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책’
달달한 연애 소설이려니 했다. 마침 달달한 책이 읽고 싶었고.
“그날, 나는 그 남자의 책을 훔쳤다.” 로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앤디 워홀의 표지 그림도 그 기대치를 배가 시켜주었다. 오랫동안 나에게 함정임은 작가 개인으로보다는 김소진의 그녀로 박제화 되어있었다. 그 동년배의 작가들, 특히 여류라 호칭할 작가군단의 글들을 거의 섭렵했음에도 그녀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이유는 그러함일 것이다. 분명 소설가로 알고 있기는 한데 작년 겨울에 제주 여행길에서 읽은 ‘소설가의 여행법’이 그녀의 첫 책이었다.
김화영이 ‘여름의 묘약’이나 ‘행복의 충격’에서 이미 시도한 여행 방식이기는 하지만 한번쯤 해보고 싶은 근사한 여정들이었고 그녀의 해박함과 소설 속의 주인공을 찾아서 작가의 행적을 따라가는 그녀의 글들은 좋았다. 그런 글은 워낙 내 취향이기도 했고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좁은 가방에 며칠 들고 다녀서 오래된 책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인 ‘내 남자의 책’.
뿔(웅진출판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정가 12,000원 짜리 단행본을 3,600원 하기에 냉큼 사고 작가에게, 출판사에게 많이 미안해서 부지런히 읽었다. 알라딘에서 대폭할인 중인 많은 책들이 웅진이거나 뿔인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중고보다 더 헐한 값으로 사서 무슨 횡재라도 한 것처럼 좋기도 하지만 뒤통수가 따갑고 찜찜한 것은 무슨 심리인지 잘 모르겠다. 암튼 출판계의 불황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잘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다. 결국은 많은 책을 사야 한다는 말이지만 안 읽고 쌓인 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각설하고, 소설은 무겁고 복잡하고 난해했다.
그날, 그 남자의 책이 내 마음을 훔쳐 달아났다! 존재자체가 예술이 된 잔혹극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 그의 광기를 좇는 ‘나’와 ‘동주’ 지금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예술가들 …, 광기 어린 우리들 삶을 ‘소설’로 끌어안은 영화 같은 이야기. 라고 뒤표지는 말하고 있고 호기심은 증폭 되었으나 200페이지 남짓의 책을 덮고 났을 때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앙토냉 아르토’에서 시작한 인물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장 뤽 고다르’, ‘베케트’, ‘오스카 와일드’, ‘반 고흐’,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플래허티’, ‘디카프리오’,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예이츠’, ‘유진 오닐’, ‘마르그리트 뒤라스’, ‘오르한 파묵’, ‘장 주네’, ‘사르트르’, ‘폴 테브냉’, ‘자크 데리다’, ‘아르토 파실린나’, ‘릴케’, ‘마르셀 뒤샹’, ‘로뎅’, ‘발자크’, ‘에드워드 호퍼’, ‘로스코’, ‘백남준’, ‘수전 손택’, ‘폴 오스터’, ‘9·11’, ‘조너선 사포란’, ‘비틀즈’, ‘랭보’, ‘짐 모리슨’ ‘루벤스의 한국 남자’, ‘이오네스코’, ‘김지하’까지다. 더러 빼먹은 몇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장소들이라니. ‘소설가의 여행법’ 속의 작가들과 그 장소들이 대거 등장했고 옮겨 다녔다. ‘앙토냉 아르토’라는 노마드족인 인물의 행적을 좇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소설가의 여행법’ 속에다 몇 몇 주인공을 섞어 놓은 듯 했다. 물론 그렇다고 잡탕은 아니다. 논픽션을 가장한 픽션 같은,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보이는 풍경들이다. 그런데 임현준의 목소리나 시선이 아니라 함정임의 시선으로 읽힌다는 것이 소설에 몰입하는데 내내 방해가 된다. 정작 소설의 주인공들은 좀 우물쭈물 마무리 된 듯도 하다. 끝까지 남는 물음, 그녀의 첫 사랑 경후는 어쩌다 세상을 떠난 것일까? 소설 속에서 꽤 중요하고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데 도무지 유추해낼 수가 없다. 미치지 않았다는 아버지 임인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미궁으로 몰고 가기엔 서사가 약하다. 아니면 읽어 낼 눈을 갖지 못한 탓일 게다. ‘존재자체가 예술이 된’을 읽어 내지 못하는.
아직 내게는 김소진의 그녀를 뛰어 넘을 뭔가는 부족하다. 그녀의 다른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할 듯싶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죽기 전에는 읽으리라 마음먹은 소설들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읽기도 전에 내용을 거의 알아버린 소설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거대 서사시 <오딧세이아>,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스탕달의 <적과 흑>, 귀스타브 플로베리의 <마담 보바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치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는 호메로스에 의해 고대 그리스와 그 사람들을, 보카치오와 단테에 의해 14세기 이탈리와 그 사람들을, 스탕달과 플로베르에 의해 19세기 중반 프랑스와 그 사람들을,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19세기 말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을, 그리고 카잔차키스를 통해 20세기 그리스와 그리스 사람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란, 20세기를 거쳐 현대의 그리스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러니까 그 주인공 조르바를 통하지 않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르바란 누구인가.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53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세계적인 알베르 카뮈 전공자 김화영은 이 한 문장에 매료되어 카뮈 연구를 시작했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진정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신들이 내려와 사는 곳, 그곳은 도대체 어떤 형상일까. 부르조아 계층의 사르트르와는 달리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극빈층 출신인 카뮈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가 유년기를 보낸 알제리 타파사의 바람과 태양과 돌과 꽃, 루르마랭에 가면 타파사를 느낄 수 있을까. 내 눈은 드넓은 고원의 올리브 나무 군락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훑고 지나갔다. 로리 마을을 지나자 도로 표지판에 루르마랭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카뮈의 모습이라도 본 듯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양을 좇아 달려온 길, 나는 뛰는 가슴을 누그러뜨리며 카뮈의 문학을 키워준 팔 할, 그의 고향 예찬 <티파사에서의 봄>을 나직이 읊조렸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덩이 속에서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을 앞으로 나는 만날 수 있을까.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을 천직이자 업으로 살아가지만, 모든 작가가 미문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문, 즉 아름다운 산문을 쓰는 작가로 한국의 이효석과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를 꼽는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카뮈의 <결혼> 연작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 작가의 혼이 깃든 문장은 마음을 부드럽게 순화해주는 보편적인 힘을 지닌 동시에 심미안을 열어주는 충격을 던진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이 카뮈의 문장으로 나는 자연의 이치와 세상의 겉과 속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었는데, 현현顯現의 세계가 그것이다. 너무 강한 빛 속에, 또는 너무 깜깜한 어둠 속에 들어가면, 분간할 수 없이 먹먹해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형체가 명료하게 눈에 잡히는 순간이 온다. 복잡하게 얽힌 사태의 핵심이 오롯이 잡히는 순간, 또는 한 편의 작품이 거느린 상이 문득 파악되는 순간이 그것이다.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146~149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 역사, 문화적인 성격을 전제하지 않았을 때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반응들이다. 실패한 혁명가의 은둔지로서의 페루(<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수백 명의 총을 든 유럽 제국주의자들(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어주어야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등의 20여 개의 국가들), 이질적인 세계(가톨릭)를 강제로 몸과 영혼 속 깊이 받아들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현실적 사고 체계와 삶의 양상…….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적인 특성은 외압에 무너진 슬픈 역사가 빚어낸 ‘이질혼종’의 난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혼종이 소설과 만나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고, 요사의 총체적 환상이 펼쳐지며 코엘료의 빛나는 연금술이 생성된 것이다. 21세기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혼종성hybrism(또는 convergence)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문학의, 나아가 인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중심에 요사가 있고, 소설의 다른 이름으로 ‘페루’가 새롭게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175
에르노는, 내가 아는 한, 사랑의 상실을 폭력으로 여기며 그 폭력과의 싸움을 글쓰기, 혹은 소설로 영원화하는 최초의 작가이다. 이 때 에르노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사적 기록이 아닌 ‘에르노적 글쓰기’라는 독자적인 영역에서 다시 태어난다.
세상에 질투 없는 사랑, 죄(의식) 없는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 번민 없는 사랑, 상처 없는 사랑, 이별 없는 사랑, 절망 없는 사랑이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이 친구를 붙잡고 답답한 사랑, 쓰라린 마음을 고백하고 용기를 얻고 포기하고 위로받는다면, 나는 서가든 묘지든, 작가들을 찾는다. 체험적 글쓰기, 특히 사랑을 소설화하기에 용감했던 뒤라스와 에르노를 찾곤 한다. 뒤라스와 에르노, 그들은 사랑에서 욕망에서 고통에서 쾌락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에서 작가의 한계치를 넓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시킨 사랑의 전사戰士들이기 때문에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351
국내에 출판 되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전작을 봄에 읽었다. 독특하고 강렬했다. 그녀의 책들을 묶어 따로 페이퍼를 써야지 써야지하고 미뤄두고 있는데 소설가의 여행법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이 글을 옮기고 보니 다시 의욕이 생긴다. 조만간에 시작해야겠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책상에 쌓인 읽고 싶은 책들이 발목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아, 그녀의 ‘탐닉’은 못 읽었다.
글을 옮겨 적느라 소설가의 여행법의 접힌 부분들을 펼치면서 자신의 글을 인용한 대목들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지. 그 부분들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 그녀의 소설은 그녀가 찾아 갔던 길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그녀는 2011년 말에 ‘내 남자의 책’을 출간했고 2012년 초에 ‘소설가의 여행법’을 출간했으니 비슷한 기간, 비슷한 간극사이에 읽은 내 느낌도 무리는 아니구나 싶다.
특히 그와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아르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만남과 헤어짐이 매번 가슴 떨림으로 이루어지는 열차 역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또한 한몫하고 있었다. 서영은 나의 이런 상태를 중독이라 부르며 언제까지 길 위의 연인처럼 살 수는 없을 거라고 보다 현실적인 관계를 권유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거리가 주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오히려 나를 그에게 묶어주었고, 그가 부산에 떨어져 있는 것이 특별한 배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경후처럼 존재 자체가 이 지구에서 아예 사라져버리지만 않는다면, 형식이야 어떻든 괜찮았다.
삶에는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워즈워스는 그것을 시간의 점이라고 말했고, 나는 초고속 열차를 통해 그 시간, 아니 속도의 점을 삶의 중요한 순간으로 사용했다. 나는 서울역에서, 그는 부산역에서 출발해 우리는 천안역, 대전역, 동대구역은 물론 심지어 부산 직전의 밀양역과 구포역에서 만나는 짜릿함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서로 출발할 수 있는 시간에 열차를 타서는 어느 역이 되든 만나는 지점에 잠시 내려 한 두시간 함께 있다가 그는 부산으로 나는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함정임의 ‘내 남자의 책' p92 부분을 읽으면 내가 왜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을 혼동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둘은 뼛속까지 유목민인 것이다. 함정임은 임현준이고 임현준은 함정임인 소설로 이해하니 비로소 윤곽이 또렷해진다. 달달하지는 않지만 연애 소설의 매개체가 된 많은 이들의 거론이 유쾌하다. 그 또한 내 오역誤譯이더라도.
책속에 등장하는 ‘아르토 파실린나’의 [기발한 자살 여행]을 읽었다. 이 책 또한 한비야의 추천으로 꽤 오래 묵혀 두었는데, 몇 번 시작하다가 말다가 결국 이번에 마쳤다. 이렇게 기발하고 유머러스하고 희열이 차오르는 책을 그토록 오래 방기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한심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얼마나 편협한 독서를 하고 있는 것이냐, 넌? 이런 물음이 끝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우울증이다. 비애, 한없는 무관심, 우울증이 이 불행한 민족을 짓누른다. 천 년의 세월동안 이 땅의 사람들은 우울증에 굴복당했으며, 그들의 영혼은 음울하고 진지하다. 그 결과는 아주 파괴적이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암울한 마음은 과거의 소련연방보다도 더 심각한 적이다. 그러나 핀란드인들은 투사의 종족이다. 절대로 굴복하는 법이 없으며, 끝까지 폭군에 저항한다. 로 시작되는 이 책 한 권을 통해 핀란드라는 머나먼 나라와 연결 되었으며 알지 못하는 우울한 그들과 화주 한 병을 나눌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소설의 힘인지 문화의 힘인지, 단순히 작가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것이 아마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르토 파실린나’는 1942년 핀란드 북부의 라플란드 키틸래에서 태어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키틸래 마을을 지나는 트럭 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일군을 피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쳐 라플란드로 도망치던 중이었다. (나는 유년기 초기에 네 나라를 경험했다. 도망은 늘 내 글에 등장하는 소재이다-아르토 파실린나).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허름한 농장에 여덟 자녀와 홀로 남았다. 핀란드어로 ‘돌로 세운 요새’라는 뜻을 지닌 ‘파실린나’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벌목 인부로, 그 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작가가 된 파실린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어려서부터 벌목일이나 농사를 포함해 여러 직업을 전전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숲에서 일하면서 땅을 일구고, 나무를 자르고, 고기를 잡고, 사냥을 했다. 그때의 경험들이 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되면서 도시로 나와 살게 되었다.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수많은 기사들을 작성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글쓰기 훈련의 시기였던 것 같다.”
책 날개에서 작가 소개를 옮겨 적는다. 이 내용만 보아도 ‘파실린나’라는 작가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한 밤중에 혼자 앉아서 낄낄대다가 울컥하는 마음으로 책을 내려놓는다. 이런 여행이라면 자살단 일원이 되어 유럽 대륙을 누비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켐파이넨 대령과 온니 렐로넨은 전 세계인을 상대로 그런 자살단을 꾸릴 생각은 없는 것일까? 얼른 지원할 텐데. 삶의 소중함을 알아 버렸으니 그럴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 못내 아쉽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때로는 삐딱하지만 거침없는 파실린나의 문장들이 삶의 희망를 다시금 부여한다. 우리에게도 지금, 바로 지금 꼭 필요한 책이다. 책 속으로, 저자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만큼 현실 도피는 없는 것 같다. 더위도, 살아가는 일의 고민 따위도 별 거 아닌 것처럼 시시하게 느껴진다. 잠시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또 그 무엇인가로부터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쉼이 책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