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하는 모과


모과 낙과를 생각하며 모과나무 아래를 서성이다

모자란모과 낙과를 모과나무뿌리 가까이 모아두는 마음

모과 낙과는 늦된 가을장마에 얼굴을 떨구고
모과 낙과는 흙에 얼굴을 묻고 눈과 귀를 묻고

몇개나 남았을까, 단풍 든 잎들 뒤에서 노랗게 익어가는모과를 헤아려보다

넌 고집 센 고독이구나, 그러니 저만치의 징검돌이겠구나, 기꺼이 모과에게 손 내밀어보다

모과나무가 떨군 모과 하나를 방에 들여놓고 모과 향기에부풀던 그 가을을 기억하는 내내

긴 기다림에, 바닥을 친 모과가 멍들었다

마지막 모과가 떨어진 겨울부터 - P68

모과잎이 돋고 연분홍 모과꽃이 피고 다시 마지막 모과가떨어지기까지

모과는 모과라서
모과는 모방하는 이름이라서

끝났으나 끝내지 못한 채
다른 사랑의 후렴을 모방하듯

오늘도 모과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마음 - P69

두부 이야기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 P72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밤새 이야기는 그렇게 쏟아지고 불려져
아침의 너는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 P73

곡우


산안개가 높아지더니 벌레가 날아들었다
어치가 자주 울었고 나도 잠시 울었다

별 짙고 소리 높고 기척도 멀어졌다
질 것들 가고 날 것들 오면 잊히기도 하겠다

발 달린 것들의 귀가 쫑긋해지고
발놀림도 분주해져 바깥들 기웃대겠다
밥그릇에 밥풀도 잘 달라붙고
꽃가루에 묻어온 천식도 거풍되겠다

오는 서쪽 비에 가슴이 먼저 젖었으니
가는 동쪽 비에는 등이 먼저 마르겠다

계절도 사랑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간다

저물녘이 자주 붉고 달무리도 넓어졌으니
아침이면 젖은 발로 마른 길 갈 수 있겠다 - P82

여름 이야기


아이스커피 잔에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지자
하지의 저녁 창에 소나기가들이쳤다

급히 닫힌 창안은 꽃 속인 듯 깊고

창에 맺힌 빗방울이 폐포처럼 벌떡이다
물 끓는 소리를 내며 가쁘게 흘러내렸다

찬물에 해동되는 굴비가 비릿하고
한소끔 끓어오른 아욱국이 자욱하고

식탁엔 숟가락과 젓가락이 기다랗고

세찬 비는 흠뻑 젖은 귀갓길 신발들을
서, 서, 서, 창안으로 다급히 쓸어 담고 - P90

언니야 우리는


우리는 같은 몸에서 나고 같은 무릎에 앉아 같은 젖을 빨았는데

엄마 다리는 길고 언니 다리는 짧고 내 다리는 더 짧아
긴 다리에 짧은 다리들을 엇갈려 묻고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사만사 다만사, 조리김치 장독간, 총채 빗자루 딱,
한 다리씩 빼주고 남는 한 다리는 술래 다리

언니야 우리는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아버지와 오빠들과 살았는데
너는 언니라서 더 굵고 나는 동생이라서 조금 덜 굵고
남자들을 위해 씻고 닦고 빨고 삶고 낳고 먹이느라 엄마처럼 하얘지도록
너는 언니라서 더 꿇고 나는 동생이라서 조금 덜 꿇고

우리는 같은 가족으로 자라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 P91

남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손자국을 남기고 어떤 무릎을 요구했는지
남자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어깨를떠밀었는지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서로에게 어떤 자물쇠를 채웠는지

너는 먼저 나서 잘 싸우고 나는 나중 나서 더 잘 싸우고
너는 먼저 피 흘려서 곰이 되고 나는 나중 피 흘려서 늑대가되어

그래 우리는 같은 성으로 살며 똑같이 결혼을 하고 똑같이 아이들을 키우며 또 같이 울었지

공깃돌을 줍다 빨래하러 가자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진 내 손을 붙잡아준 네 손
오래 매달리기를 하다 팔이 빠진 나를 등에 업어준 네 손
나란히 엎드려 팝송을 듣고 일기와 편지를 쓰고 생리대를나눠 쓰던 우리 두 손
늦은 밤이면 굳게 잠긴 철대문을 몰래 열어주던 서로의 - P93

손을 붙잡고

그래 언니야 우리는 같은 엄마의 여자였고 서로의 엄마였어 그러니까 서로의 애기였고 서로의 얘기였어

너는 언니라서 더 지치고 나는 동생이라서 덜 지치고
너는 맏딸이라서 더 외롭고 나는 막내딸이라서 덜 외로웠을 뿐
더 더 외롭고 더 더 지친 엄마 다리에 네 
다리와 내 다리를엇갈려 묻고 마주 앉아
퉁퉁 부은 서로의 다리에서 한 다리씩의 어둠을 뽑아
무청 같은 날개를 달아주며

애기 새들처럼 목청껏 한소리로 노래하지
니다리 내다리 짝다리, 천근만근 무다리, 주홍마녀 유리천장, 강물 파도야 싹, - P93

시인의 말


한 날개는 금세 도망칠 쪽으로
한 날개는 끝내 가닿을 쪽으로

기우뚱,

날개 밖 풍파의 서사를
날갯짓의 리듬에 싣고
깃털까지 들썩이는
그 새에 대해

누가 노래할까?

다행이야
응, 아직 울 수 있어서

2023년 5월
정끝별 - P146

정끝별의 시들은 자못 인간에 닿아 있다. ‘절절하다‘는 의미가없어질까 ‘파인다‘라는 말이 사라질까 애가 끓고 잠을 못 이룬다. 그는 시를 조각하지 않는다. 별의 날로 친다. 정끝별의시에서 풍기는 비린내를 좋아한다. 내 속에서 올라오는 소리와 통증이기도 하여서 그의 시에 내 얼굴을 여러번 포갠다. 이시집은 진실을 향한 안간힘으로 발톱을 오므려 세우고 있다.
이 도저하고도 낭창낭창한 슬픔을 태워 질그릇을 구워내다니 슬픔을 다듬는 냄새가 이리도 아름답게 낭자하다니. 시인에게 ‘슬픔의 해체사‘라는 벼슬을 주고만 싶다. 어찌하여서 이시집은, 누대에 걸쳐 승계된 풍경의 슬픔을 장엄히 지난 우리를 마침내 복종이라는 거대한 슬픔 안으로 입국하게 하는가.
이 시집을 덮고 나서도 슬픔을 끊어내지 못할 거라면 그때는슬픔을 측정해야 한다. 정끝별은 이 시집으로 인류의 발굴 안된 새 슬픔을 발굴해냈다. 시집 이상으로 쌓아올린 ‘시집‘의출현이다.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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