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장옥거리에서부터 산책을 시작했다. 1층은 가게 2층은 가정집으로 꾸려진 전형적인 주상복합건물로 이루어진 거리다. 일제는 진해 군항으로 만들면서, 이렇게 건물들까지 획일적으로 짰던 것이다. 내가 바삐 도로를 오가며 건물을 사진에 담자, 엄마가 한참 보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1960년대만 해도 이런 거리가 진해 곳곳에 있었어. 내겐 너무 익숙한풍경인데, 네겐 낯선가보구나. 익숙한 것들도 스러져가면 어느 순간 낯설어지고, 더 희귀해지면 아무도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마는가봐. 하기야.... 사람도 그렇지." 나는 마지막 말을 잡아챘다. - P81
"사람도 그렇다고요?" "응. 늙는다는 건 낯설어진다는 거야. 그리고 끝내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되지." "하나님이 가르쳐주진 않으시나요?" 엄마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앞서 걸었다. "안다고 다 알려주시진 않아." - P82
단 한 번도 이야기가 바뀌지 않은 적이 없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머릿속에 구상을 완벽하게 했다고 판단한 후 집필을 시작하지만, 문장들을만들어 밀고 가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길이 하나뿐이라고 여긴 대목에서 두 갈래 세 갈래 네 갈래 길을 만나면, 처음엔당황하고 그다음엔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기서 예상하지 않았던길로 들어서면, 미리 잡아놓은 구상들이 상당 부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바꾸지 않으려고 버텨보지만, 결국 바꾸게 된다. 갈림길이생겼다는 것부터가 첫 구상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니까. 때론 갈림길이 작품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작품 밖에서 던져질 때도 있다. 『엄마의 골목은 후자였다. - P97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20년 아침 집필을 이어왔다. 클래식에 정통한 작가들도 많지만 내겐 평생 이 곡이면 충분하다 여겼다.「거짓말이다」를 쓸 때는 첼로 대신 빗소리를 택했다. 선율조차도 문장을 만들 때 부담스러웠던 걸까. 유튜브를 살피다가 백색소음 중에서 빗소리만 두 시간 남짓 모아놓은 걸 발견했다. 그걸 두 번 반복해서 들으며소설을 썼다. 맹골수도 근처 바다로 떨어지는 빗줄기들, 동거차도와 서거차도의 바위들을 두들기는 빗줄기들, 팽목항 등대 곁에서 하염없이바다를 바라보고 선 이들의 어깨를 때리는 빗줄기들, 그들을 상상하며소리를 문장으로 옮기는 내 목덜미를 흔드는 빗줄기들. 오전 네 시간을쓰고 나면, 온몸이 흠뻑 젖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샤워부터 했다. 아무리 씻어도 몸에서 갯비린내가 났다. - P142
이 책에 담긴 모든 문장의 주어는 엄마다. 어떤 이는 이 글이 기행문이되기엔 부적합하다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소설로 삼기에도 어울리지않는다고 할 것이다. 자전소설쯤으로 타협을 보려 할까. 어떻게 불리더라도 모든 문장이 엄마를 중심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가 겪은 사실도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도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상상한 것들도 엄마를 이루고, 엄마가 느낀 것들도 엄마를 이룬다. 그 전부가 엄마다. - P157
잠든 엄마 얼굴을 머리맡에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죽은 엄마 얼굴도 이러할까. 잠든 얼굴과 죽은 얼굴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질문 두개가 연이어 떠올랐을 때, 엄마가 눈을 떴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엄마는 처녀처럼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죽음이란 단어를 걷어내기라도 하듯.
엄마는 가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곤 했다.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체했다. 새벽 기도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난 엄마가 잠든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볼 때,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뒤에 서서 내 등을 쳐다볼 때, 허겁지겁 밥을 퍼 나르는 숟가락과 내 입을 볼 때도 있었다. 머리를 감고 수건으로 닦는 나를,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나를, 책을 읽는 나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를, 그런 나를 엄마는 바라보았다. 하염없이‘란 네 글자를 이해하는 찰나! - P171
엄마가 죽고 아들이 죽은 후에도 골목은 남을 것이다. 100년 동안 진해도 많이 바뀌었다. 부산 쪽으로 확장된 평지에 들어선 아파트들을 보면, 어린 시절 논밭이던 창원의 들판에 쑥쑥 들어서던 아파트들에 놀라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다. 그렇게 새로운 동네는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엄마가 걸었던 골목, 내가 걸었던 골목, 엄마와 내가 함께 걸었던골목은 또 그것들대로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 P174
"책 내고 그 질문 정말 많이 받았어요. 대답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했고, 그 답들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그런데 딱 맞는 정답은 나중에찾았어요. ‘함께 가만한 당신(최윤필, 마음산책, 2016)이란 책의 발문을쓰다가 이 문장을 적은 다음, 「거짓말이다』를 쓴 이유가 바로 요거네 하고 깨달은 겁니다." "어떤 문장인데?"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은 다른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일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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