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오후 열한시 오십사분 남태령. 마중 나간 사람들. 배웅까지 완성한 사람들. - P56
12월 23일 월요일 오전 한시 십육분 지난주 토요일 12월 21일. 광화문 비상행동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집회에 참석했다가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의 고립 소식과 연대 요청을 들은 사람들이 남태령으로 갔다. 서울시 경찰력에 가로막힌 트랙터와 농민들을 마중하러 간 사람들이 그 추운 고개에서 꼬박 밤을 버텨 막힌 길을 열었다. 2024년 12월 22일 일요일은 서울 근처만 오면 더는 전진하지 못하고 늘 가로막혔다는 전농의 투쟁단이 처음으로 남태령을 통과한 날이다.
남태령을 어떻게 일기로 옮길까. 뭐라고 쓰든 남태령에서 나온 말들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남태령 소식을 들었다. 내가 습관적으로 체념한 자리에 찾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 P57
이 그 자리를 지켰고 막힌 길을 뚫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다 거기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단편을 쓰려고 가지 않았다. 실시간 영상으로 현장의 말을 듣고 눈으로는 원고를 보면서 내 늙음을 돌아보았다. "전농이 지금 남태령에 와 있다." 나도 그날 광화문에서 그 말을 들었는데, 그게 되지 않을 거라고 먼저 믿는 마음, 보고 들은 바대로 학습된 포기. 부끄러웠지만 오늘은 그 부끄러움이 기꺼웠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마음들.
이미 그런 마음들이, 이 강렬한 정치적 국면에 광장으 - P58
또 나왔다가 다른 광장으로 번져간 게 아닐까. 2016년과는 비교되지 않는 속도로 광장이 진화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아마도 이 사태 초반부터 광장을 채운 다수 구성원의 영향일 것이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여성들. 그들은 계엄 이전에도 이미 정치적이었지. 삶이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겪으며 살아왔고 바로 곁에 있는 다른 여성의 삶으로도 보고 듣고 배우며 살아오지 않았나. 이 탄핵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남태령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경이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 P59
12월 25일 수요일 오전 아홉시 삼십팔분 가수 하림이 어제 광화문 무대에서 「별에게」를 불렀다. 성탄 전야에 광화문 앞에 서서 이 노래를 들었다.
하림은 어떻게 이 노래를 불렀을까. 어떻게 다 부를까.
너무 고마운 사람. - P60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사람의 다면성을 이야기하며 악을 고민하는 글을 읽을때마다 그 내용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바로 곁 여백에 연필로 부기한다. 타고나는 걸 나는 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 P66
그건 자연. 그보다는 사람이, 사람들이 어쩌다 혹은 의지를 가지고하는 일. 멍청하게. 그중에 악이 있다.
종일 뉴스를 듣는다. 오늘, 어쩌면 어제, 어딘가에서 들은 말. 최종적으로는 "개개인의 양심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상황" 그런데 어떤 양심들의 상태가 내 예상이나 기대보다 처참하다. 그걸 목격하느라 매일 지치고 다친다. 기운을 너무잃지 않으려면 거리로 나가 사람들 얼굴을 봐야 한다. 이게옳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듣고 그들 곁에서걷는 일이, 그런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일이내게 필요하다. (내란 옹호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도 이러하면 어쩌지.) - P67
12월 29일 일요일 오후 네시 오십구분 전남 무안공항에서 제주항공 소속 항공기 사고가 났다. 보잉 737기. 181명 탑승. 랜딩 기어가 내려오지 않아 활주로를 몸체로 밀고 가다가 벽에 충돌했다. 항공유를 버릴 틈도 없어 폭발이 컸던 것 같다. - P74
12월 31일 화요일 시간기록없음 올해 마지막 날 예정된 비상행동의 탄핵 집회는 취소되었다.
끝까지 항공기를 멈춰보려 애쓴 기장의 마지막 모습이불쑥불쑥 생각난다. 희생자들. 유가족들. 올해 세밑이 너무나 가혹하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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