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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 박영근 유고시집 ㅣ 창비시선 276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평점 :
이사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장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출처- 박영근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 (창비) -중에서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고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시[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취업 공고판 앞에서](1984) [김미순傳](1993) [지금도 그 별로 뜨는가](1997) [저 꽃이 불편하다](2002),
산문집으로 [공장옥상에 올라](1983)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2004) 등을 펴냈으며, 제12회 신동엽창작상(1994), 제5회 백석문학상(2003)을 수상했다.
2006년 5월 11일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했다.
지난 봄 김치 담근 양동이를 냉장고까지 나르는 일이며 간장 달이고 다릴 양동이를 번갈아 들어 나른 휴우증이 [주부과로형 테니스엘보]라는 진단을 오른쪽 팔꿈치에 안겨주었다 휴일이면 간간히 물리치료며 침으로 다스려 오던 것이 장마속에 부쩍 심해졌다 어깨까지 올라오는 통증이 숙면을 방해한 탓인지 잠을 제대로 자는 것도 아니면서 책 한 장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덧글 한 줄 쓰지도 못했다 워낙 시원찮은 왼쪽 팔때문에 고생 많은 오른쪽팔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살짝 위기를 느끼고 집중적으로 침을 맞은 사흘 계속 잠이 쏟아진다 침을 꽂아 놓고도 자고 물리치료중에도 자고 치과 의자에 길게 누워서도 깜박 잠이들어 여기가 어딘가 잠깐 헤매기도한다 오늘 침을 맞으려고 일찍 퇴근 하는 길 바람이 너무 좋다 역시나 비몽사몽속에 침 맞고 찾아 간 방화수류정 바람이 좋다 내려다 보이는 자귀나무꽃이 장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읽는 시 한 편 박영근 시인의 유고 시 [이사] 방화수류정에 딱이다 가슴이 먹먹해져도 여기서 제일이다 가난했던 한 시절이 바람에 흘러간다 어떠랴~~!! 팔도 훠얼씬 부드럽다 이 맛에 산다 바람이 흘러간다 여름이 흘러간다 2007. 7. 14.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