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랑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한 것이 화장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 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 P32
김연덕
빛에 관한 이 짧은 시를 읽다 보면, 섬세하고 날카롭고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느끼곤 하는 매혹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어온다. 이때의 두려움은 빛과 멀찍이 떨어지려는 두려움이 아니다. 관조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빛나고 싶어" 찾아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기로 한 빛의 끝은, 잡아먹힘 혹은 몇광년 후에야 겨우 멀게 나타날 수 있는 빛. 빛나는 찰나를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암흑 같은 시간들을 떠올려본다. 그 시간들은 절망으로 가득하지만, 시간의 결을 따라 어둠을 반으로 쪼갠다면 은빛을 띤 페니실린 냄새가생생히 퍼져 나갈 것이다. - P33
백은선
청량하게 흐르는 세상이 두려운 까닭은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고 악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겁나는 이유는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삶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일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리라. 그 비천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검게 벌어진 틈을 끝없이바라볼 수밖에 없기에 아름다워질수록 더더욱 겁이 날것이다. 그럼에도 빛나고 싶어지는 마음. 그 마음 또한 진심이어서 이승과 저승으로 현재와 먼 곳으로 계속해서 분열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비밀을 목도한 사람이 감내해야만 하는 형벌이라면우리는 한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고 한 발로만 나아가야 하는 걸까. 영혼의 시차에 멀미를 느끼며 흔들리는 한 그루 나무. 달빛 아래 떠오르는 나무를 생각한다. 나를 불러 세우는 것은 누구이며 돌아보는 나는 무엇을마주하는 걸까? - P34
안미린
한 사람의 시간이 그치고 남겨진 것은 이상할 만큼우리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가볍게 우리로 묶인다. 한사람을 떠나보내는 동안 우리는 거의 처음으로 우리를느낄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한 세계 단위가 된 것 같다. 끝과 처음 어디쯤에 우리가 놓인다. 끝없는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이고, 끝나버린 것들이 끝없다는 생각에 가닿는다. 그 끝에 투명한 바통이 남겨진다. 바통에 손을 뻗듯 고인의 첫 책을 펼친다. 다시 첫책을. 또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을. 우리는 그러고 싶어 한다. 새로운 처음을 보고 싶어 한다. 남겨진 우리 세계를, 끝남이 끝이 없는 세계를 다시 조금씩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한다. 한 사람의 시간이 그치면 연약한 세계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처음인 일이 반복된 지 오래인 것. 투명한 바통이 오가던 무수한 궤적들. 또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을 펼치면서 나는 그리운 미래감感의 흔적을살핀다. 「달빛」에 닿으면, 이 자태에 오래 의지하고 싶어진다. 아득한 빛을 발하는 시의 자태에.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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