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임철우씨는 195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 및 서강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96년 전남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개도둑」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잇따른 문제작들의 발표로 80년대 소설계의 가장 주목할 작가로 부상했으며 첫 창작집 아버지의 땅」으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붉은 방으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창작집으로 그리운 남쪽, (1985), 「달빛밟기,(1987),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1990), 「그 섬에 가고 싶다(1991), 「등대 아래서 휘파람, (1993) 등이 있다.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곡두 운동회


-그해 8월 0일 금요일 새벽 4시.
바닷가 그 작은 마을을 난데없이 쩌렁쩌렁 울려대기 시작한그 요란한 노랫소리에 놀라 주민들 팔백여 명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아침잠을 모르고 일찍 일어나는 시골 사람들이라고는하지만, 적어도 날이 밝기 한두 시간 전인 그 시각은 누구라 할것 없이 가장 달고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때마침 구름 한점 없는 여름밤 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다는유난히 잔잔했으며, 바람 또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간밤늦게까지 극성을 부리던 물것들도 새벽녘의 한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차츰 뜸해지고 선창 맞은편 작은 무인도의 울창한 수풀 속에서 늙은 부엉이도 울기를 멈춘 지 오래였다. 이따금 풀섶에서는 지친 풀벌레의 울음이 잔뜩 목에 잠겼고, 다만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물결이 차르르차르르 기슭을 핥는 소리만 간간이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한 순간 웬 요란스럽고 당돌맞 - P9

은 소음들이 느닷없이 그 깊은 정적을 산산조각으로 흩뜨리며아직 짙은 어둠에 혼곤하게 잠겨 있는 온 마을을 우렁우렁 흔들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즈음 연일 계속되어온 무더위에 시달리느라 대부분 얇은 셔츠바람이거나 아예 웃통을 훌훌 벗어제친 알몸뚱이로 잠자리에들었었다가 얼결에 놀라 후닥닥 눈을 짼 그 마을 주민들은 미처눈곱으로 뻑뻑한 눈두덩을 비벼볼 겨를조차 없이 저마다 그 난데없는 소동이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를 가려보느라 한동안 멍멍해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마도 그 소란통에 맨 먼저 귀가 벌어진 것은 잠이 없는 늙은이들이었을 터이고, 뒤이어 아직 힘깨나 남았을 젊은 축들은 코를 골다가 일어나 우선 곁에 누워 있는아내 혹은 남편을 황급히 흔들어 깨웠을 것이며, 아이들이란 본디 잠이 깊어 잠귀 역시 먼 법이므로 맨 나중에야 깨어나서는 훌렁 이불을 머리꼭지까지 뒤집어쓰거나 더러는 놀란 울음부터 애앵 터뜨리거나 했을 것이다. - P10

하지만 연일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소문은 결코 가만히 주저앉아서 전쟁이 끝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도록 만드는뒤숭숭한 것들뿐이었다. 전황은 갈수록 이쪽에게 극히 불리하게진행되어가는 눈치였다. 전선은 그새 벌써 훨씬 아래쪽으로 야금야금 내려오고 있었으며 수도는 이미 오래 전에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다고들 했다. 그러나 마을은 여전히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어디서고 총성은 들리지 않았고, 하늘은 쨍하니 맑았으며, 여름 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바다는 잠잠하게 숨을 죽이고있었다. 무엇보다도 읍사무소에 주둔해 있는 부대는 철수 준비는커녕 전혀 그 비슷한 기척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지켜보는 주민들은 아직 전쟁의 여파가 이곳까지 밀어닥치기까지에는 얼마간의 시간 여유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어렵잖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기어코 이 바닷가 작은 마을에도 처음으로 심상찮은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 P17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애걸조로 사정을 해보다가 완장 패거리들의 손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다음에야 개 돼지처럼 네 발로 벌벌 기어가기도 하고, 심장이 약한 축들은 엄지손가락이 오른쪽으로 까딱 눕혀지는 순간그 자리에서 까무라쳐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완장 패거리들은그들을 질질 끌고 가서 새끼줄의 오른쪽 칸 안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질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퍽이나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새끼줄을 경계로 하여왼쪽 사람들은 어디 소풍놀이라도 나온 사람들처럼 조금은 회회낙락하는 기색으로 앉아 있다가 저만치 누가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가기라도 할라치면 자진해서 "그놈도 죽여야 해. 똑같은 놈이여" 하고 악을 써서 자신의 갸륵한 충성심을 나타내보여주기도 하였다. 반대로 경찰 가족과 관리들을 비롯한 인물들이 모여있는 느티나무 쪽은 벌써 지옥이었다.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 사지를 지탱할 힘조차도 잃어버리고 만 듯 축 늘어진 채 땅바닥에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목사와 몇몇 신실한 신도들은그 통에서도 간절한 기도를 웅얼거리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그적군 병사의 엄지손가락은 끊임없이 왼쪽 혹은 오른쪽을 향해굽혀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 P49

드디어 이번에는 느티나무 쪽으로부터 엄청난 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읍장과 우체국장, 그리고 정미소집 주인 사내와 읍장의 뚱뚱보 아내를 비롯한 느티나무 쪽 사람들은 마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듯한 그 기막힌 환희와 감격을 도저히주체할 길이 없어 장대 같은 눈물 줄기를 쭐쭐 흘려대며 미친 듯발을 구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목이 터져라 손바닥이 부서져라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 순간 전까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그 소름끼치는 공포와 처참한 고통의 기억을 까아맣게 잊어버리고 다만 기쁨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그토록 엄청난 힘으로 얽어매어 짓누르고 있던 그 죽음의 족쇄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새끼줄너머 저쪽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통쾌한 복수를 실현시킴으로써, 가슴 벅찬 희열과 통쾌한 감격을 더더욱 감당키 어려운 지경으로 만들었다. - P59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전쟁은 끝이 났고 바닷가 그 작은 마을에도 민첩한 도둑처럼 다시 평화가 숨어들어왔다. 그 동안 마을주민의 전체 수효는 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 부족한 자리를 채우기까지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아이를 낳았으며, 갓 짝을 맺은 젊은 부부들은 주인없이 오래 버려져 있던 빈집들을 허물어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어 살림을 차렸다. 그래도 해마다 팔월 어느 날이면마을의 꽤 많은 집들마다에는 한꺼번에 똑같이 제삿상이 차려지곤 했지만, 무심한 세월은 사람들의 쓰디쓴 기억의 잔에다가 조금씩 조금씩 맹물을 타넣어주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그들은 어느 - P60

해 한여름 대낮의 그 기괴한 곡두 놀음쯤이야 쉬이 잊어버릴 수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은 가을날을잡아 마을 서쪽 바닷가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예전처럼 다시 운동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한바탕 열띤 응원을 벌이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손뼉을 치다 말고 깜짝 놀라 별안간 불안스런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흘끗흘끗 훔쳐보며 문득어두운 얼굴을 짓곤 했는데, 아직 어린 꼬마들은 도통 그 까닭을알 수가 없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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