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받아 적다


국화 마른 대궁을 베어버리려 낫을 들이대니
시들어 마른 꽃 무더기에서
뭉클한 향기 진동하다

서리 몇 됫박 뒤집어쓰고
잎부터 오그라들 적에
오상고절도 어쩔 수 없구나 했더니
아서라 시취(屍)까지 향기로 바꾸어내는 고집
그 꽃다운 오만 앞에서 낫을 거두다

안도하듯 다시 뱁새 몇 마리
그 그늘 아래 찾아들고
하, 고것들의 수작이라니
밤새 서설이 내려 꽃을 새로 피우다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 P130

복효근의 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라는 탄탄한 토대 위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문화와 문명 속에서 심하게 앓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그 안의 왜곡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러한 세상과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바라보고 안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일상 속에서 쉽고 명쾌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잃어온 것은 ‘사람의 온기‘이다. 이것이 바로 복효근의 시적 성찰의 진원이기도 하다. 시 한 편 한 편의 소재가 되고 있는 물고기, 달팽이, 게, 자작나무 숲, 공벌레, 종이컵,
장작, 매미, 수련, 소쩍새 등은 ‘사람의 온기‘를 회복시키는 매체들이다.
이 생명과 사물들 하나하나 속에 사람들이 그동안 잃어온 것‘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더불어 그는 지혜로운 시인이다. 탈속하지 않고도 성(聖)을 꿈꿀 줄 알고그것을 잔잔한 감동의 시로 엮어낼 줄 아는 글쟁이다. 깊은 자기 성찰과수행이 따르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다. 스스로의 구체적 삶이자연의 순환 질서에 순응해야 하며, 생명을 배려하고 감싸는 인간적 순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박두규(시인)

해설

온몸으로 길을 만드는 물고기처럼
이경수 문학평론가


지리산 시인 복효근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은 시의 형식으로 썼는데, 이 시집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나침반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오래 보듬고 있던 원고를 시집으로 묶어 떠나보내는 시인의 마음이야 비슷하겠지만, ‘살아 있는 날까지는/피어라, 꽃/피지 않아도 좋을 꽃은 없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오래도록 눈길을 잡아끈다. 시인 스스로 시를 쓰는 행위를 허공 받을 일궈 꽃을 피우는 일에 비유하고 있으므로꽃은 일차적으로 시를 가리키겠지만, "피지 않아도 좋을 꽃은 없다"는 마지막 구절은 존재 하나하나가 지닌 무게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시인의 넓은 품을 느끼게 해준다. 가치 없거나 하찮은 생명은 없다는 믿음과생명에 존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이 ‘시인의 말‘이 무겁게 읽힌다. "살아 있는 날까지는 피어라, 꽃! 시인이 - P133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건네는 저 말을 여러 번 입속에서 굴려본다. 피어라, 꽃! 마치 주문과도 같은 저 문장을 반복하다 보면 공들여 꽃을 피우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시인의 마음이 전염된 탓이다.
생명에 온기를 불어넣을 줄 아는 복효근에게 시란 무엇일까? 「소쩍새시창작 강의」에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시인 자신을연상시키는 이 시의 화자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시 창작 강의로 듣는다.
"말은 안 하고 춤으로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처럼/시는 안 가르치고/온통 울음만 울어대는 소쩍새 울음은 "2음보 혹은 3음보"로 "수사가 화려하지 않다". 마치 그의 시 같다. 시인의 말마따나 "울음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시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소쩍새 울음처럼죽고 싶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아픈 상처에서 비어져 나오는 시, 저핏빛 울음이야말로 그가 쓰고 싶어하는 시의 본령에 가깝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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