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양현이, 가족들 사랑을 한몸에 받는 양현이, 의전학생인 양현이, 시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기생의 딸인 양현이, 집안과는 아무 상관도 핏줄도 없는 양현이, 그런 그가 장중의 구슬 같은 존재라는 것은 분노를 살 만한 일이 아닌가. 집안의 큰며느리로, 그 역시 귀하게 당당하게 자란 처지고 보면, 덕회의 입장에서보면 절대적으로 약자인 양현이 주인처럼 행세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일목요연하게 명희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양현의 고통을 가족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정의 불화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 때문이겠는데 양현의 고통은 참는 것에 있는것이 아니며, 덕회의 악의를 견디어내기 힘들어서도 아니며 서희나 환국이를 기만해야 하는 자신의 태도에 있는 것 같았다. 명희는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춘 양현은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구겨넣어 두었던 것을 꺼내고 보니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 P175
올해 한해만 죽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한다면 내년 봄에는 졸업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간에 양현은 자연스럽게 최씨네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양현은 자유로운 천지를 꿈꾼적이 없었지만 하여간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양현에게 초미의 현실이었다.
‘일년만 참으면 돼. 일년만 꾸욱 참자.‘
양현은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만나지 못한 기간을따진다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만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해서 더욱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 그리움 때문에 자기만을 따돌린 덕희의 처사가 그토록 깊이 상처가 되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덕희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도 지나쳤다 싶었는지 요즘 많이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양현이 명희집에서 잔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사실 덕회는 전전긍긍했다. 명희가 진상을 알게 되고 어른들이나 남편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여간한 낭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