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景利의 『土地』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그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갖고서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관념이 조립한 평면적 인물들이 아니라, 집요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욕망의 변주로 생동하는인물들이다. 그들은 물론 한국근대사의 격동속에서 민족의 진로에 충격을 줄 이념의 투기를 온몸을 던져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각각의 선택은 작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꿈틀대는 욕망의 과정이나 결과로서나타난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인간의 욕망을 소설이라는 용광로에 넣고 실험한 세계 유수의어떠한 소설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만든다.
吳生根 서울대 불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화난 건 아니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난 영영 그만일 거야. 내가 부탁한다. 제발 내게 냉정히 대해주어."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다. 오랜 우정에서 우러나는 눈물만은 아니었다. 묵은 신화 같은 것, 세상을 모르고 살던 시절에 꿈꾸던 것,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은 공주가 맨발로 가시밭을 가는 석양, 연한 발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환상, 아픔이 여옥의 가슴에서 눈물이 흐른다. 감상을 배격해왔었고, 그 신화 같은 것에 화살을 날리던 여옥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선택받은 자의 전략은 더욱 처참하다. 불쌍한 아이, 불쌍한 명희, 너의 아름다움과 풍요한 환경과 어리석을 만큼의 순결함, 그런 특권은 너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도움이 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그 특권은 그러나 지금부터네 발목에 물린 족쇄가 되어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 무게는 가는 길을 고달프게 할 것이다. 명희는 당분간 과거를 향해 구원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행과 진주행을 거부했다. 확실한 것은 그것뿐 앞날은 캄캄한 안개, 바람만 불어도 부대끼는 감성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이애, 너도 나랑 함께 전도부인이나 - P106
되지 않겠니? 여옥은 그 말을 하려다 삼켜버린다. "자유에 대한 갈망도 별로 없는 아이였다. 비굴하고 욕심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의욕은 될 텐데… 저건 맹물이야. 저애야말로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 꽃이 되든지 새가 되었든지…… 선표를 끊은 뒤 여옥은 대합실 벽면에 붙은 긴 걸상에 앉았다. 벽면 위쪽엔 바다를 향한 창문이 있었다. 명희는 여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상 끝에 다리를 붙이고 서서 창 밖을 바라본다. 좀 일렀던지 대합실 안이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을 출발하여 통영을거쳐서 오는 밤배는 이미 입항했기 때문에 대합실 밖에서 서성대는 지게꾼들 표정에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더러는 길 건너 점방처마 밑에 팔장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분신인 것처럼 지게를 지고 어쨌거나 부둣가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입항한 밤배로 인하여 시끄러웠던 여운도 남아 있었다. 서서히, 떠날 아침배를타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다. 떠날 사람 전송 나온 사람 짐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산다는 것은 결국 오고 가고, 뱃길이든 육로이든 인생은 길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인 성싶다. - P107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저세상도 황천길. 저승길이라 하지 않는가, 길이 있기에 시간도 있는 겐가. 탄생은 시간을 가르고 나오는 것, 죽음은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가는 것, 해서 정거장이나 부둣가는 대부분 비애스런 곳이나 아닐는지. 영원한 정착이 없듯 떠남도 영원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멀리 점철된 섬위로 흰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날으는 갈매기처럼 삶 자체는 정착도 떠남도 아닌지 모를 일이다. 존재와 길, 그 자체가 애처로운 모순 비극이나 아니었을지, 무의식중에 지나가는 명희 생각이 통통거리는 기관 소리에 끊어진다. 조그마한 고깃배가 굴뚝에서 연기를 폭폭 내어뿜으며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그것도 배라고 너울이 인다. 방천가에 즐비한 전마선 돛배가 흔들거린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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