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은 그 대화를 반추해본다. ‘가슴에 못을 박아놨십니다.‘ 그것은 외로움인가 외로움, 그것은 아픔이다. 외로움보다 더 짙은 한일것이다. 예수의 그것은 더욱 더 짙은 것, 절대적인 것, 그리고 고토쿠에게는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하기는 침묵했어도 외로웠을 것이지만 어떤 형태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모두 사랑이 빚은 외로움이요 아픔인 것은 공통이다. 윤국은 숙이를 바라본다. 몇 번이나 빨랫방망이 밑에서 견디었는가. 숙의 하얀 무명 적삼은 얇고 낡아 있었다. 걷어올린 소매 밑에 드러난 팔목이 가늘다. 저 가는 팔로 매일 부지런히 쉴새없이 일을 하며 그러고도 항상 차림새는 단정하다. 숙이 때묻은 버선을 신고 있는 것을 윤국은 본 적이 없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울지 않기 위해 그런 것 같았다. ‘순결하구나, 들꽃 같구나. 나는 느낄 수 있어, 너 마음이 슬픔에 가득 차서 깨끗하게 씻겨져 있는 것을.‘ 빨래를 끝낸 숙이는 빨래통에 빨랫방망이를 찔러놓고 그것을 머리에 이면서 일어섰다. - P129
남자라는 자각에 주먹질을 당한 것만 같았다. 별안간 자기 자신이 왜소해진 것을 느낀다. 여자라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런 화제에 동요하는 것이 상식이다. 최서희라는 여자는 예외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묘해진다. 대단한 여자다. 구마가이같은 베테랑도 공략하기 어려운 여자다. 서장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구마가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새삼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느낀다. 말이 신랄하다든지 의미가 깊다든지 그런 것보다 서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는 생래적(生來的)인 당당함, 그것이 구마가이를 위압했다. 당당함뿐이랴. 발톱을 감춘 암호랑이같은 영악함이, 언제 앞발을 들고 면상을 내리칠지 모른다는, 그것에는 다분히 선입견도 있었다.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터뜨리지 못하게 서희의 말에는 잘못이 없었고 허식이나 수식이 없다. 허식도 수식도 없다는 것은 괘씸하다. 일본서는 최상급에 속하는 여자를 내보였는데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오히려 불쾌해하다니, 일본이 모욕을 당하였다. 조선 사람 거반이, 친일파만 빼면,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무식꾼조차 일본을 모멸하고 비웃는 것은 다반사가 아니던가. 구마가이 경부는 그것을 모르는 바보인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모멸이나 비웃음은 원성이요 약자의 자위다. 그러나 서희는 원성도 자위도 아닌, 조선의 문화, 그 우월의 꽃 속에 앉아 허식도 수식도 할 필요가 없는, 제 얼굴을 내밀고 있으니, 날카롭고 예민한 사내다. 엷은 그 입술이 상당히 깊게 넓게 느낀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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