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가 그놈을 찢어죽이지도 못할 기고 망신은 우리만 당할 긴제 이런 일일수록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거고 분한 생각보다 와내 자석 앞길을 먼지 안 생각는고? 당자밖에 모르는 일을 에미가들어 동네방네 외고 댕기겄다 그 말이가?"
"아이고 으흐흐......
이 죽일 년이 찾아 나갔이믄서도 마실만 간줄 알고 으ㅎㅎ.
이 일을 우짤꼬."
제 가슴을 치고 소리를 죽이며 운다.
"내 말 단단히 멩심하라고. 옷부터 갈아입히고 차근차근 전후 사정을 물어보소. 저방 아아들 깨믄 안 될 기니 자식 하나 살릴라카거든 입 딱 다물고."
중풍 든 늙은이처럼 봉기는 팔을 떨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마루에서 또 말했다.
"임자, 아아 옆을 떠나지 마소."
"야. 으흐흐......"
봉기는 초롱을 들고 허둥지둥 걷는다. 우물 앞에까지 온 그는 초롱을 들이대며 샅샅이 살펴본 뒤 수수밭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도중에 미투리 한짝을 발견하고 얼른 그것을 집어든다. 초롱은 다시 수수밭을 헤치고 들어간다. 현장, 난행의 흔적이 역력한 곳에 봉기는 멈추어 섰고 초롱만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흰 수건이 떨어져 있고 미투리 한짝도 엎어진 채 굴러 있었다.
"으흐흐......"
곰같이 미련하고 뱀같이 간교하고 돼지같이 욕심꾸러기인 사내가 울음을 터뜨린다. - P243
부글부글 끓는 도수가 올라가면 제 마음대로 시간을 갖는 것도, 우울해 있거나 시무룩한 얼굴을 보이는 것도 반항으로 받아들인다.
봉순의 요즘 행동거지가 다소 이완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역으로혹은 반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날이 선 서희 신경에 더 많은 원인이 있다. 이럴 때면 반드시 길상이나 봉순에게 의지하는 자기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것을 상상할 때서희는 참을 수 없는 곤욕감에 몸을 떤다. 무조건 복종이면 복종이지 친근감을 갖는 것은 싫어한다. 동정하고 보호하는 기분을 가진다는 것이라면 더더군다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저희들한테 무슨 능력이 있다는 것이냐, 아랫것이면 아랫것답게 내 명령을 좇으면 될 일이지 주제넘게 누굴 보호하며 누굴 감싸겠다는 것이냐, 수동이가 죽었기로, 머슴 한 놈이 죽었기로 내 자리가 흔들린단 말이냐, 나라가 망하여 왜놈이 땅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야누구든 백성이면 하는 것, 왜놈이 득세한다고 조가(趙家)가 최참판댁을 삼킨다는 그 따위 이야기는 또 뭣인고? 임금님이 산송장이되셨다고 나도 산송장이 될 거다 그 말이냐? 그래서 나를 가엾게여긴다 그 말이냐? 이 나를? 아랫것인 주제에 나를 가엾게 여겨?
서희의 기분은 그러했다. 옛날에는 네가 죽으면 나는 어쩌겠느냐고봉순이한테 더러 어리광도 피우던 서희였건만.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