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삶은 그대로 시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다정했으며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것은 이 시대의 한국인 누구나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시의 거의 유일한 작자가 신경림 시인이라는 점이다. 첫 시집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 라고 노래한 때로부터 이번 유고시집에서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마을/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고추잠자리」라고 자신의 고단한 인생을 돌아보기까지 그는 한결같이 곧은 자세, 낮은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했다. 앞으로 이와같은 의미의 국민시인이 다시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 P10
해 질 녘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 P11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복사꽃 살구꽃이 피어 흐드러지고 안개를 뚫고 햇살이 스민다. 나는 먼 나라, 더 먼 나라로 가는 꿈을 꾸면서, 당신과함께 나의 스물에
종일 나는 거리를 헤맨다. 문득 기차를 타고 가다가 산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모차르트를 듣고 트로츠키를 읽는다. 당신의 눈빛에서 꿈을 놓지 않으며, 당신은 나를 내 나이 서른으로 이끌고 가고.
세상은 어둡고 세찬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나는 집도 없고 길도 없는 사람. 달도 별도 없는 긴 밤에, 빈주먹을 가만히 쥐어보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당신은 나의 마흔에서 온사람,
조금은 서글퍼서 조금은 아쉬워서, 몇발짝 뒤처져 남을 따르면서,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다가. 마침내 체념하고 돌아설 때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은 나와 나이 쉰도 예순도 더불어 하면서. - P12
이제 내 곁에 와서 있다. 내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상의 기쁨을 알게 하면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세상의 아픔을 보게 하면서 내 빛과 그늘을 모두 꿰뚫고서, 당신은 시간을달리는 사람. - P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