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 P38

꽃들


모스끄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 P40




조용하여라
저 가슴
꽃 그림자는 물속에 내렸다
누구도 캐내지 않는 바위처럼
누구든
외로워라
매양
사랑이라 불리는
저 섬은 - P52

물가


내게 귓속말하는 수면이 있다면
내게 남몰래 촉촉이 젖은 눈 뜨는 수면이 있다면

물속에 잠긴 푸른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산은 고운 강모래가 반짝이는 물가로는 아니 나오고

하늘도 흰 물새도 함께 사는 수면이 하나 있다면

나를 눕히어 서성이는 발등까지 되비춰다오
잔잔함이여 - P64

가을 모과


울퉁불퉁한 가을 모과 하나를 보았지요
내가 꼭 모과 같았지요
나는 보자기를 풀듯
울퉁불퉁한 모과를 풀어보았지요
시큼하고 떫고 단
모과 향기
볕과 바람과 서리와 달빛의
조각 향기
볕은 둥글고
바람은 모나고
서리는 조급하고
달빛은 냉정하고
이 천들을 잇대서 짠
보자기 모과
외양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는 모과를 쥐고
뛰는 심장 가까이 대보았지요
울퉁불퉁하게 뛰는 심장 소리는
모과를 꼭 빼닮았더군요 - P66

사과밭에서


가을 수도사들의 붉고 고운 입술
사과를 보고 있으니
퇴원하고 싶다
문득 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싶다
상한 정신을 환자복과 함께 하얀 침대 위에 곱게 개켜놓고서 - P74

사무친 말


나는 한동안 병실에서 생활했다 돌밭 같은 눈 메마른 손 헝클어진 채 자란 머리카락 누덕누덕한 시간들 앞뒤 없는곡경 속에서

희망을 끊어버리고 연고 없는 사람처럼 빈들빈들 돌아다녔다 축축하게 비 오는 어느날 그가 내게 말했다 뭐든 돋아 내밀듯이 돋아 내밀듯이 살아가자고 - P75

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 P78

눈 내리는 밤


말간 눈을 한
애인이여,
동공에 살던 은빛 비늘이여
오늘은 눈이 내린다
눈은 밤새 내린다
목에 하얀수건을 둘러놓고 얼굴을 씻겨주던
가난한 애인이여,
외로운 천체에
성스러운 고요가 내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손길이 나의 얼굴을 다 씻겨주는 시간을 - P84

시인의 말


눈앞의 것에 연연했으나 이제 기다려본다. 되울려오는 것을. 귀와 눈과 가슴께로 미동처럼 오는 것을. 그것을 내가 세계로 나아가는 혹은 세계가 나에게 와닿는 초입이라 부들수 있을까.
생활은 눈보라처럼 격렬하게 내게 불어닥쳤으나 시의 악흥(樂興)을 빌려 그나마 숨통을 열어온 게 아닌가 싶다. 그 빚의 일부를 갚고 싶다. 새로운 시집을 내니 난(蘭)에 새촉이 난 듯하다. 바야흐로 새싹이 돋아나오는 때이다. 움트는 언어여. 오늘 나의 영혼이 간절히 생각하는 먼 곳이여.

2012년 2월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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