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어린 모들 막 고개를 내미는 무논에 노을은 내리고
헐은 잇몸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다 언제부턴가 저도 썩어 뿌리째 달랑거리던 이빨 하나 논물 속에 툭 떨어진다
날로 살져가는 흙 속에 나를 바라보는 흰 왜가리 눈빛 속에 - P64
여름비
장독뚜껑에 고여 있는 빗방울
맨드라미 붉은 꽃벼슬에도 빗방울
줄행랑을 놓던 고양이란 놈 뽈뽈뽈 다 늙은 감나무 가지에 기어올라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검둥개는 낑낑거리며 나무 밑을 맴돌고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 밑엔 길 잃은 두꺼비 한 마리
언젯적 하늘인가 무지개가 활짝 선다 - P65
춤
아플수록 몸은 눈이 밝아진다
열에 들린 몸이 꼼지락거리는 나무의 발가락을 본다 제 속을 날아가는 흰나비를 본다
넋이야, 넋이야 출렁이는 피
열꽃이 터지는가 온몸이 근지러워라 다리며 허리 가랑이며 자지 끝까지 고름이 쏟아지고 몸 속 가지 가지마다 숨이 열리고 한 숨, 한 숨 돋아나는 물방울들 어디서 사과 익는 냄새 신 살구 냄새 - P68
물소리 물소리 달구나 거렁뱅이 바람에도 진한 살 냄새
아 뜨거운 몸이 한 발만 내디디면 그대로 춤이 될 것 같은데 허공에 피어 갖은 빛깔로 흐드러질 것만 같은데 - P69
봄비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 P70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 P71
꽃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 P74
저 꽃이 불편하다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P76
봄눈
흰 빛만이 남았네
내 한번도 가지 못해 지명으로만 남아 있는 망월동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다들 떠났다는데 무덤자리엔 깨어진 이름자 하나 없다는데
먼 내 집 뼘짜리 마당 겨울도 봄도 아닌 수상한 바람 속에 새움 내밀고 있는 꽃가지에 엉겨붙는 눈이 되어
웬 더벅머리 청년 하나이 잠바때기에 신발을 끌고 한점 빛으로 꺼질 때까지 나를 부르고 - P84
허기
시커먼 폐수 속을 꽂이파리가 흘러간다 그 너머 공장 굴뚝 위로 오늘은 새파란 하늘에 낮달이 떠간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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