는데, 다가갈수록 우아하고 섬려하고 연약하게 보였다. 이상해서 계속 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는지C선생님은 물었다. "저거 기운 건가요?" "글쎄요." "착시일까요?" "글쎄요." (‘글쎄‘ 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은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 - P136

파이프오르간과 바흐, 여기에는 이 교회의 웅장함에 걸맞은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한때 이곳의 연주자가 바흐였다. 유명해지기 이전, 젊은날의 바흐, 1705년, 성마리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북스테후데와이파이프오르간을 만나기 위해 바흐는 400킬로미터를 걸어와 뤼벡에 머무른다. 그리고 감격한 바흐는 늦게 돌아가 직장에서 잘린다.
한때 직장에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120킬로미터를 운전한 적이 있던나는 귀환하던 바흐의 400킬로미터에 대해 생각했다. 잘리기 위해 400킬로미터를 걸어갔던 무명의 바흐에 대해, 격정과 걱정이 뒤섞였을 그의 귀환길에 대해.
그리고 드디어 토마스 만의 생가에 만든 토마스 만 기념관에 갔다.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만의 기념관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는 거의 읽은 적이 없는 내게 이곳은 토마스 만 기념관일 뿐이었다. - P138

그러니까 ‘부덴브로크=뤼벡‘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기념관에는 소설의 배경을 현실의 뤼벡에 대입해놓은 관광지도 같은 것이있다.
네 번쯤 읽은 이 소설을 다시 읽고, 다시 뤼벡에 와 이 지도를 들고 뤼벡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품위 있고 훌륭하지만, 아주 훌륭하지만 진부한 도시‘라고 토마스만이 말했던 이 도시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가 품위 있지만은 않고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반증이라고생각한다. 자기가 나고 자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뜯어먹으며 소설을 썼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고, 뤼벡을 걸으며, 내가 소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것도 토마스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 P140

늦은 점심을 했던 식당도 나의 뤼벡 애호증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을했다. 우리가 옛 선원조합의 건물이었다는 그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시간의 먼지와 습기, 소금 냄새 같은 것들에 마음을 뺏겼고, 이름도 낯선 찬더zander라는 생선을 먹고는 기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손으로 가슴을 눌러야 했다.
그때 비단 조끼를 입은 노인에 가까운 남자가 긴 막대기를 들고 등장하더니 촛대가 20개쯤 달린 샹들리에에 일일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우리의 얼굴은 환해졌고, 그 남자는 촛불에 불을붙이는 중간 중간 우리와 미소를 교환했다. 나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던그 식당에서 우리만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준다는 게, 그리고 성가실 수 있는 옛 방식을 고수하는 그 식당의 운영 모토가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남자가 촛불을 밝히는 긴 막대는 보면 볼수록 밤 딸 때 쓰던 막대와 비슷해 보였다. 가시 돋힌 밤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던 순간이 기억났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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