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낫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병명을 모르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다. 치료법을 알 수 없어서 힘들었다. 모든 의사들이 다 괜찮다고 해서 화가 났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지? 언제쓰러질지 모르고 언제 소리를 지르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방법을 당신들이 말해줘야지. 그래서 찾아온 게 아닌가. 원인을 알고 싶어서, 병명을 찾고 싶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싶어서! - P172
그런데 다들 왜 내게 묻는가. 어디가 문제냐고.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그게 지금 의사가 할 소리야? 그러나 나는 병원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매달렸다. 네, 선생님 스트레스가 심해요. 제 날개뼈 아래에 괴물이 살거든요. 그 괴물이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요.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도 내지 않아요. 하지만 있답니다. 선생님은 저를 믿어주셔야 해요. 그놈은 제 살점을 찢고 고개를 쳐들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제 몸속을 쪽쪽 빨아먹고, 제 비명에 즐거워하며 몸집을 키우죠, 선생님, 잠재워주세요. 나오지 못하게해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나오게 해주세요. 끄집어내주세요. 나는 또 병원을 바꿨다. 대학병원으로 갔다. 간신히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았다. 정말로 간신히. 왜냐하면 섬유근육통의 전형적인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P172
내가 호소하는 통증의 강도와 느낌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했다. 그러니 통증을 줄이는 약을 복용해보자고 했다. 그래 결국은 또 진통제였다. 그러나 안심이 됐다. 섬유근육통이라. 신경통보다 훨씬 구체적인 병명이지 않은가. 희망이 생겼고, 기운이 났다. 뭐든 해보자 싶었다. 진짜 끝까지 노력해보자. 그래서 정갈한 식사를 했다. 깨끗한 음식. 엄마가 말하던 그런 음식들. 푸른 잎사귀와 과일, 잡곡밥, 콩, 두부, 등푸른생선과 버섯. 하루에 만 보 이상 걸었고, 명상도 했다. 나비 약도 완전히끊었다. 폭식과 절식을 그만뒀다. 7시간 이상 잤고,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썼다. 감사한 일에 대해 썼다. 어제 충분히 잤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게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통중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었다. - P173
나아졌다. 하루 수십 번 찾아오던 통증이 두어 번으로 줄었고, 8 정도의 강도가 2로 낮아졌다. 내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그래서 안심이 되었는지 태인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와 함께 있으면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고기나 기름진 음식도 먹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화목했다.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년. 아니 8개월? 의사가 말했다. "이제 약을 끊어봅시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완치였다. 그래! 완전한 회복! 내가 드디어 해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벽, 나는 눈을 떴다. 아팠다. 8 정도의 통증. 아니, 9 정도의 통증. 아니, 10! 나는 소리를 질렀다. - P173
이후로는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약의 복용량을 늘리고 횟수를 늘리고, 부작용을 겪는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을잘 수 없다. 병원을 바꾼다. 다시 검사를 받는다. 결과는 정상이다. 내게는 어떤 문제도 없다. 새로운 약을 시도해본다. 정신과 약이 추가된다. 새로운 의심들도 추가된다. 계속 추가된다. 디스크, 자가면역질환, 과민성대장증후군, 불안장애로 인한 신체화 증상. 운동 부족. 과긴장성 골반저기능장애, 나중에는 꼭 통증만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잠을 자지 못하자 면역력이 떨어지며 온갖 질병이 따라붙은 것이다. 감기, 몸살, 만성피로, 방광염, 구내염, 질염, 안구건조, 먹는 약이 계속 늘어난다. 20알, 30알, 단약과 재복용을 반복한다. 부작용과 금단 현상을 오간다. 소화불량, 오한, 설사, 두통, 구역감, 탈모, 현기증, 섬망, 심계항진, 근육긴장, 불면증, 과호흡. 환각, 이중 무엇이 부작용이고 무엇이 단약 증상인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도 딱 하나.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증상이 있다. 폭식. 통증이 올 때마다 함께 밀려오는 역겨운 충동. 식욕. - P174
그래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영원히 잊지 못할 잔혹한 기억하나를 봉인했다. 그들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연인을 보며 그때 일을 떠올려서는 안 되었다. 연인이,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그 기억 위에 다른 기억들을 덧씌웠다. 대화, 섹스, 다툼, 여행, 입맞춤, 포옹, 다툼, 화해, 동거....... 사랑에 사랑을 덧씌우며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지켰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절대로10월 26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연과 이영은 서로의 약점을 모르게 됐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불가항력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찰나. 어느 순간, 함부로 떠오르는 기억. 아니, 기억을 불러들이는 어떤 것들. - P270
돼지 같은 년.
그 순간, 수영장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수치심을 느꼈던 것같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볼품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다 함께 박지수에게 수치심을 떠넘겼다. 그래. 분명하다. 그래서 박지수가 떠난 것이다. ‘우리‘를 떠나 먼 곳으로 걸어갔다. 25미터 레일 끝으로,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 그날 그 사건 이후, 박지수의 등에 붙어 있던 수많은 말들은 결국 지연이 불러들인 악마들이었다. 친구가 죽든 말든 가만히 서 있던 년. 움직이지도 않던 년, 친구도 아닌 년, ...... 생각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다. 지연은 단숨에 녹차를 들이켰다. 나는 언제쯤 참을 줄 알게 될까.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이되고 싶다. 지연은 해가 저무는 풍경을, 도시의 풍경을 응시했다. 기억 - P276
은 계속 떠올랐다. 사고를 당한 후, 전교 1등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수술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그게 지연이 아는 전부였다. 졸업 후 부모님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되었으니까. 안진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종 화를 참을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소리를 지르게 될 때, 지연은 계속 그 수영장으로 되돌아갔다. 전교 1등. 친구가 많던 아이. 이영이 예뻐하던 아이, 지수도 그아이를 좋아했지. 마치 공주처럼 대했지. 지켜줘야 하는 사람처럼. 그래. 분명히 그랬다. 심지어 이름도 다르게 불렀다. 어떤 글자 하나를 더 붙여서, 소중하게 불렀어. 그래. 지수는 박해리의 이름을 꼭 이렇게 불렀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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