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시집 57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함께 젖다 2

                        윤제림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수건이 많이 젖었습니다.

그새.

                           시집 [사랑을 놓치다]중에서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우산을 들고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이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 물씬합니다.

봄비는 종아리까지 속수무책 튀어 오르고

몰래 지켜보던 시선 홀로 들켜버리면

꿈이 깨듯 사라지고 말 풍경이, 마음 길이,

쓸쓸해서 함께 젖습니다.

.......

봄이 점점 짧아집니다.

짧아서 더 사무치게 아름다운 이 봄.

가문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 화안한 꽃비 내리는

그대 생애 최고의 봄날이

여기서 머문 바로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_^;;

            

 

 

지난 사월에 화장실에 걸었던 시인데 갑작스럽게 다가온 황망한 소식에 차마 올릴 수 없었어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화가 나고

무기력하게 슬프기만 했던.

아침이면 저수지에 나가 아름다운 봄 풍경 앞에서 '이것도 사치다. 사치다'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강허달림의 노래들에 홀려 있다가

바람이를 달려 일터를 달려가고는 했던 고단한 시간이 이어졌어요.

퇴근길에는 그 길을 한 시간씩 걸으면서 몸을 혹사시켜 보아도 마음이 달래지지가 않았는데.

오월이 되면서는 도무지 걷고 싶지가 않아

유혹하는 수변 산책로를 외면하고 바람이로 쌩하고 달려옵니다.

이 무슨 변덕인지.  

데크 한 켠에 점점 길어지는 노란 포스트잇의 기원들이 먹먹하게 만들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버린 허망함 탓일 겁니다.

이놈의 나라에서 도무지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질 않아서 일 겁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시를 붙입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설령,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함께 젖다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시집 [사랑을 놓치다]중에서

 

서산 개심사(開心寺)에 가 보셨나요?

이 시에는 자분자분 비 내리는 개심사 경내가 보입니다.

나무백일홍도, 비구니들도, 기왓장에 쓰인 희끗한 이름들도, 이끼들과 촉촉하게 함께 젖고 있는 풍경으로.

물론 시인께서 그런 개심사를 보았을지는…… 모르지요.

그곳이 어디든‘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함께 젖고, 함께 피어나고, 함께 지는 슬픈 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져버린 어린 목숨들이 아파서 함께 젖어보는 오월입니다.

2014년 4월 16일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함께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다짐한 그 시간들과 그 사람들을.

다시는 이런 참담한 사건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과 유가족들의 안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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