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 그러나 이삼 년 전부터 그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정말 나는 2014년 봄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사랑에 대해ㅡ 우리를 연결하는고통에 대해 ㅡ질문했던 것일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 - P28

래고 근원적인 배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1979년 4월의 아이는 썼다.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P29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날마다 정심의 마음으로 눈을 뜨던 아침들이.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끓던 그의 하루하루가.

날개처럼, 불꽃처럼 펼쳐지던 순간들의 맥박이.
촛불을 넘겨주고 다시 넘겨받기를 반복하던 인선과 경 - P57

하의 손들이.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아닐까?

허락된다면 다음 소설은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 - P58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몇 개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장 맑은 정신으로 전날까지 쓴 소설의 다음을 이어 쓰기.
2. 당시 살던 집 근처의 천변을 하루 한 번 이상 걷기.
3. 보통 녹차 잎을 우리는 찻주전자에 홍차 잎을 넣어우린 다음 책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한 잔씩만 마시기.

그렇게 하루에 예닐곱 번, 이 작은 잔의 푸르스름한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이 당시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 기증한 찻잔과 메시지 [2024] - P61

이제 나는 햇빛에 대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 ㄷ자 형태로 지어진 이 집은 바깥으로는 동쪽 창이 없다. 하지만 안쪽 마당을 바라보는 조그만 서고에는있다. 햇빛은 가장 먼저 그 작은 동창을 비춘 뒤 성큼성큼 대문 안쪽을, 그다음엔 부엌 창을 비춘다. 남중한 태양이 비스듬히 쏘아내는 빛이 이윽고 마루에 가득 찰 때, 그 단호한 속력에 나는 매번 놀란다.


나무들에게 햇빛을 주는 날이면, 그 속력에 맞추기 위해 꽤 바쁘게 하루를 보내야 한다.
모든 나무들에게 고루 빛을 쬐여주려면 여덟 개 거울의 각도와 위치를 약 십오 분에 한 번씩 옮겨주어야 한다. 지 - P94

구가 자전하는 속도의 감각을 그렇게 익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구가 공전하는 속도의 감각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계절에 따라 햇빛의 각도가 달라지기때문에, 거울을 배치하는 위치를 약 사흘마다 조금씩 바꾸어야 한다.


거울로 햇빛을 붙잡아 나무들에게 비춰주면 흰 북쪽 벽에 빛의 창문이 생긴다. 잎과 가지 들의 그림자가 그 안에서 음각화 같은 형상을 만든다.

햇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할 때 생겨나는 투명한 연둣빛이 있다. 그걸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특유의 감각이 있다. 식물과 공생해온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리라 짐작되는, 거의 근원적이라고 느껴지는 기쁨의 감각이다. 그 기쁨에 홀려 십오 분마다 쓰기를 중지하고 마당으로 - P95

나와 거울들의 위치를 바꾼다. 더 이상 포집할 빛이 없어질 때까지 그 일을 반복한다.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주는 거예요. 거울로 반사시켜서.


그렇게 내 정원에는 빛이 있다.

그 빛을 먹고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
잎들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꽃들이 서서히 열린다. - P96


이 일이 나의 형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지난 삼 년 동안 서서히 감각해왔다. 이 작은 장소의 온화함이 침묵하며 나를 안아주는 동안, 매일, 매 순간, 매 계절 변화하는 빛의 리듬으로. - P97

3월 22일


미스김라일락에 연둣빛 잎이 돋았다. 6.25 때 파병되었던 미국 군인이 이 관목을 한국에서 가져가, (아마도) 인연이 있는 여인이었을 ‘미스 김‘이라는 이름으로 학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국의 토종 라일락은 나무가 아니라 관목인 거다.

지난주에는 앵두나무 분재와 블루베리를 화분으로 들였는데, 앵두꽃은 이제 피고 있고 블루베리꽃은 봉오리를머금었다.

호스타는 용맹하게 자라고 있다. 겨울 내내 마치 말라죽은 것 같았는데, 부활하듯 땅을 뚫고 나와 힘차게 솟니 이제 그만 경기를 풀듯 잎사귀를 천천히 펼치고 있다. - P102

4월 18일

불두화 가지들은 새 같다. 날아오르는 것 
같다.

라일락은…… 왜 계속 하얀 채로 피어 있는 걸까. 작년에는 분명히 연보랏빛이었는데. 햇빛이 부족했을까.

옥잠은 무성해졌다. 잎이 둥글고 아름답다. 열한 살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살았던 집에서 8월과 9월에 꽃 피던 기억이 나서 심은 것이다. 작년에는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 올해는 어떨까?

정원을 키울 수는 없으니 내가 레고 인형처럼 작아졌다고 상상했다. 그럼 울창한 숲이겠지, 압도하는. - P116

5월 3일

불두화 꽃대가 아직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른 곳의 불두화들은 꽃 피었는데, 개화 시기를 검색해보니 꽃대는 진작 올라왔어야 한다. (부처님오신날 즈음 가장 활짝 피어 ‘불두화‘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올해에는 꽃을 피울 예정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많이 늦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건강하고 무성하니 그걸로 됐다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속으로 말해주었다. (나무에게 내 말은 아무 의미 없겠지만.) - P121

6월 12일


호스타꽃 한 송이가 완전히 피었다.

참새 두 마리가 지붕에 있다가 마당으로 들어와 단풍나무에 앉아 있다 갔다. 블루베리 화분 옆으로도 몇 발짝 걸어 다녔다. 들어올 만한 곳이라고 새들이 생각했다니 어쩐지 으쓱해졌다. 지붕에서 처음 무슨 소리가 났을 때는소리가 날 수 없는 방향이라서 놀라 올려다봤다. 우박일까, 무슨 돌가루 같은 건가 생각했는데 예쁜 새 머리가 함석 빗물받이에서 쏙 나타났다.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 P131

11월 15일

10월부터는 어떻게 해도 햇빛의 각도가 거울들에 닿지않아 내내 나무들이 그늘에 있었다. 햇빛은 점점 더 낮고 길게 누워서 들어오다가, 11월이 되자 마루 유리창에 반사되어 나무들의 아래쪽에 닿기 시작했다. 지난 2월을 생각해보면, 햇빛이 더 깊게 누워 마루 안쪽 끝까지 볕이 들어왔고,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화단을 온전히 비췄었다. - P143

12월 18일

내 작은 집의 풍경에는 바깥 세계가 없다. 중정이 주는평화, 내면의 풍경 같은 마당.

행인도 거리도 우연의 순간도 없다.
그걸 잊지 않으려면 자주 대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 내향적인 집에도 외부로 열려 있는 방향이있다. 마당의 하늘, 그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오래 보고있었다. - P144

더 살아낸 뒤
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
(글쓰기로.)

사람들을 만났어.
아주 깊게, 진하게.
(글쓰기로)

충분히 살아냈어.
(글쓰기로.)

햇빛.
햇빛을 오래 바라봤어.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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