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196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여섯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시쓰기와 평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이가」「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디폴트값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
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 P10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걸까 죽은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너일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 P33

너였던 내 모든


심장이
몸 밖에 달렸더라면
네 마음을 더 잘 보았을 텐데

뿔이
눈 아래에 돋았더라면
네가 덜 아프게 찔렀을 텐데

그 뿔에
손이라도 있었더라면
네 상처를 더 어루만졌을 텐데

아니, 생각이
나보다 먼저 잠들기만 했어도
너와 더 오래 한집에 머물렀을 텐데

그 집에
바퀴라도 달렸더라면
가출하지 않고도 달아났을 텐데 - P64

그니까 사랑을
볼 수만 있었더라도
서로를 안을 때 그리 파고들지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우리도 없었겠지?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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