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부분에서 난 어떤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최고의 발리나들이 이 장면을 춤추는 영상을 빠짐없이 공부했다. 실비 길햄은 누구보다도 더 높이 다리를 든 아름다운 아티튀드 데리에르자세로 여덟 카운트 동안 회전했다. 그런 다음 앙 푸앵트 부레로 전환하며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프랑스 전형이자 파리 오페라 특유의무척 차분하고 세련된 느낌이 연출되었지만, 민감하고 투명하며 순수한 소녀 유령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홉 카운트 또는 열 카운트 동안 회전한 뒤 드미 푸앵트 셰네로 빠져나오는 무용수들도 있었다. 위험 부담도, 광적인 효과도 훨씬 덜한 전환이었다. 나는 아티튀드 데리에르에서 열두 카운트 동안 회전하고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바로 풀 푸앵트 셰네로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달빛 아래서 마법에 걸린 채 무아경에 빠져 정신없이 발을 놀리는정령의 모습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내 도전은 브라뷰라 그 자체였는데, 여태 이 배역은 브라뷰라보다 서정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건 지금껏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테크닉의 극치였다. 마음속엔 나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를 넘어서고 싶다는 익숙하고 - P317
도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공연 엿새 전까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전할 때의 어지러움, 발의 통증까지 모든 것이 나를화나게 했다. 한 시간 동안 홀로 힘겹게 연습한 끝에 나는 지쳐서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피곤하고 지친 얼굴을 한 사샤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지난밤그가 파티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자고 있었고, 내가 아침 일찍집을 나설 땐 그가 아직 자고 있었다.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지도, 웜업팬츠를 고쳐 입지도, 스테레오로 걸어가지도 않고 그는 곧장내게 와서 옆에 앉았다. "나 이거 못 할 것 같아." 나는 팔뚝으로 두 눈을 덮으며 사샤에게 말했다. "내 마음대로 춤이 안 춰져. 이런 적은 처음이야. 필요한걸 다 갖게 되자마자 늘 가지고 있었던 하나를 잃어버렸어." - P318
"너 결혼했다고 얘기했지? 그래도 그래?" "당연히 했지. 상관없대. 내가 받아야 하는 사랑을 안드류샤는준대 안드류샤에게 난 인생의 여러 요소 중 하나지만, 그에겐내가 전부래. 그는 내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다." "너를 사랑하는 것 외에 인생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비꼬지 말라고 나무라는 듯 니나가 나를 어두운 눈초리로 쏘아본다. 그 표정이 니나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그 남자에게 더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내 니나가 찡그리던 눈썹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쉰다. "정답이 ‘아니오‘라는 건 알겠어. 근데 왜 안 되는지도 모르겠단말이야." "정답은 없지.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괜찮아." 내가 니나에게 몸을 기내자, 우리 몸무게를 떠받친 소파에서 끼익 소리가 난다. ‘내가 선택하고, 느낄 수 있는 걸 느끼고, 네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사랑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돼. 그게 인생의 전부니까." - P321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복귀 날짜를 정하지 않은 채 춤을 완전히 중단했다. 무용수들이며 스태프, 로랑, 물론 사샤까지 모두가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이런 벽에 부딪히게 될 날을 평생 두려위하며 살았는데, 막상 부딪히자 나도 모르게 은밀한 안도감이었다. 주당 40시간씩, 1년에 50주 동안 춤추는 대신 드디어 나에게도 휴식이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육체적으로만 지진 상태가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지젤>이 나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여태 나는 내 인간성을 예술에 쏟아붓는 일에 익숙했다. 그래야만예술이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은 나 자신을 갈가리 찢어서 춤에 녹여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는 걸 몰랐다. 진정한 예술이라면 그예술이 내 안에 들어와 영원히 내 일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지젤>을 통해 내 안에 새로이 자리한 이 부분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그저 나타샤로서 인식할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온전한 내가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었다. - P323
"여기서 내가 아는 언어를 찾으면 좋더라. 꼭 누가 나한테 그 말을 건네는 것 같아서." 나와 눈을 맞추며 레옹이 말했다. ‘아버지한테저 말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내가 아버지에게 말해본 적도 없고" "나도." 나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니콜라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지, 여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 자신 밖에 있는 무언가를 고민하고 되씹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삶을 살았고, 그중 극소수가 자신의 삶을 직접 창조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세계‘를 창조했다. "사실, 남자가 여자를 속이려고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오해야. 대다수의 사람은 그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거짓말을 하진 못하거든." 나는 말을 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하는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그만큼 고통스럽지. 사랑을 참으면, 정말 못 빠져나가게 한다면 마음이 산산조각 날 테니까." - P365
먼저 손가락을 하나 까딱 움직여 본다. 그런 다음, 눈꺼풀이 들리는지 시험해 본다. 하나하나 몸이 말을 듣는 걸 확인하고 게걸음으로 엉금엉금 욕실에 기어 들어간다.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물이 다시 한번 작은 기적을 일으킨다. 전보다 힘이 생긴 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로션을 바르고, 깨끗한 레오타드와 웜업 운동복을 입은 뒤 아침을 조금 먹고서 극장으로 향한다. 무용수들은 공과 사,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배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심하게 야단치며 평소처럼 틀리지 말고 완벽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드레스 리허설 도중 넘어졌는데 곧바로 공연 무대에 올라야할 때, 끔찍하게 싫은 파트너와 춤춰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신경이약한 사람, 춤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보다 춤을 우선시했다. 춤이 없으면 내 인생의 어느 감정도 의미 없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여태그렇게 믿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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