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오전에
나목이 한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한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나는 이 조용한 칸에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오전의 시간은 언덕을 넘어 평지 쪽으로 퍼져 금세 사라진다 - P18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 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 P23
시월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차가워진 당신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 - P27
이 시간에 이 햇살은
마른 산수국과 축축한 돌이끼에 햇살이 쏟아지네 묏둥과 무덤을 두른 산담에 햇살이 쏟아지네 끔적끔적 슬쩍 감았다 뜨는 눈 위에 햇살이 쏟아지네 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걸음 소리에 햇살은 쏟아지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라니 훌쭉한 햇살은 쏟아지네 외할머니의 흰 머리칼에 꽂은 은비녀 같은 햇살은 쏟아지네 이 시간에 이 햇살은 쏟아지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 있네 - P38
여행자의 노래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반대편으로 가네 이 모든 것과의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異國)으로 가네 낯선 시간, 그 속의 갈림길 그리고 넓은 해풍(海風)이 서 있는 곳 - P77
시인의 말
세해 동안 쓴 것을 이렇게 한권으로 묶으니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홀가분하다.
시에게 간소한 언어의 옷을 입혀보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 않았나 싶다. 대상과 세계에게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
시련이 왔었지만 회복되었다. 빚진 인연들에게 고마움을전한다. 시를 쓰는 일이 다시 내 앞에 있다.
2015년 4월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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