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반타공항의 커다란 통유리로 활주로가 보인다. 바깥공기를 쐬고 싶지만 레이오버를 신청하지 않아서 밖으로 나갈 수없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로도 올 때와 같다. 에든버러공항에서 헬싱키 반타공항까지 두 시간 삼십 분 비행, 공항에서 여섯 시간 대기 후 열세 시간 비행하여 인천공항에 도착, 왕복 비행시간만 삼십 시간이 넘고 환승 터미널에서 대기하는 시간도 길어 날짜도 시간도 뒤엉켜버렸다. 몇 시간 전까지 영국에 잠시나마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다. 지금 핀란드에 있다는 실감도 없다. 비행기와 터미널이라는 커다란 공간에 갇혀서 수화물처럼 옮겨지는 기분이다. 이따금 삶에 갇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몸은 성장하지만 정신은 크레바스 같은 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답답함. 나라는 인간은 알맹이 없는 돌멩이, 육체에 갇힌 영혼, 어둠에 갇힌 빛. 존재에 갇힌 영원. 나는 대출금이고 월세이며 생활비다. 속수무책의 감정 쓰레기통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진전 없을 미래가 나의 외피이자 알맹이라고 생각하면 우주 - P239
선 없이 대기권 밖으로, 지구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타들어가겠지. 얼어붙겠지. 산산이 부서져 무한한 공간에서 마침내 자유롭겠지. 천재 과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인류 멸망을 앞두고 남길 단한 문장으로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를 선택했다고한다. 나는 그 문장이 좋다. 나는 원자의 합일 뿐이고 죽으면 홀어진다. 향기는 흩어졌다.
에든버러에서 인천까지 같은 항공사를 이용하기에 환승역에서수화물을 되찾을 필요는 없어 편하다. 비행기에서 사용할 용품만 챙겨넣은 백팩을 메고 대기실을 돌아다니다가 카페에 들어선다. 메뉴판에 적힌 필터 커피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걸로 줘. 베이커리 쇼케이스를 가리키며 직원이 묻는다. 다른 건 필요 없어? 응, 괜찮아. 카드를 건네고 결제를 한다. 커피를 받아들고 빈자리에 앉아 챗지피티 앱을 연다. 앞서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음이많이 아프다‘라는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인공지능에게 마음은 뭘까. 수많은 데이터로 학습한 내용이겠지. 소중한 존재를 잃은 사람에게 건네는 인류 보편의 마음은 ‘많이 아프다‘. 그 감정이 가장 방대하고 상식적이다. - P240
쳇지피티에게 독감의 치사율을 물어본 기록도 남아 있다. 젊온 사람보다 노년층의 치사율이 훨씬 높다는 정보를 보고는 잠시안도했고, 안도해버린 나를 징그러워했다. 이전까지 나는 젊음을믿었다. 젊은 사람은 이겨내는 힘이 더 크고 강하다는 그런 말에기대어 살았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향기는 이겨낼 거라고생각했었다. 그걸 다만 낙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동기화된 추론에 가까웠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에 딱 들어맞는 방향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경향. 내가 원하는 결론은 삶이었고 그것을중심으로 현실을 왜곡했다. 인간은 나약해서 확률에 기댄다. 죽음은 결정되어 있고 삶은 미지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숨이 멎고 몸이 차가워지며 땅에 묻으면 흙이 된다는 건 현실이다. 그 확률은 백 퍼센트,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백 퍼센트의 확률 같은 건 의미가 없다. - P241
소중한 사람을 잃고 같이 울 수 없는 마음. 인공지능은 사람의그와 같은 마음도 알고 있을까. 사실 아직도 실감은 없어요. 언니가 어디 외국에라도 나간 것같고, 평소에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먼저 연락도 안하고, 그랬다. 향기는 별일 없이 연락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핸드폰 액정에 ‘이향기‘라는 이름이 뜬다면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란 걸 바보같이 너무 오랜 시간 모르고 살았다. 언니도 알죠. 우리 언니 완전 계획형인 거. 그 짧은 시간에도 주변 사람한테 전해줄 것들을 꼼꼼하게 다 남겨놨어요. 죽음을 준비했다는 뜻 같아서 마음이 아리다. 내가 삶을 중심에 두고 동기화된 추론을 했을 때 향기가 중심에 둔 건 무엇이었나. 그러니까 언니는 여길 꼭 가야 할 거예요. 로운이 파우치형 파일을 나에게 준다. 내용물을 꺼내본다. 항공권과 에어비앤비 예약 내역을 프린트한 종이 뭉치다. 내년1월 25일에 출발해 2월 1일에 돌아오는 일정,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헬싱키 반타공항을 경유하여 케블라비크공항에 도착하는노선이다. 케블라비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로운이 대답한다. 아이슬란드예요. 로운은 핸드폰의 달력 앱을 켜서 내게 보여주며 이어 말한다. - P247
봐요. 출발하는 날이 설날 연휴 시작하기 전 토요일이거든요. 연휴 끝나는 날이 목요일이니까 언니는 월요일이랑 금요일 이틀만 연차를 쓰면 돼요. 진짜 끝내주는 계획이죠. 여행 날짜가 얼마안 남아서 빨리 주고 싶었어요. 언니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아이슬란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배경인 나라. 향기가 생전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했던 극지. 향기는 엘사를 닮았다. 먼저 손 내밀지 않는 사람. 자기의 선의마저도 상대에게 상처가 될수 있다고 믿는 겁쟁이. 향기는 자기가 꽃을 건네도 내가 뱀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일첩에는 반으로 접어서 스티커로 봉한 편지지도 있다. 혼자 있을 때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편지를 다시 넣다가 파일첩 표지에 붙은 견출지를 뒤늦게 발견한다. 견출지에는 ‘조은빛 행복추구권‘이라고 적혀 있다.
버틴 적이 있다. 첫 회사에서. 내가 가진 건 대학 졸업장과 흔한 자격증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취업이 어려웠다. 서류전형에서만 수십 번 탈락했다. 나처럼 탈락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물론 누군가는 합격했다. 그래서 세상은 제대로 굴러가는 것처럼보였다. 내가 부족할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하지? 따지고들면 너무 많았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일단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야 뭐라도 배워서 부족함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숱한 시도 끝에 한 회사에서 면접까지 통과했다. 일 년 계약직이었고 십 개월 연장 계약이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일 년이라도 일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사수가 나를 싫어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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