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운무(雲) 속에 부유하듯 아이의 형체는 있는데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 어쩌면 뚜렷하지 않은 아이의 형체, 그것은 기화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였는지 모른다.
"유섭이는 지금 북경에 있지요. 내가 데리고 있다가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아이가 좀 유약한 편이지만머리가 좋고 학자형이라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상현은 그 말을 귓가에 흘려듣는다.
"내게는 그 애 하나 건져낼 힘밖에 없었지요."
무거운 바퀴가 가슴 위를 지나가는 것 같다. 다리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것 같다. 뜨거운 것이 상현의 눈앞을 가린다. 죄의식이 괴물같이 달려든다. 어머니를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그러나 상현은 버렸다기보다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들은 뿌리를 가진 식물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그들은 존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은 늘 아픔보다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그들 생각을 안 하려는 것이었다. 기화에게도 그랬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화, 그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에 대한 기분이 그러했었다. 타인같이 연관이 없고 모르는 존재로 치부하려고 했었다. 한데 사태처럼 무너져서 덮쳐씌우는 아픔과 연민을 상현은 이 순간 감당을 못한다. 상현은 자기 자신 속에 부성애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해본 일이 없다. 부성애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찌르는 이 감정은 부성애하고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짙다. - P269

방학을 며칠 앞두고 동경서 서울로 간 환국이는 어머니와 합류하여 서대문 형무소의 아버지 길상과 면회를 했다. 동대(東大)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법과를 지망하여 조도전(早稻田)예과에 입학한 환국이는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와 첫 면회를 했었고 여름 방학 귀국길에, 그러니까 두번째 면회를 한 셈이다. 삭막한 그 거리, 붉은 담벽에 여름 태양이 튀고 걸레처럼 후줄근해진사람들이 오가던 그곳, 옥중에 있는 사람도 물론 그러했겠지만 어머니와는 또 다르게 환국은 형무소의 철문을 나서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혀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체취 같은것을 환국은 느낀다.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바람 부는 음지에서 환국이는 오돌오돌 떨듯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손 한번 마주잡아볼 수 없던 그 짧은 시간, 갈증이 난다. 혀끝이 굳어진 듯 할말을 못하고 오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던 그 짧은시간, 아버지의 눈동자만이 심장을 태우는 것 같았던 짧은 시간이었다. - P285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흰새 한 마리.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환국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두 손 위에 눈을 떨어뜨린다. 창백한 손이다. 창백한 손에, 푸른정맥이 내비치는 투명한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샛파란 비취 반지에 눈이 머문다. 물방울 같은 짙은 녹색의 보석이 흰 모시 치마 위에서 어머니의 성품같이 고귀하게 보인다고 환국은 생각한다. 푸른수전과 흰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 안에 물이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각각 날아가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맞이하는 풍경, 철로 양켠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듯 석축이계속된다. 청회색의 그 돌 빛깔에서 어찌 갑자기 아버지의 가슴팍을 느끼는 걸까.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는 간단없이 정확하게 울린다. 그 바퀴 소리를 한꺼번에 잡아젖힐 수는 없는 것일까.
세월이 그냥 주렁주렁 끌려와서 당장에라도 옥문이 활짝 열려질수는 없을까. - P286

유창한 일본말, 거칠 것 없이 내어뿜던독침과도 같은 말이며 호탕한 웃음, 그는 완전히 강자였었다. 붙잡히면 놓여날 것 같지 않았던 질기고 거센 분위기, 숨도 쉬지 않고나락으로 몰아붙일 것 같은 집요함.
‘잘했다! 천안서 내리기를, 아암 잘한 일이고말고‘
김두수는 세상 참 우습구먼, 했었다. 아닌게아니라 세상 참 우습다. 악당과 악당이, 묵은 인연이 얽힌 악당과 악당이 하필이면 기차속 마주보는 좌석에서 해후를 했다는 것은 신기하기보다 우스운일이다. 조준구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실상 두 사내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 미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들이다. 다만그들은 스치고 갔을 뿐이며 부산까지 동행했다 하더라도 스치는관계에서 끝날 인간들인 것이다. 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무슨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에 긴 여행이요, 여행의 목적도 좋았던 것이 아니어서 김두수는 짜증을 달래보았을 뿐이며언동의 잔인함은 그의 일상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길 없는 이들은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 P326

사람들은 밤을 보내기 위하여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나이를 봐서는 더 살아야겠지만 호상이라 할 수 있는 상가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병고 때문에 용이 머지않아 죽을 것이란 사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병고말고는 용이 만년이 비교적 풍파 없이 조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 가슴에 못질을 한 일도 없었으며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어딘지 도인(道人)같이 표표했던 그의 일상은 사람들에게 병고로 빚은 음산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 P398

민족의식 없이, 거의 동족같이 상종해온 오가다 지로, 그의 결점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동생같이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했던 오가다가 갑자기 흉물같이 압도해온다. 송충이같이 징그러운 존재로 의식을 점령해온다. 이민족, 정복자, 거대한 발바닥으로 강산을 깡그리 밟아 뭉개는 괴물. 인성은 머리를 흔든다. 그런 악몽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듯이. 누이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맺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아니 하겠다는 인실의 감정 그 자체 때문에 오가다는 돌연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판단이나이해나 사려가 끼여들 여지 없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가조차 떠오르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만이 아우성이다. 남자들은 더러일본 여자와 관계를 맺었고 인성도 그런 사내들을 몇 보아왔다. 물론 바람직한 일로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격렬한 치욕과 혐오감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병(兵)에게 능욕당한 조선의 여인들이 자결로써 생을 결산한 사건들은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데.
한동안 오누이는 대좌한 채 침묵을 지킨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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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소설들은 작가의 뜻에 따라서 인물이며 사건이며 정황이 설정되고 존중되다가 그 운명까지도 규정된다. 그런데 『土地는 이와다르니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새와 기는 짐승이며 이름없는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가지고있는 ‘생명의 길‘을 그 생명의 이치에 좇아 조심스럽게 따라가주고 있을 뿐이다. 지극한 생명존중의 사상이다. 이 극진한 생명사상에 의하여 바위를 만나면 밑으로 스며드는 개울이 되고 산을 만나면 품에 안고 감아도는 강물이 되다가 이윽고는 대해(海)로 나아가는 朴景利 선생의「土地』를 가리켜, 진정한 대하소설(小說)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진실로 여기에 있음인저.

金聖東 作家 - P-1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간수의 눈을 뒤통수에 느끼며 서희는 형무소를 나왔다. ‘일순간만 같은 길상과의 대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바라본 짧은 시간, 목이타던 시간, 만남은 빗방울이었던가. 언제나 그랬었지만 사막을 걷듯 서희는 언덕길을 내려온다.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 붉은 벽돌의 담벽과 서대문 종점의 우중충한 풍경은 인생의 종말같이 서회 마음을 눌러지른다. 이곳의 풍경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늘 잿빛이었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죄인들 가족의 마음과 같이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재소자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옥색 명주 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겨울을 어찌 날꼬?‘ - P11

남편에 대하여 원망과 존경도 없었다. 그리움도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관계, 현재의 상황만이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온다.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含量)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서도 못 견딘다.
종점에 종을 땡땡 울리며 전차가 온다. 전차는 멎고 그곳에서 을씨년스런 조선의 백성들이 쏟아져내린다. 암석으로 깎아지른 산둥성이의 가난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형무소를 찾는 어두운 얼굴들이더욱 많으리라. 잿빛 산과 언덕 위를 흐르는 흰 구름, 서희 입에서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 P12

존경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석이도 안다. 그러나 석이 마음속에는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투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기화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그쪽에서 잘랐다. 그것은 사내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기생의 처지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러려니 무심하던 그때의 기화도 상기된다. 만일 서의돈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기화는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석이는 생각한다. 명문의 후예들, 선비의후예들, 그들에게 애정이란 이른바 풍류에 불과한 것이었을 테니까. 또 기화는 기생이었으니까. 풍류와 기생의 당연한 결과였는지모른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의돈은 기화에게 미쳤다.
바로 그 미친 상태에서도 발길을 끊었던 서의돈의 냉정함에 석이는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통틀어 양반들의 냉정함이요 기생이나 서민들에 대한 근본적 모멸이기 때문에 석이는 서의돈에 대하여 순수한 존경을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서의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석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기화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 교사와 기생, 일가의 가장과 기생, 어떤 시기가 닥치면 자신도 결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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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 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 차기 때문에 봄은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實證)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P179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 P200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 - P203

그것은 연학이도 느낀 일이다. 철통 같은 비밀, 비밀의 조직, 그것이 아무리 철통 같은 비밀이라 하여도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그만한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한번의 폭발마다 조직은 늙어가고 줄어드는데 보충이 없다는 것이다. 줄어들고 늙어가는 만큼 폭발력도 줄어들고 늙어갈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요 환이 머리 하나의 정열로 이끌기엔 지리산은 이미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다 막연히 느끼고있다. 환이를 기다리는 마음도 마무리짓거나 아니면 큰 변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옆으로 퍼져나가야지, 느리게 앞뒤 재는 것이 이제는 안묵힌다. 그거를 형평사운동을 함서 깨달은 긴데 서울서 온 젊은 사람들 얘기를 들을 것 겉으믄 지주와 소작인들이 변동된 때문에, 자작농이 줄고 지주도 줄고 대신 수가 적어진 지주는 땅이 자꾸 넓어지는데, 그 적어진 지주에 왜놈들이 또 끼여든다는 게야. 그뿐인가. 왜놈의 농민들이 합류하게 된께 간신히 소작 자리를 거머잡은 축이 움직이겠나? 쥐꼬리만한 소작지나마 빼앗기고 농촌에서 떨리나간 사람들의 갈 곳이 어딘가. 만주, 일본, 그리고 꾸역꾸역 몰려가는 곳이 도시 공장인데 움직일 수도 있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라 하더마. 일리가 있는 것 걷기도 하고 모릴 것 걷기도하고, 독립운동하고는 우떻게 되는 긴지. 우리 생각을 어떻게 고치야 하는 건지. 다만 이제 동학으론 안 된다. 자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동학은 낡고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도 무너져가고 있는 기라." - P219

길상을 몹시 닮은 환국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하며 상현은 쓸쓸하게 웃는다. 양반?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이냐! 지금, 눈앞에는 그 옛날 하인이었던 사내의 자식이 어느 귀공자 못지않게 슬기를 가득 채운 눈망울을 빛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숭배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비, 한치의 의혹도 없는 강하고 또강한 핏줄의 연결, 저 슬기로운 눈망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질 않는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人事)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상의 얼굴과 안방에앉아 있을 명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환국이 아비를 못 보는 형편과 하동서 아비를 못 보는 아들 형제의형편이 같지 않음을, 그것은 깊은 패배, 비애를 몰고 온다.
‘내가 아빈가? 내가 한 여자의 지아비란 말인가? 참으로 거미줄같은 인연이로고‘ - P260

한숨을 내쉰다. 용이의 밤 치는 손은 더욱 빨라진다. 그는 자리에서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것이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 P279

석이는 독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밭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까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 P314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 P371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꿈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 바다의 환각도아닌데 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上海)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 - P371

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풀도 시들고 열매도 거두어들여버린 황막한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私情)은 누구나가 죽이고왔으니 말이다. - P372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두 손을 활짝 쳐들고 그 압력을 떠밀고 싶은 충동, 이민족(異民族)의 힘이 얼마나 비정한가를 가슴 저리게 실감한다. 은행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형무소로 달려가는 초라한영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땅내나라에서 어찌하여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는 행랑아범의 신세가 되었더란 말인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시시각각 주변을 살펴야하는 마음의 무게는 질병치고도 가장 무서운 질병인 것만 같은생각이 든다.
‘이러다간 다 미치겠다‘
미쳐 있기보다 미칠 것을 예감하는 고통, 그런 뜻에서 차라리 옥에 갇힌 사람, 뛰는 사람, 목적이 멀더라도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 편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까.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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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는 주기적으로 반드시 다시 써야는하는 특이한 장르이다. 이른바 ‘명작(名作)‘들에 대한 상대적인 성취도와 평가가 시대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이 지니는 고유한자율성과 역동성, 문학이 쉬임없는 생성과 극복의 대상이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朴景利선생의 土地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쓰게 만드는 민족의 대서사시(大敍事)다.
장강(長江)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대(大) 서사시는 한민족이라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시름을 달래주고 풀어준다. ‘한국문학사‘가「土地」의 탄생과 더불어 한 획이 그어졌음을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김원우 作家 - P-1

영팔이를 쳐다보고 이번에는 먼산을 바라본다. 천수답에 삐뚜름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는
‘살찐 돼지보다 죽지 뿌러진 한 마리의 송학(松鶴)이 초라한 것은당연한 일이거니 용이가 초라하게 뵈는 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세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門)을 물리면은 현인신(現人神)인들 아니 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 송학의 뿌러진 죽지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한발짝도 날지 못하는데 반만년은 또 무엇인고? 야만한 나라이며 미개한 백성이라, 허허어, 강물도 흘러가고 나뭇잎도 흔들리고, 물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은 구르는 법이거늘 똬리를 틀고서 총대 앞에서 산송장이, 아아그렇게 되지를 않으려거든 친일파가 되어야 하느니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느니라. 허기야 그것인들 뜻대론 아니 되지.
농부들 주제에 어디 빈 구멍이 있다고 고개를 쳐드누, 쯔쯔쯔......
글 잘하고 문벌 좋고 돈 많은 놈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인 것을, 허허어. 변절(節)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농부들아! 허나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그대들의 복이니라‘
사람을 보고 타이르는 것처럼 허수아비는 벼 두 섬 나기 어려운 천수답에 삐뚜름히 서서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 P59

허술한 창고 같은 곳에 처넣어진 열여섯 명의 장정들은 연일 당하는 고문 때문에 초주검이 됐다. 게다가 극심한 굶주림이 이들을괴롭혔다. 육신의 통증도 배고픔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의식이 몽통하여 헛소리를 하고 깜짝깜짝 까무러치곤 하면서도 배고픔이 잊혀지지는 않았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이렇게 무력해지는가, 홍이는 뼈에 사무치도록 그것을 깨달았다. 고문을 당할 때는 무엇이든 했노라 외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가 모르는데야 살이 찍혀 나간들 별수없는 일이었다. 한 덩이의 밥을 위해서라면 내일 죽고 말 얘기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고 말 그 얘기가없는데야 어쩔 것인가. 사흘이 지나고 나홀로 접어드는 날 열여섯명의 장정들 거의 모두는 고문의 고통, 배고픔의 고통도 한고비를넘겼다. 이따금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간 그것도 자맥질하듯 흘러가버리고 짐짝같이 옴쭉달싹을 못하게 됐다. 고문을 제일많이 당하기론 홍이다. 처음엔 고분고분하지 않고 쓰는 말에 유식한 냄새가 난다 하여 남보다 많이 맞았고 다음은 얼굴 잘생긴 것이매 하나 더 맞는 원인이 되었다. 육체적 고문뿐인가. 섬세한 감정에결벽증인 홍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심하게 정신적 고문을 받았다.
여드름이 뚝뚝 불거지고 개기름이 흐르는 매부리코 곤도 상등병은 독사 같은 눈을 하고서 홍이의 변화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상상할수 없는 상소리, 더러운 얘기를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기도 했었다.
홍이의 여자 관계를 캐묻는 등, 아비를 모욕하고 어미를 모욕했다. - P68

"그 사람들 뒷바라지를 연학이형님이 했군요."
"우짜겠노 최참판댁에서 부른 오광대 구경하다가 그리 된 거를"
연학이 웃는다
"그래, 골병은 안 들었나?"
"모르지요. 골병도 들긴 들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요?"
"영팔이아제 집에 기신다. 너거 어무니는 아무것도 모린께, 알믄시끄럽거든. 아무튼 잘했다."
"뭐 말입니까."
"간도 갔었다는 얘기는 안 했는갑데?"
"그 얘기 했다가는 일이 간단치 않았겠지요."
"니 아부지가 함부로 말할 아이는 아니라 하시기는 하더라만,"
홍이의 보조는 정확했다.
"연학이형님."
"응."
"앞뒤 재가면서 기어라 하면 기고 서라 하면 서고 눈물 흘리라 하면 흘리고...... 눈 부릅뜨다가 뺨대기 하나 더 맞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그걸 깨달았소."
"그래, 그걸 깨달았이믄 좀 덜 억울할 기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 P78

것, 그건 아무도 못쓴다. 바보 시눔, 미친 시늉 뭣이든 빠져나오는 계절이제 싸움이란 그래야 이기는 법이거든. 감정 때문에 힘먹는 것, 그것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앞으로 살아가자믄"
"벌써 나뭇잎이 누렇소"
"누우렇다뿐인가, 많이 떨어졌지." - P79

서의돈이 품평을 하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은 사실 그 대부분이장사꾼이 아니며, 하급관리가 아니며, 학생도 아닌, 낙타외투의 신사는 더더구나 아닌,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백성들인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모습이요 얼굴이며, 뽐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뽐내어볼 쥐뿔도 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나으리 살려주시요, 나으리 용서해주시요, 나으리 억울합니다, 옛날 옛적부터 몸에 밴 언어를 지닌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괴물, 귀청이 날아가게 기적을 울리며 당장에라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어 달려들 것만 같은 시꺼먼 기차에 쫓기듯 가고 있다. 어둠 속에 우뚝우뚝 선 건물이며 높은 쇠기둥이며 엿가락같이 휘어서 뻗어난 레일, 금테 모자를 쓰고 깃발을 든 사내,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역사(驛舍)며 어둠 속에 떠 있는 빨갛고 파아란 신호등이며, 생소하고 위협적인 모든 형체와 빛깔과 소리에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쇳덩이가 정수리를 칠 것인지, 언제 어디서 굉음이울리며 귀청을 찢을 것인지, 가난한 보따리를 마구 흔들며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떠밀면 물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고 불속에던지면 타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백성들, 어느덧 그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울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 P107

선우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수미다가와, 나가요바시 밑으로 수없는 시체가 떠내려가던 광경을 생각한다. 연무장에서는 기병들이 총성에 놀랄 이웃을 고려하여 수용한 조선사람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는 것이며,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울음 터뜨리는 태아까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을 생각한다. 계엄령을편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집결시켜놓고 도리어 미친 군중에게 내어주어 집단살해를 감행하였다. 미친 군중은, 뿐인가, 버젓한 군인 경관까지 합세하여 호송중의 조선인들을 대로에서 살육했으며 집합소를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을 살육했다.
수미다가와에서 건져낸 시체 중에는 등에 업은 아이말고도 양팔에 아이 하나씩을 껴안은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 숱한 죽음, 숱한 송장들은 누구인가. 방금 종종걸음으로 역사를 향해 쫓기 - P107

듯 가던 바로 그 백성들이다. 한민족의 구할(九割)을 차지하고 있는 차림새부터 춥고 추운 얼굴의 피와 땀밖에 팔아먹을 것이 없는그들, 그들인 것이다.
‘죽어자빠진 놈들은 어떤 놈이며 살아남은 놈들은 또 어떤 놈들이나, 홍! 그게 항상 문제거든.‘
서의돈이 내뱉은 말을 선우신은 되새겨본다. 항상 문제라는 것은 역사의 문젯거리라는 뜻이다. 서의돈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고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자가 아닌 선우신이지만 서의돈의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니다. 분명 운명이아닌 쪽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섬길 적에 역사는 운명인 동시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포옹일 수도 있고 신과 인간의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몰아낸다면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던 고대의 노예나 노예선을 타야 했던 아프리카의 검둥이는역사의 운명 탓이 아니다. 강자의 이빨이 찢어발긴 희생물일 뿐이다. 선우신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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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형 만나기 전에 나를 따라가는 거다. 구경하러 가자는 것만은아니야 뭐 그렇다고 우리랑 같이 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나 하자는대로"
"그렇지만."
길상은 한복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짜믄 저렇게도 눈이 깊으까‘
한복의 가슴에 서늘한 것이 와닿는 것만 같다. 범치 못할 위엄과 덮쳐씌우는 것 같은 압력, 평범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 한복의주변을 몇 겹씩이나 감아올리는 것 같은 것을 느낀다. 당장에라도 자기 몸뚱이가 낚싯대에 걸려서 올라온 잉어같이 파닥거릴 것만같다.
"그곳에 가면 너는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거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다. 너의 형을 네 마음속에서지우기 위해서도 거복이를 만나기 전에," - P296

길상은 허름한 양복주머니 속에서 궐련을 꺼내었다.
"담배 피우나?"
"안 피웁니다."
손등에 대고 톡톡 치다가 길상은 담배를 붙여문다. 집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확실히 길상은 많이 변했다. 평사리 마을에서 보고 처음 만나는 한복에게는 한 번의 변화겠으나 길상의 변화는 두 번이다. 얼마간 냉소적이며 비꼬였고 자기 모순 속에 허우적거리던 용정서의 전반기에 비하면, 그런 모순과 갈등과 열등감은말끔히 헐리어지고 없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때로는 나약했던 면도 없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그에게서 넘쳐나는 것은 힘이었다. 무엇을 움직일 수 있는 힘, 한복은 바로 그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것이다. 화살같이 돌아가고 싶어한 마음의 위축을 느낀 것이다. 힘이라고 집어내진 못하였지만 깊은 눈이라 했는데 그 눈의 깊이는사색에서 오는 깊이는 아니었다. 의지로써 뛰어넘고 시련을 극복한후에 오는 깊이, 의지의 깊이, 그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포용할 수 - P296

있는 넓이였다. 평범한 대화에 격렬하지 않은 어조는 격렬한 감성, 추상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온 그 두 가지의 융화, 현실과의 융화였던 것 같았다. 기름기 없이 바삭바삭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 지나가는 미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형님은 가족들 보고 싶은 생각 안 합니까?"
한복은 길상을 쳐다보다가 뇌듯 물었다.
"보고 싶지.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그러나 참을 만하다. 고생은 안 하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 같으믄,"
"너 같으면 돌아가겠나?"
"하기는 내일 일을 누가 아냐. 안 돌아간다고 장담하는 것도 우습지, 허허헛....." - P297

"어릴 적부터, 예, 어, 어릴 적부터 그랬지요"
"두수가 그렇다는 것을 물건 생각하듯 해야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의외로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 형제니까 어렵겠지만 나하고너하고는 다르다. 그렇게 갈라놓고 보아 이번 여행은 너에게 있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결 마음이 편할 거다."
길상은 밝게 웃었다. 웃음은 화려했다. 햇빛 아래 보는 그의 얼굴이 만주 벌판의 바람과 눈과 끝없이 오가는 행로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키가 껑충하니 커 보였다. 머잖아 등이 좀 굳어질지도 모른다. 한복은 새삼스럽게 그러한 길상의 모습에 다정한 것을 느꼈다. - P299

"최참판댁 사위라서?"
"안 그렇십니까?"
"어떻게 된 사위냐."
"......"
"가난한 것도 답답하고 사람의 대우를 못 받는 것도 답답하다. 너는 그 두 가지에서 다 답답한 사람이다."
"예. 두 가지가 다아, 답답할 정도가 아니지요."
"우선은 내 나라가 남의 치하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많은 것을 착취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는다. 내 것 주고 빌어먹는 격이지."
"나는 나라를 빼앗기기 이전부터 개돼지보다 못했었소."
"그 말 할 줄 알았다."
"누굴 탓하는 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탓을 보고 원망하겠십니까. 사람 대접 못 받는다고 해서 나는 아우성도 칠 수 없었습니다. 통곡도 못해보았십니다. 할 수 없었지요.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이니께. 형님, 나는 이대로가 좋십니다. 문둥이는 문둥이니까요. 문둥인 줄 알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기지요. 형님도 용정인가 거기서 비슷한 말씀 하지 않았소? 거복이형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나보고 가겠소."
"형님."
"내가 두만강을 넘을 때 무신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의 심부름은 살인자인 아버지와 매국노인 형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을했지요." - P303

"한복이 이놈아!"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사내자식이... 누가 너더러 일하라 했냐! 하면 좋겠지......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데. 그러나 아무도 너 목덜밀 잡고 끌어내지는 않아. 마음이 가야 발이 가고...... 크게는 독립이다. 크게는 말이야. 그러나 옛날로 돌아가자는 독립은 아닌 게야. 두메산골에 가서 나뭇짐을 지더라도 가난하고 사람의 대접을 못 받는 이치를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두 사나이는 결투라도 벌이듯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차가운 밤바람이 수목에서 소용돌이칠 뿐, 해돋는 시각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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