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 산 지 다섯 해가 지났다. 풀밭의 살림을 일궈 풀과 산다.
풀은 연하게 소생하고, 힘줄처럼 억세지고 가을에는 노래를 짓는다. 깡마른 얼굴로 눈보라가 지나가는 걸 본다. 나는 풀 아래에서 일어나고 풀 아래에 눕는다.
풀은 울고, 웃는다. 풀은 어디로부터 와 이 세계를 푸르게 흔드나.
어느 날은 앞이 캄캄한 안개 같고, 어느 날은 막돌 같은 내게 풀이 있으니, 풀이 되었으니 반딧불이 같은 시혼(詩魂)은 날아와 살아라.
2025년 5월 문태준
작약꽃 피면
작약꽃을 기다렸어요 나비와 흙과 무결한 공기와 나는
작약 옆에서 기어 돌며 누우며
관음보살이여 성모여 부르며
작약꽃 피면 그곳에 나의 큰 바다가 맑고 부드러운 전심(全心)이 소금 아끼듯 작약꽃 보면 아픈 몸 곧 나을 듯이 누군가 만날 의욕도 다시 생겨날 듯이
모레에 어쩌면 그보다 일찍 믿음처럼 작약꽃 피면 - P12
풀
풀을 뽑으러 와서 풀을 뽑지는 않고
보고 듣는 풀의 춤 풀의 말
이러하나 저러하나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수줍어하며 그러하다는 풀의 춤 풀의 말
기쁜 햇살에게도 반걸음 바람에도 반걸음
풀을 뽑으러 와서 차마 풀을 뽑지는 못하고 - P13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오래 묵은 이곳에서는 흙을 들출 때마다 지렁이가 나왔다 문 열고 나오듯이 나와 굼틀거렸다 나는 돌 아래 살던 지렁이는 돌 아래로 돌려보냈다 모란꽃 아래 살던 지렁이는 모란꽃 아래에 묻어주었다 감나무 아래 살던 지렁이는 감나무뿌리 쪽에 흙으로 덮어주었다 호우가 쏟아지고 내가 돌려보냈던 지렁이들이 다시 흙 위로 나왔을 때에도 이런 곳 저런곳에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두고온 내 고향이 눈에 선했다 집터와 화단의 채송화, 우물, 저녁 부엌과 둥근 상, 초와 성냥, 산등성이와 소쩍새가 흙속에있었다 어질고 마음씨 고운 고모들도 흙속에 살고 있었다 솟아오르려는 빛이 잠겨 있는 수돗물처럼 괴어 있었다 흙속에 이처럼 큰 세계가 있었다 - P14
귤꽃
내 몸은 귤꽃만했지 울음도 미성(美聲)을 지녔었지 어머니는 내 배냇저고리를 개켜 옷장 깊숙한 데에 넣어두셨지 언젠가 옷장을 열어 보이며 말씀하셨지 얘야, 이 깨끗한 옷을 잊지 마렴 - P15
제비는 내게 말하네
사월이 되어 제비는 그제 내 집에도 돌아왔네 제비는 돌아와서 말하네 당신의 처마를 다시 빌려주세요 제비는 오늘 내게 말하네 처마 아래 목우(木牛)처럼 서 있는 내게 말하네 당신의 부서진 걸 고치세요 - P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