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다는 일어섰다. 찬하는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따라서 나왔다. 집 밖에까지 나왔는데 계속 찬하는 오가다를 따라가는것이었다. 한길로 나왔을 때 전차 탈 생각을 않고 오가다는 걸었으며 찬하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걷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 전차, 움직이는 모든 것에 비스듬히 석양이 걸려 그림자는 동쪽으로 늘어져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쫓아가고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그림자에 쫓기며 간다. 도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무성영화같이 움직이는 것만 보인다. 두 사나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쫓기고 쫓는 차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석양 탓일까, 개인의 선택 탓일까. 두 사내는 길을 건넜다. 서구풍의 건물, 끽다점 앞에서 오가다는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커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집시다." 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끽다점 안에는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병대」였다. 하얀 에이프런에 하얀 모자를 쓴 웨이트리스는 그런대로 신선해 보기가 좋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이들에게 사실 말이란 별 필요가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묘하지만 이들에게는 화해 비슷한 것이었고보다는 신뢰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악수를 하고 이들은헤어졌다. 이튿날 점심을 끝내고 차 한잔을 마신 찬하는 곧바로 서재에 들어가지 않았다. 거실 창가에 서서 뜰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리코는 소파에 앉아서 레이스를 뜨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방은 조용했다. 조찬하의 집은 건평이 오십 평 가량, 화양(和洋) 절충의 단층 건물이었다. 정원은 넓은 편이지만 나무가 너무 - P180
많아 다소 빡빡했다. 수령이 꽤 되는 소나무가 네댓 그루, 서상목(瑞祥)인 매화와 남천(南天燭)도 오래된 나무 같았다. 단풍나무, 향나무, 주목 등 정원수는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정원석에 공간은 대부분 자갈을 깐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단층집이 푹 묻혀버린 듯 눈에 띄질 않았다. 수목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중류에서 상류층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당당한 저택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것이다. 찬하의 처 노리코는 결혼할 때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집은 서울서 보내온 돈으로 마련한 것이다. 노리코가 적잖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친정 혼다게(本田家)가 부유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동시에 이들의 결혼을 축복했다는 뜻도 된다. 찬하가 노리코를 처음 만난 것은 혼다 교수의 연구실에서다. 그때찬하는 연구실의 조수로, 장래가 보장된 것도 희망도 없이 막연한상태로 그냥 머문다는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닌 암담한 시기였다. 형과 명희의 결혼으로 입은 상처도 생생할 무렵이었다. - P181
혼다 교수의 질녀였던 노리코는 이 근처까지 왔다가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 연록색 원피스에 갈색의 모자, 구두를 신고 지갑보다 조금 큰 황금색 백을 들고 있었다. 체격도 늘씬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혼다 교수는 두 사람을 소개했고 그 후 이들은 가끔 긴자 끽다점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영화도 함께 보았으며 음악회, 그림전람회 같은 곳에도 가곤 하여 교제는 꽤 깊어졌던 것이다. 좋은땅에서 한껏 햇볕을 받으며 자유롭게 자란 식물처럼 노리코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독특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오차노미즈여학교를 거쳐 여자대학 국문과를 나온 그는 수준급의 교양과 지식을 구비했으며 자발적이거나 개성이라기보다 주위 환경이 그를 개방적 여성으로 만들었으며, 다분히 외향적인 것이기는 하지만새로운 서구식 물결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사촌 자매들이 권하는대로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골프를 치러 다니기도 했고 화려한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에서 여름을 즐기며 더러는 새로운 여성을 표방하는 강연회 같은 곳에 가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일본 - P181
의 종래 여자처럼 꿇어앉아서 바닥에 손을 짚고 절을 하며 다녀오십시오 돌아오셨습니까, 하고 남편을 대하지는 않았다. 결혼 전과다름없는 생활 태도였는데 그것은 노리코의 의사였다기보다 찬하가 전적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구김살이 없고 천착하고 집요한 성미가 아닌 노리코는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남편도자유롭게 놔두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의혹도 없었다. 상황이 복잡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내적인 것이 섬세한 데다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찬하에게 노리코는 편안한 존재였으며 구김살 없는 그의 성품을 사랑했다. 노리코는 물론 찬하를 사랑했다. 대단히 깊이 사랑했다. - P1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