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을 듣다
배한봉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는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집 [악기점]에서
바람이 차다.
호박잎 기침하며 돌아 눕는다.
가을이
깊어간다.
그리운 우포늪.......
억새.......
저 홀로 살과 뼈 버리고 있겠지.
바람 찬 세상을 넘어 온
마흔 몇
겨우 마흔 몇.
비우고
비우고.......
아름답게 꽉 채운 여백.
억새 흔들린다.
공명을 듣는다.
버리고
버리고........
마침내 채워라.
늙은 호박이 지붕에서 내려다본다.
툭,
감이 떨어진다.
가을,
너는
어디쯤 가고있느냐.
넘어가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