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 중국의 기악가 사광은 자기 귀를 더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한다. 인간의 간사한 눈이 신음(神音)과 신운(神韻)을 감득하는 일에 번번이 방해물 푼수임을 일찍이 깨달은 극기(克己)의 자해(自害)이다. 참다운 예술의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고사(故事)가 아닐 수없다.
먼 사광이 아니더라도 朴景利 선생을 볼 때 나는 너무 작품을 쉽게 쓰지 않나 하는 자책감에 빠질때가 많다. 『土地」를 두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선생께서 이때껏 일상으로 지켜나온 철저 (徹低)극한 창작 자세에서 분명히 자기 눈을 무수히 찌르고, 찌른 만큼 또 무수히 스스로 장님이 되는 사광의 면모를 볼 수가 있어 진정한 예술가의,
빼어난 문학인의 한 전형으로서 서슴지 않고 나는 朴景利 선생을 꼽는다.
——尹興吉作家 - P-1
"글쎄올시다. 원한이 깊을수록 뱀처럼 지혜로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럴 법한 말이긴 하나.....?"
하고는 공노인 말을 뚝 끊었다. 행여 환이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겁내는 표정이 되어서. 왜 공노인은 별안간 환이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그 자신 의식하지 못한 일이나 그것은 상민의 피, 공노인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상민의 피 탓이다. 김개주의 아들이라는 확신때문이다. 저 준수한 젊은이가 김개주의 아들이라니 김개주는 영웅이다. 상민의 영웅이다. 이조 오백 년을 들어엎으려던 그를 사람들은 살인귀라 하였다. 압제자의 목을 추풍낙엽같이 날려버린 살인자, 살인귀건 흡혈귀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이건 그는 핍박받아온 백성들 가슴에 등불로 살아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서울로 압송한데 반하여 김개주는 위험인물이라 하여 체포 즉시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 위험시한 만큼 상민들 가슴에는 낙인처럼 뜨겁게 남아 있는 풍운아 김개주, 그 반역의 피를 지금 눈앞에 있는 아들에게서 본다. 반역의 피는 모든 상민들의 피다. 양반댁 유부녀를 데리고 달아난 것도 반역의 피 때문이다. 반역의 피는 억압된 상민들의 진실이요 소망이다. 수백 수천 년의 소망이다. -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