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함.
문태준 시에는 실재와 환몽이 간격을 벌리고 그 사이로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細路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애잔한 그리움 속을 서성이고 처연한 우수에 젖게 된다. 그러나 이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이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의고투의 추억담이 아니라을 살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삶 자체의 향기일 것이다. -김명인 시인.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아. 참 좋은 시들이다. 오랜만이다. 이 깊은 내륙의 정서를 나는 뼛골의 시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싶다. 마치 뜨거운 뼛속에서 구워낸 시들만 같다. 읽고 나니 내 마음의 뼈들도 뜨끈하다.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특이하고 아름답다. 시가 낡디 낡은 언어의 품일망정 기성품을 거부하는 운명인 이상 때로 낡은 것은 많은 ‘새로움‘ 위에서 새롭기마련이다. 문태준의 시들이 따듯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새로운 낡음 때문이다. 옥수수 속으로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니! -장석남 시인
시인의 말
시골집 뒤란엘 가면 심지를 잃고 모로 누운 초롱을 보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아슬하다. 삶이라는 게 원체 모로 서 있는 것인지는 모르되, 그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은 고통스러웠다. 장마 지나고 나서 눅눅한 것을 내어다 말리는 일을 거풍(擧風)이라 하는데, 바람을 들어올린다‘는 그 말의 여울을 빌려 일흔다섯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람을 들어올려 가슴속에 남아있던 무거리를 마저 체질할 수 있다면, 그래서 흰 광목 몇 마처럼 마음자리가 환해졌으면 좋겠다. 가늘고 가벼운 다리로 수면을 횡단하는 소금쟁이처럼. 쉴새없이 바람에 흔들렸던 가족 모두에게 미욱한 첫시집을 바친다.
2000년 3월 문태준
호두나무와의 사랑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못할 것을 알겠다 - P10
돌배나무와 배나무
예순한살의 아버지가 진흙을 발라 돌배나무에 접을 붙이고 있었다
얼굴은 잊혀지고 그 옛사람의 그림자만 남았다
사마귀 대가리처럼 치켜 오르던 꽃들의 잔치도 무덤덤해졌다 내 마음도 먹줄을 튕긴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사소한 후일담도 없이 돌배나무는 배나무로! - P11
첫사랑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불거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 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종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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