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소설들은 작가의 뜻에 따라서 인물이며 사건이며 정황이 설정되고 존중되다가 그 운명까지도 규정된다. 그런데 『土地는 이와다르니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새와 기는 짐승이며 이름없는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가지고있는 ‘생명의 길‘을 그 생명의 이치에 좇아 조심스럽게 따라가주고 있을 뿐이다. 지극한 생명존중의 사상이다. 이 극진한 생명사상에 의하여 바위를 만나면 밑으로 스며드는 개울이 되고 산을 만나면 품에 안고 감아도는 강물이 되다가 이윽고는 대해(海)로 나아가는 朴景利 선생의「土地』를 가리켜, 진정한 대하소설(小說)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진실로 여기에 있음인저.

金聖東 作家 - P-1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간수의 눈을 뒤통수에 느끼며 서희는 형무소를 나왔다. ‘일순간만 같은 길상과의 대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바라본 짧은 시간, 목이타던 시간, 만남은 빗방울이었던가. 언제나 그랬었지만 사막을 걷듯 서희는 언덕길을 내려온다.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 붉은 벽돌의 담벽과 서대문 종점의 우중충한 풍경은 인생의 종말같이 서회 마음을 눌러지른다. 이곳의 풍경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늘 잿빛이었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죄인들 가족의 마음과 같이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재소자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옥색 명주 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겨울을 어찌 날꼬?‘ - P11

남편에 대하여 원망과 존경도 없었다. 그리움도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관계, 현재의 상황만이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온다.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含量)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서도 못 견딘다.
종점에 종을 땡땡 울리며 전차가 온다. 전차는 멎고 그곳에서 을씨년스런 조선의 백성들이 쏟아져내린다. 암석으로 깎아지른 산둥성이의 가난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형무소를 찾는 어두운 얼굴들이더욱 많으리라. 잿빛 산과 언덕 위를 흐르는 흰 구름, 서희 입에서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 P12

존경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석이도 안다. 그러나 석이 마음속에는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투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기화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그쪽에서 잘랐다. 그것은 사내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기생의 처지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러려니 무심하던 그때의 기화도 상기된다. 만일 서의돈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기화는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석이는 생각한다. 명문의 후예들, 선비의후예들, 그들에게 애정이란 이른바 풍류에 불과한 것이었을 테니까. 또 기화는 기생이었으니까. 풍류와 기생의 당연한 결과였는지모른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의돈은 기화에게 미쳤다.
바로 그 미친 상태에서도 발길을 끊었던 서의돈의 냉정함에 석이는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통틀어 양반들의 냉정함이요 기생이나 서민들에 대한 근본적 모멸이기 때문에 석이는 서의돈에 대하여 순수한 존경을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서의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석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기화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 교사와 기생, 일가의 가장과 기생, 어떤 시기가 닥치면 자신도 결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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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 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 차기 때문에 봄은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實證)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P179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 P200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 - P203

그것은 연학이도 느낀 일이다. 철통 같은 비밀, 비밀의 조직, 그것이 아무리 철통 같은 비밀이라 하여도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그만한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한번의 폭발마다 조직은 늙어가고 줄어드는데 보충이 없다는 것이다. 줄어들고 늙어가는 만큼 폭발력도 줄어들고 늙어갈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요 환이 머리 하나의 정열로 이끌기엔 지리산은 이미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다 막연히 느끼고있다. 환이를 기다리는 마음도 마무리짓거나 아니면 큰 변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옆으로 퍼져나가야지, 느리게 앞뒤 재는 것이 이제는 안묵힌다. 그거를 형평사운동을 함서 깨달은 긴데 서울서 온 젊은 사람들 얘기를 들을 것 겉으믄 지주와 소작인들이 변동된 때문에, 자작농이 줄고 지주도 줄고 대신 수가 적어진 지주는 땅이 자꾸 넓어지는데, 그 적어진 지주에 왜놈들이 또 끼여든다는 게야. 그뿐인가. 왜놈의 농민들이 합류하게 된께 간신히 소작 자리를 거머잡은 축이 움직이겠나? 쥐꼬리만한 소작지나마 빼앗기고 농촌에서 떨리나간 사람들의 갈 곳이 어딘가. 만주, 일본, 그리고 꾸역꾸역 몰려가는 곳이 도시 공장인데 움직일 수도 있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라 하더마. 일리가 있는 것 걷기도 하고 모릴 것 걷기도하고, 독립운동하고는 우떻게 되는 긴지. 우리 생각을 어떻게 고치야 하는 건지. 다만 이제 동학으론 안 된다. 자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동학은 낡고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도 무너져가고 있는 기라." - P219

길상을 몹시 닮은 환국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하며 상현은 쓸쓸하게 웃는다. 양반?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이냐! 지금, 눈앞에는 그 옛날 하인이었던 사내의 자식이 어느 귀공자 못지않게 슬기를 가득 채운 눈망울을 빛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숭배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비, 한치의 의혹도 없는 강하고 또강한 핏줄의 연결, 저 슬기로운 눈망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질 않는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人事)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상의 얼굴과 안방에앉아 있을 명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환국이 아비를 못 보는 형편과 하동서 아비를 못 보는 아들 형제의형편이 같지 않음을, 그것은 깊은 패배, 비애를 몰고 온다.
‘내가 아빈가? 내가 한 여자의 지아비란 말인가? 참으로 거미줄같은 인연이로고‘ - P260

한숨을 내쉰다. 용이의 밤 치는 손은 더욱 빨라진다. 그는 자리에서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것이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 P279

석이는 독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밭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까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 P314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 P371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꿈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 바다의 환각도아닌데 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上海)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 - P371

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풀도 시들고 열매도 거두어들여버린 황막한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私情)은 누구나가 죽이고왔으니 말이다. - P372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두 손을 활짝 쳐들고 그 압력을 떠밀고 싶은 충동, 이민족(異民族)의 힘이 얼마나 비정한가를 가슴 저리게 실감한다. 은행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형무소로 달려가는 초라한영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땅내나라에서 어찌하여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는 행랑아범의 신세가 되었더란 말인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시시각각 주변을 살펴야하는 마음의 무게는 질병치고도 가장 무서운 질병인 것만 같은생각이 든다.
‘이러다간 다 미치겠다‘
미쳐 있기보다 미칠 것을 예감하는 고통, 그런 뜻에서 차라리 옥에 갇힌 사람, 뛰는 사람, 목적이 멀더라도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 편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까.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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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는 주기적으로 반드시 다시 써야는하는 특이한 장르이다. 이른바 ‘명작(名作)‘들에 대한 상대적인 성취도와 평가가 시대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이 지니는 고유한자율성과 역동성, 문학이 쉬임없는 생성과 극복의 대상이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朴景利선생의 土地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민족의 대서사시(大敍事)다.
장강(長江)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대(大) 서사시는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시름을 달래주고 풀어준다. ‘한국문학사‘가「土地」의 탄생과 더불어 한 획이 그어졌음을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원우 作家 - P-1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뿌러진 한 마리의 송학(松鶴)이 초라한 것은당연한 일이거니 용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門)을 물리면은 현인신(現人神)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뿌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총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론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 P59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통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이렇게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홀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옴쭉달싹을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드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 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 P68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겠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학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요?"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시끄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라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 P78

것, 그건 아무도 못쓴다. 바보 시눔,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계절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먹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 P79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요, 나으리 용서해주시요,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몸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驛舍)며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 P107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내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 - P107

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九割)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피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그들, 그들인 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나, 홍!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니다. 분명 운명이아닌 쪽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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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형 만나기 전에 나를 따라가는 거다. 구경하러 가자는 것만은아니야 뭐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하자는대로"
"그렇지만."
길상은 한복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짜믄 저렇게도 눈이 깊으까‘
한복의 가슴에 서늘한 것이 와닿는 것만 같다. 범치 못할 위엄과 덮쳐씌우는 것 같은 압력, 평범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 한복의주변을 몇 겹씩이나 감아올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당장에라도 자기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려서 올라온 잉어같이 파닥거릴 것만같다.
"그곳에 가면 너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다. 너의 형을 네 마음속에서지우기 위해서도 거복이를 만나기 전에," - P296

길상은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었다.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손등에 대고 톡톡 치다가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길상은 많이 변했다. 평사리 마을에서 보고 처음 만나는 한복에게는 한 번의 변화겠으나 길상의 변화는 두 번이다. 얼마간 냉소적이며 비꼬였고 자기 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던 용정서의 전반기에 비하면, 그런 모순과 갈등과 열등감은말끔히 헐리어지고 없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때로는 나약했던 면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힘이었다.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힘, 한복은 바로 그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것이다. 화살같이 돌아가고 싶어한 마음의 위축을 느낀 것이다. 힘이라고 집어내진 못하였지만 깊은 눈이라 했는데 그 눈의 깊이는사색에서 오는 깊이는 아니었다. 의지로써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한후에 오는 깊이, 의지의 깊이, 그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포용할 수 - P296

있는 넓이였다. 평범한 대화에 격렬하지 않은 어조는 격렬한 감성, 추상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온 그 두 가지의 융화, 현실과의 융화였던 것 같았다. 기름기 없이 바삭바삭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 지나가는 미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형님은 가족들 보고 싶은 생각 안 합니까?"
한복은 길상을 쳐다보다가 뇌듯 물었다.
"보고 싶지.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나 참을 만하다.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 같으믄,"
"너 같으면 돌아가겠나?"
"하기는 내일 일을 누가 아냐. 안 돌아간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 허허헛....." - P297

"어릴 적부터, 예, 어,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두수가 그렇다는 것을 물건 생각하듯 해야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의외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 형제니까 어렵겠지만 나하고너하고는 다르다. 그렇게 갈라놓고 보아 이번 여행은 너에게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길상은 밝게 웃었다. 웃음은 화려했다. 햇빛 아래 보는 그의 얼굴이 만주 벌판의 바람과 눈과 끝없이 오가는 행로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키가 껑충하니 커 보였다. 머잖아 등이 좀 굳어질지도 모른다. 한복은 새삼스럽게 그러한 길상의 모습에 다정한 것을 느꼈다. - P299

"최참판댁 사위라서?"
"안 그렇십니까?"
"어떻게 된 사위냐."
"......"
"가난한 것도 답답하고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 너는 그 두 가지에서 다 답답한 사람이다."
"예. 두 가지가 다아, 답답할 정도가 아니지요."
"우선은 내 나라가 남의 치하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많은 것을 착취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는다. 내 것 주고 빌어먹는 격이지."
"나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개돼지보다 못했었소."
"그 말 할 줄 알았다."
"누굴 탓하는 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탓을 보고 원망하겠십니까. 사람 대접 못 받는다고 해서 나는 아우성도 칠 수 없었습니다. 통곡도 못해보았십니다. 할 수 없었지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이니께. 형님, 나는 이대로가 좋십니다. 문둥이는 문둥이니까요. 문둥인 줄 알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기지요. 형님도 용정인가 거기서 비슷한 말씀 하지 않았소? 거복이형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나보고 가겠소."
"형님."
"내가 두만강을 넘을 때 무신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의 심부름은 살인자인 아버지와 매국노인 형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을했지요." - P303

"한복이 이놈아!"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사내자식이... 누가 너더러 일하라 했냐! 하면 좋겠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데. 그러나 아무도 너 목덜밀 잡고 끌어내지는 않아. 마음이 가야 발이 가고...... 크게는 독립이다. 크게는 말이야.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독립은 아닌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두 사나이는 결투라도 벌이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목에서 소용돌이칠 뿐, 해돋는 시각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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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숭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다. - P-1

시인의 말


지금 이 지구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중백 년 후에 지구에서 하차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인정사정없는 죽음을 생의 앞뒤에 두고,
죽음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짜거나,
죽음의 돌림노래를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았을까.
죽음이 우리 앞뒤에 공평하게 있기에 우리의 영혼은 평등하다.
그러기에 죽음은 가장 사나운 선(善)이며 은총이며, 영원이다.
나는 이 시들을 쓰며 매일 죽고 죽었다.
하지만 다시 하루하루 일어나게 만든 것도이미지와 리듬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역설.
시는 죽음에의 선험적 기록이니 그러했으리라.

당신이 내일 내게 온다고 하면, 오늘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리.

2025년 6월
김혜순 - P-1

시인의 말
(2016)


아직 죽지 않아서 부끄럽지 않냐고 매년 매달 저 무덤들에서 저 저잣거리에서 질문이 솟아오르는 나라에서, 이토록 억울한 죽음이 수많은 나라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음을 선취한 자의 목소리일 수밖에없지 않겠는가. 이 시를 쓰는 동안 무지무지 아팠다. 죽음이 정면에,
뒤통수에, 머릿속에 있었다. 림보에 사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가 갔다. 뙤약볕 아래 지구의 여름살이 곤충들처럼 고통스러웠다.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전철에서어지러워하다가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라나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가련한 여자. 고독한여자, 그 경험 다음에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
시간 속에 흐느끼는 리듬들을 옮겨 적었다. 죽음 다음의 시간엔 그누구도 이름이 없었다. 칠칠은 사십구라고 무심하게 외워지는 것처럼, 구구단을 외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이 시를 쓰고난 다음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랐다. 연구년 동안에 이 시들 중 대부분을 적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죽어버린 옛 여자들처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먼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시안의 죽음으로 이곳의 죽음이 타격되기를 바랐다. 이제 죽음을 적었으니, 다시 죽음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시집(49편의 시)을 한 편의 시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 P-1

출근
하루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P-1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첫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가련하다. 한때 저 여자를 뼈가 골수를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브래지어가 젖가슴을 껴안듯 껴안았었는데,

저 오가는 검은 머리털들이 꽉 껴안은 것, 단 한 벌,

저 여자의 몸에서 공룡이 한 마리 나오려 한다.
저 여자가 눈을 번쩍 뜬다. 그러나 이제 출구는 없다.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 P-1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너는 이제 저 여자를 향한 노스탤지어 따위는 없어라고 외쳐본다.
그래도 너는 저 여자의 생시의 눈빛을 희번득 한 번 해보다가
네 직장으로 향하던 길을 간다. 몸 없이 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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