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여 고마워요 Gragias à la vida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준 두 개의 밝은 별
그것을 열면
흑과 백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
높은 하늘 깊이 별들이 보이고
군중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네요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준 귀로 전부 새겨 넣게 되는
밤과 낮의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
망치 소리와 물레방아 소리, 공사장 소리와 소낙비 소리
그리고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 P86

나에게 소리와 문자를 주어서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할 수 있는 언어를 주어서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의 길을 비춰줄 빛을 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힘차게 뛰는 심장을 주어서
인간의 두뇌가 이룩한 성과를 보며
선이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해주어서
그의 맑은 눈 깊은 곳에 내 시선이 가 닿게 해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웃음을 주고 눈물을 주어서
덕분에 행복과 슬픔이 구별되고
그것들이 내가 노래를 만드는 재료
당신들의 노래, 그것도 같은 노래, 모두의 
노래
그것은 나 자신의 노래 - P87

인생이여 고마워요



얼마 전, 요즘은 안 들고 다니는 가방을 창고에서 꺼내 정리하다가 여러 번 접은 A4용지를 발견했다. 펼쳐보니 이 긴 메모가 적혀있었다.



내가 가진 것.

눈이 있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표정을 볼 수 있고책을 읽을 수 있고
그림을 볼 수 있고
나무를 볼 수 있다.

귀가 있어,
바람 소리, 빗소리,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음악을 들을 수 있다. - P88

코가 있어,
모든 냄새ㅡ쑥냄새, 아기 냄새, 풀냄새, 흙냄새,
군고구마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고소하고, 향긋하고, 은은하다.

입이 있어,
말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맛볼 수 있다.

피부가 있어,
바람을 느끼고, 따뜻한 물의 감각을 느끼고,
아이의 살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만 느끼고,
생생히 받아들이며 살 수 있어도 좋은 것.

어두운 것. - P89

무거운 것.
이 모든 감각을 잊게 하고, 금가게 하는 것들ㅡ 두려움, 후회, 근심, 갈등.
을 극복할 것.
그 길을 찾을 것.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갈 것


마지막 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갈 것‘ 아래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그때야 기억이 났다. 춤추며 <Let it be>를 듣던 바로 그 즈음에 쓴 메모였다. 내가 정말 모든 걸 잃은 건가, 소설을 못쓰게 되었다고 정말 그렇게 느껴도 되는 건가, 의문하며 백지를 펴놓고 차근차근 써내려갔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들만을써보자. 라고 생각하며 쓰다 보니 이런 목록이 완성되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들의 목록. 제목처럼 ‘내가 가진것‘들의 목록.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오감.
그때 나에게는 사실상 자존감이라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내면이황폐했었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런 목록을 작성할 마음을 먹 - P90

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얼마간 신기하다. 더 신기한 것은, 이 목록이 <인생이여 고마워요>의 가사와 아주 조금 닮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노래의 시적인 가사는 풍요한 생명과 감사, 축복으로 가득 차있고, 그에 비하면 일상적인 언어로 씌어진 내 목록은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들을 기억하자는 첫걸음, 아니, 첫걸음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노래를 처음 알게 된 건 2년쯤 전이었다. 우연히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반을 갖게 되었고, 마지막에 실린 이 노래를 들었다. 유일하게 아는 스페인어가 고맙다는 말이고, 고등학교 때 불어를 조금 배웠으니 대략 인생에 고마워하는 내용이려니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가사는 전혀 몰랐지만 반복되는 그 말, Gracias à la vida를 들을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 후 세계음악에 대한 책을 읽다가 거기 실린 이 가사를 보았고, 칠레 가수 비올레타 파라가 부침 많은 삶을 겪은 뒤에 쓴 곡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성이 가장 정직하고 깊다. 세계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들려준 존 바에즈와 메르세데스 소사가 함께 부른 노래도 감동적인데, 라이브의열띤 생생함이 마치 삶 전부를 벅찬 축제로 만드는 듯하다.
대학시절 은사이신 정현종 선생님의 시들 중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제목의 시가 있다. 시창작론 시간에 내가 냈던 시에 ‘내 - P91

청춘이 하룻밤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렸어요‘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강의 시간에 나에게 물으셨다. "정말 청춘이 가버렸다고 생각하나?" 내가 대답을 못하자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 난 아직도 밤마다 달밤이야."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달밤을 느낄 시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은지도. 이 노래처럼 인생에게 고백할 시간이 많지 않은지도, 실은 너에게 고맙다고. 이렇게도 많은 것을 나에게 베풀어주어서.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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