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까 언니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밤에 부모님이 싸우면 언니는 꼭 내 옆에 와서 잔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언니도 눈을 떴다. 엄마 아빠 싸웠어? 물어보니 언니는생일 축하한다고 대답했다. 방을 나가자 미역국 냄새가 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냄새가 더 잘 맡아진다. 냄새를 잘맡을 수 있으므로 나는 더 안전하다. 아침을 먹고 언니가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잠이 덜 깬 아빠가 방에서 나왔다. 케이크에 초를 꽂아 노래를 부른 뒤 촛불을 껐다. 나는빨리 십대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우리집 규칙 중에 ‘열살 전까지는 혼자서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나갈 수 없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들 모르게 그 규칙을 세 번 어졌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열 살이 되면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다. - P122

할머니는 내가 역사 수업에서 배운 것을 다 경험했다. 대한 독립과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과 민주화 운동과 IMF 사태와 금융 위기와 대통령 탄핵과 전염병까지. 할머니가 고조선시대에 단군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할머니가 백악기에 공룡을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실은 한 번죽었다가 부활한 거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전부 다 겪어봤으니까. 가난 때문에 나무껍질을 씹어먹었고 풀죽을 만들어 먹었고 홍수로 집을 잃어본 적도 있었다. 할머니의 아빠는 전쟁 때 포탄에 맞아서, 첫째 딸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언니는 교통사고로, 사촌은 불에 타 죽었으며 친구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할머니는학교에 다니지 못했지만 혼자서 한글을 터득했고 산수를 익 - P136

혔다.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해봤다. 그래서 콩나물이영어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길가의 풀과 나무 이름은 다 안다. 천과 바늘만 있으면 옷을 만들 수 있다. 농사일과 집 짓는 방법을 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날씨의 흐름을, 진실과 거짓을 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의 재난에서 탈출할 방법을.
할머니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겨울이 이렇게 포근하면 다가오는 농사가 흉작이다‘고 했을 때도, ‘그 동네 집들은 홍수 때 물에 잠길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도 모두 그렇게 되었다. 할머니는 꿀벌이 집단으로 실종되었다는 뉴스가나오기도 전에 이미 꿀벌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일기예보보다 앞서 날씨를 예측했다. 올해는 감자가 흉년일 거라고 말하면, 배춧값이 금값이 될 거라고 말하면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겁이 난다. 할머니에게 우리 집 상황을 말하고 ‘무슨 대책이 없을까?‘ 물어봤다가 ‘그런 것에는대책이 없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 P137

아빠가 차라리, 앞으로 20년 동안 매달 얼마씩 갚아야 해결될 거라고 말했으면 나도 그러려니 했을 거야. 그래도 핌가 대책이 있구나 생각했을 거고, 우리 집에 빚이 많으니까나도 일찍 돈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거라고. 그런데 아빼는 지금 손에 쥔 걸 하나도 놓지 않고 빚도 갚지 않고 오히려 더 빚을 지면서 살겠다는 거 아니야? 사기당한 걸 투자였다고 완전 정신승리 하면서, 그러면서 또 자기를 피해자라고말하는데, 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빠만 피해자야? 우리가 더 큰 피해자라고. 아빠 욕심으로 벌인 일에 왜 우리 핑계를 대냐고 나야 당장 알바라도 할 수 있다 쳐. 얘는 아직 열 살도 안 됐다고!
아빠 얼굴이 밟힌 홍시에서 자동차 바퀴에 여러 번 깔린 홍시로 변해갔다. 엄마가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리며 갈라진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봄. 그만, 이제 그만해.
아빠는 컵을 꽉 쥔 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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