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휴일
박준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번 주도 오후반이야" 말하던
누나 목소리 같은 낮달이
길 건너 정류장에 섰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 - P94

주인
이홍섭


아이가
힘겹게 뒤집기를 시작하면서
이 철없는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마흔 넘어 찾아온 아이가
외로 자기 시작하면서
이 외로운 세상을 용서하기로 했다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장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마리도
여기 이 세상의 어여쁜 주인이시다

힘겹고, 외로워도
가야하는 세상이 저기에 있다

터미널 (문학동네 2011) - P127

돼지머리들처럼
나희덕


하루에도 몇번씩 거울을 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입 끝을 집어올린다
자, 웃어야지, 살이 굳어버리기 전에

새벽 자갈치시장, 돼지머리들을
찜통에서 꺼내 진열대 위에 앉힌 주인은
웃는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웃어야지, 김이 가시기 전에

몸에서 잘린 줄도 모르고
목구멍으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간 줄도 
모르고
아침 햇살에 활짝 웃던 돼지머리들

그렇게 웃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당히 벌어진 입과 콧구멍 속에
만원짜리 지폐를 쑤셔넣지 않았으리라

하루에도 몇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린다

아- 에- 이- 오- 우-
얼굴을 괄약근처럼 쥐었다 폈다 불러보아도
흘러내린 피는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길 룸미러 속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머리 하나

야생사과」(창비, 2009) - P135

첫 줄
심보선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 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눈 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 - P154

차심
손택수


차심이라는 말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속을 파고들어가
그릇 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2014) - P1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