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가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오셔갖고 울고불고 애걸을 하시더군. 어쩌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도 살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안 우러나는지 사람이 죽기 전에 먼저 목석이 되더군. 그런데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부엌으로 나가셔서 밥을 지으시잖아. 이윽고 문구멍으로 뜸들이는냄새가 솔솔솔 들어오는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 정신은여전히 가물가물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데 별안간 뱃속에서 뭔가가 불끈 들고 일어나는 거야. 그래가지고 꼭 성난 짐승같이 요동을 치는데 당최 걷잡을 수가 있어야지. 나종 생각하니 그놈의 짐승이 아마 목숨이었나봐. 나는 그때까지도 사람마음하고 사람 목숨하곤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니까. 마음 따로, 목숨 따로야. 그래서 어머니가 해들여온 밥을 미친년처럼 퍼먹었는데 세상에, 세상에 안 먹고 죽기는커녕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르게 맛있더라니까. 정작 죽을뻔한 건 그때 너무 먹어 관격을 해서였으니......" 그녀는 오랜만에 이렇게 나를 웃겼다. - P96
못 알아들으면 대순가. 우리말로라도 그말을 했을 것이다. 삼천만이 양키 덕을 입는 입장이거늘 그녀혼자 그것을 거슬러 홀로 양키에게 덕을 베풀려 들다니, 그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얼토당토않은 짓인가. 그렇지만 그녀라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그녀가 얼토당토않게도 굶주린 동포의 설움을 분풀이해야 할 책임을 홀로 걸머지기라도 한 것처럼 스낵바 싸진의 팔을 물어뜯었을 때의 그 완벽하게 고독했던 얼굴을떠올리며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거기 대해 외제 장수한테 설명하진 않았다. 그날, 나는 외제 그릇을 비싸다는 핑계가 아니라 가지고 가기가 겁난다는 핑계로 안 샀기 때문에, 그후로는 외제 장수가 우리집을 드나들게 됐다. 외제 그릇은 살 듯 살 듯 하기만 하고 안 사고 기껏 후춧가루나 핸드로션 따위나 하나씩 샀기 때문에 외제 장수의 발걸음은 차츰 뜸해졌다. 그러나 그녀를 통해 무대소 아줌마의 소식은 가끔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싸움이 잦아 내쫓았다고 했고, 그 근처로 이사해서 그럭저럭 산다고했고 워낙 술이 과하던 늙은 양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서 무대소 아줌마가 다시 과부가 됐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외제장수는 발길을 끊었다. 그러고 이렇게 만난 것이다. - P101
"어디 가세요?" 나는 시장 가다 만난 이웃집 아줌마한테 말하듯이 가볍게물었다. "미국. 이 상놈의 새끼들을 어떡허든 사람 만들어야겠기에." "아줌마, 쌍노메 베치는 어떡허구 자꾸 상놈의 새끼래." 나는 그 마당에 엉뚱하게도 그녀의 말을 고쳐주려고 했다. "아냐. 내가 미국만 가봐. 그까짓 혀 꼬부라진 미국 욕 안한다구. 내 나라 말로 실컷 내 나라 욕하면서 살지." 그녀는 미국 가는 목적이 실컷 욕이나 하는 데 있는 것처럼 희망찬 소리로 말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발등을 밟히고도 오히려 "엑스 큐스 미" 한다는 간사한 문명인들 사이에서의 홀로의 무서움증을 욕이라도 하지 않고는어찌 감당할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무에게도 전수되지 않을 고독한 욕을 유일한 밑천 삼아 타국에서 고달프게 부대낄 아줌마를위해서 나는 우리의 욕이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걸 축복스럽게 생각했다. 드디어 그녀도 세 아이를 데리고 출구를 나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도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 P102
"이상해요. 암만해도 이상해요." 아내가 다림질을 하면서 말했다. 단칸방이 다리미의 열기로 끓어오르고, 아내의 목덜미에서도 그의 등허리에서도 끈끈한땀이 끓어오르고, 아내의 목소리도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단칸방을 덮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선 팔월의 햇볕이 비정한 단근질을 하고 있었다. 관상대에선 삼십몇 년 만의 더위라고 말했지만 육십 노인도 팔십 노인도 내 생전에 처음 겪는 더위라고 장담하는 불볕더위가 보름을 넘어 계속되고 있었다. 아내의 정성스러운 다림질에도 불구하고 백 퍼센트 폴리에스테르인 그의 남방셔츠는 후줄근한 꼴을 별로 면한 것 같지않았다. - P135
모레는 상공부와 외무부 두 군데를 뛰어야 하고, 글피는 동창들과 회식이있는 날이고, 그글피는 또 어쩌고저쩌고 그그글피는 또 이러쿵저러쿵...... 아아, 언제까지 전화 목소리는 바쁘다는 핑계를 엮어내릴 것인가. 그의 참을성이 그가 다스릴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려 할 즈음 한결 더 떨어진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받은 날이 일주일 후 토요일 오후였다. 그는 전화 목소리가 둘러대는 구실에 질려서 감히 자기에게 편한 시간은 언제인가를생각할 엄두도 못 냈다. 작은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분주하고 화려한 시간에비하면 그의 시간은 얼마나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것일까. 목소리가 그의 시간 사정을 한 번도 묻지 않은 건 조금도 이상할게 없었다. 그런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시간이란 보다 값진 시간을 위해 언제나 대기 태세로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질서의식이 그를 매우 다소곳하게 했다. 그는 전화 목소리가 문득 잊어버리고 있던 또다른 스케줄을 생각해내면서 황급히 다음주 토요일 오후의 약속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인사말도 하는 둥 마는 둥 전화부터 끊으려고 했다. "사람이 경망스럽긴...... 난 아직 장소도 말하지않았네. 그리고 전화는 어른이 먼저 끊고 나서 끊는 게 아랫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인 것도 모르나?" - P143
고모가 훈계조로 말했다. 그도 아이들이 좀 버릇이 없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면 버릇을 고칠 수 있겠거니 싶어 벼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셋방살이에선 아이를 울리는 것조차 자유스럽지가 못했다. 주인 영감은 더군다나 신경질이 심해 아이들이 칭얼대는 소리만 내도 당장 방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이런 눈치 저런 눈치 보느라 아이들이 끽소리만 내면 오냐오냐 하자는 대로 하거나, 돈 몇 푼 줘서 밖으로 내보내다보니 아이들 버릇이 그 모양이 됐다는 걸 집 지니고 사는 사람이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종길이가 칭얼대는 소리보다도 그 집 식구들의 훈계가 듣기 싫고 아니꼬워 슬그머니 아이의 손목을 잡고 삼촌네를 나왔다. 아내가 안 들어오는게 걱정스럽기도 했고 그동안에 벌써 보고 싶기도 했다. 그가 두리번대며 아파트 현관을 나서려는데 자가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대가 서더니 앞차에선 중년 부부가 두 쌍 내리고, 뒤차에선 아이를 안은 젊은 부부와 청년이 내렸다. 그들은 일행인 듯 서로 어울려서 이산가족이 어쩌고, 우리 몽씨네가 어쩌고 떠드는 걸로 봐서 그를 상면하러 오는 삼촌 사촌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척 그들과엇갈렸다. 아파트 광장을 지나 놀이터가 있는 쪽 벤치에 아내 - P184
와 아들이 꼭 붙어앉아 있었다. 그도 그 옆에 앉았다. "놀이터에 가서 놀렴." 그는 턱으로 놀이터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아이들은 시무룩하니 엄마 아빠의 옷자락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종길이가먼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를 벤치에 길게 눕히고 무릎을 베어주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그의 노타이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잠이 들었다. 어느 틈에 해가 뉘엿뉘엿했다. 아내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주 보이는 아파트의 무수한 창 중 하나가 주황빛 화염을 내뿜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석양빛을 받아 헛되이 불타는 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주황빛은 우울한 잿빛으로 사위었건만도 그는 맹렬히 번지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이미 석양의 반사가 아니라 그의 가슴속에 가득한 분노였다. (1984)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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