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기에도, 또 듣기에도 부담스러운 자기 진술을 하는 것은 내가 ‘고정된 주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자기 진술하기를 꺼리는데, 그것은, 내 생각에는, 그 진술을 통해 자신이 고정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을 규정해 버리면 더 이상 신비스럽지도 않을 것이고 스스로 그 말에갇혀 버릴 것이라는 생각들을 한다. 내게 있어 자기 진술은 자기 성찰이자 자기 해방적인 행위이다. 나를 말하는 것은 내가 변하기 때문이고, 변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하고 난 후의 나는 그 전의 나와 다르다. 글을 쓰고 나면 나는 이미 그 글을 쓴 사람으로부터 조금은 달라져 있다. 그래서 그 글은 내 허물이며 분신이면서 또 나와는 이제 무관하다.
내가 나름대로 식민지 지식인의 옷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내 성장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이 장에서는 유학의 경험,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하는 과정과, 강단에 서서 학생들과 만나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 장에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과정을 논의하려고 한다. - P160

나는 도시에서 자란 자율적이고 ‘서구적‘인 아이였다. 미국이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미군정 시대에 임신이 되어 남한에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된 가을에 태어났다. ‘책 읽는 문화‘를 가진 가정에서 자랐으며, 또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안팎에서 주어지는 많은 특혜를 누리며 자랐다.
시대사적으로 말한다면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사회 경제적으로안정된 환경에서 자랐기에 50년대의 전쟁과 기아, 60년대의 보릿고개와는 무관하게 살았다. 반독재 투쟁사로 본다면 4·19 세대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고,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가 온몸으로 ‘투신‘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 나는 유학을 가 있었다. 역사의 무게를 무겁게 져야 했던 4.19 세대도, 70년대 후반, 또는 80년대 학번도 아니라는 것이다. - P161

70대 후반 연령대인 부모님은 청년기에 해방을 맞은, ‘역사는 진보하고, 정의는 이긴다‘는 역사관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신‘ 세대였으며, 일본을 싫어했던 만큼 미국을 신뢰하였다. 기독교계 엘리트학교를 다닌 나는 서구식 자유주의 이상을 가진 교사들 아래서 배웠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가 된다는 것은 내게는 아주 일찍부터 당연시된 행로였다. 아버지 세대의 유학생들에게 ‘미국‘은 미지의 나라였을지 모르나, 우리 세대의 선택된 엘리트들에게 미국은 아주 친숙한 곳이었고, 유학을 간다는 것은 마치국민학교에서 중학교에 가듯 자연스런 일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되자 미국 대학에 원서를 보내고,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처럼 나는 멋있게, 또 미련없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해 여름에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파 친구들중에는 집에서 결혼하지 않으면 보내 주지 않겠다고 해서 고민하는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런 구속과는 거리가 먼 가정에서 자란 나는 - P161

‘축복‘ 속에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유학을 한 적이 있는 아버지와삼촌들, 언니를 통해 나는 이미 경험적인 지식을 상당히 얻어듣고있던 터였다. 아버지는 떠나기 전부터 영어 논문을 쓰는 요령이나, 교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 등을 이야기해 주었고, 유학생들끼리 몰려다니지 말고 미국 생활 속에 파고들도록 하라는 것, "김치 얻어먹으러 이 집 저 집 다니지 말고" "담배를 피우게 되더라도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는 물고 있지 말라"는 등의 생활 수칙을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또한 너무 진을 빼지 않도록 여유를 가지고 재미있게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그곳 사람들에게 기죽지 말 것이며, 집에서부처 주는 우리나라 잡지도 꼬박꼬박 읽어서 우리 글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서양은 내게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였고, 나는 ‘보편적 인간 / 세계 시민‘이 되겠다는 열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애초에 역사학자가 되려고 했던 나는 대학 3학년 쯤에 우리가 존경하는 교수의 저서가 실은 거의 번역서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찾아내고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세계사적 전망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보겠다는 내 야망은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팀을 따라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면서 나는
‘마을‘이라는 공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게 되고, - P162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사람 사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좀더 새로운 학문인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하였다. 그래서 나는 인류학과 대학원에 입학을 한다.
내가 다닌 학교는 중부에 있는 주립 대학 캠퍼스였는데, 대학이있는 작은 비행장에 내리자 마중을 나왔던 한국 유학생 회장은 끝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사람을 찾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다 빠져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그는 놀라면서 "처음 서울에서 오는 유학생 같지 않아서 ......"라고 말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서 갓 온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미국적인지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비틀즈 노래가 노래 상자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그곳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는 집에 온 듯 친숙하게 느껴졌다. 기숙사에는 나만큼 서양 소설을 많이 읽은 친구도 드물었고, 나만큼 고전에서 대중 가요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을 알고 있는 이도 드물었다. 식민지 땅에서 살았기에, 나는 더욱 종주국에 대해 많이 알고있었던 것이다.
내가 유학을 간 1971년 무렵은 반전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난 직후로, 히피풍 저항 문화가 캠퍼스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던 때였다.
점심 때면 ‘반전‘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발 - P163

가벗고 캠퍼스를 뛰어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는 장난스런 짓거리streaking 들이 자주 일어났고, ‘단단히 사회에 자리를 굳힌 인간‘들을 기성 세대 the establishment 라는 단어로 싸잡아 부르면서 경멸했다. 일종의 문화 혁명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대가 바로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속해 있는 세대이다.)가장 진보적인 학문에 속한다는 인류학과에 이상하게도 흑인이하나도 없었다. 제3세계에서 온 학생은 나와 타일랜드에서 온 두학생이었는데, 우리는 수업 시간에 종종 실험 대상이 되었다. 처음입학해서 얼마 되지 않은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곧 비를 오거나 오지 않게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열두어 명 앉은 학생 중에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나와 타일랜드에서 온 학생 두 명뿐이었다. 우리는 ‘근대화‘를 통해 인류는 무지에서 벗어나고 행복해지리라고 배운 모범생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냉소적인 웃음을 띠고 있는 백인 학생들올 이상스럽게 바라보았고, 그들은 우리를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그날 이후 나는 "그래, 인간이 비를 통제할 수 없단 말이지? 기다리면 할 수 있을 거야. 왜 없겠어?"라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선진 지식을 착실히 배워서 행복한 조국을 만들, 전형적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나는 사수했다. - P164

인류학에서는 일상성이 학문의 주제가 되는 만큼, 강의실에는 삶과 유리되지 않는 이야기가 넘쳐흘렀다. 야간 강의가 많았고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갓 돌아온 구레나룻을 기른 교수의 집에 가면 금방 현장에서 가져온 그곳의 ‘따끈따근한‘ 이야기와 물건과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를 통해 곧 ‘인류‘의 다양한 삶에대해 알아 가고 그 다양성을 꿰뚫는 보편적 법칙을 곧 알아 갈 수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학문을 찾아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산업화 이전 상태에 있는 소규모부족 사회 주민들은 절묘하게 기능적인 독특한 문화를 통해 환경에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개개 문화는 기능주의적이고 총체적으로, 또 ‘원주민의 관점‘이 충분히 감안된 형태로, 다시 말해서 - P164

각 문화는 상대주의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현장 조사를 다녀온교수들은 이런 내용의 말을 한결같이 신념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부족 사회 사람들은 함께 사는 지혜를 알고 있으며, 그들의 이상한 습관들은 그들이 적응해야 하는 환경의 맥락에서 볼 때 아주현명한 선택들이다. 문명을 뽐내는 ‘우리‘ 서구인들은 이들을 보며잘난 척할 것이 없으며, 우리는 그들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생에 대한 활기가 넘쳐 흐르는 마가렛 미드의 글을 좋아했다. 미드는 이렇게 썼다.

"인류학의 역할은 인간도 하나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않으려는 인문학과, 인간이 양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무시하려는, 시대에 뒤떨어진 물리학 이론을 단순히 재탕하려는 사회 과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 P165

나는 인류학에서 말하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내게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고, 나는 점점 전통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알고 보면 괜찮은 나라야, 그 마을 전체를 묶어 주는 부락굿이며,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사회성을 길러갈 수 있는 확대 가족 제도며, 지켜가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아.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랐기때문에 나는 얼마나 이곳 아이들보다 관찰력이 많은가?" 이런 말을하며 나는 우쭐해지기도 했다. ‘문화적 상대주의‘가 힘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에게 우쭐한 감을 주는 반면, 그들을 탈정치화시킬 위험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공부를 끝낼 즈음에 인류학계 내에서 일고 있던 ‘반문화적 상대주의‘ 논쟁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이 혼란의 격변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개념 내지 안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귀국을 한 후였다.
일이 년이 지나 인류학 전반에 대해 나름대로 윤곽을 잡아 가게되면서 나는 조금씩 흥미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교수들의 모험담 - P165

은 신이 난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에 더 이상 전진되는 것이 없었다. 갖가지 사회를 다룬 민족지 ethnography 시리즈를 차례로 읽다보면 통찰력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지루하다. 세계 문화 지도를 좀더 자세히 알아 가는 백과 사전식 나열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사례 연구에 치중하는 인류학을 비판하며 나온 인지인류학 cognitive anthropology 이나 민속 과학 ethnoscience은 좀더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이론화 작업을 하겠다더니, 인간을 논리의 기계처럼 취급해 버리고 있다. " ‘바나나‘ 하면 찬 느낌이 나는가, 따뜻한 느낌이 나는가?"라는 질문으로 감성을 분류하고, 온갖 사물과 인간을 분류하는 방법을 나열하고 어려운 논리적 부호와 숫자로 추상화해 내고는 대단한 일을 한 듯 흐뭇해 한다. 그때부터 내 입에서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So what?"라는 말이 자주 튀어나왔다.
나는 서서히 학문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다. - P166

나는 유럽쪽 인류학 조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나를 매료시킨 분야는 구조주의자들의 연구였다. 성서에 나타난 음식 금기사항을 분석해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아내는 에드문드 리치나 구조 기능주의자 레드 클리프 브라운, 그리고 구조주의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루이 듀몽과 같은 학자들은 내게 매력적인 연구들을 보여주었다. 처음에 나는 이들이 유럽인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ㅡ 실제로 영어로 쓰면 다 미국 것인줄만 알고 있을 정도로 나는 미국이 서구를 온통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ㅡ나중에야 유럽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란츠 보아즈는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미국 내 인디안 연구에 치중해 왔는데 거대 보편 이론으로 모든 세계 문화를 설명해 내려는 유럽식 진화론을 거부하고
‘역사적 특수주의‘를 바탕으로 인류학을 정립해 나가고자 했다. 초기 미국 인류학자들은 곧 사라지고 말지도 모르는 인류의 지혜를 건져내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자료를 열심히 모았던 반면, 거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인류학은 기능주의적 패러다임 아래 식민지 사회가 돌아가는 사회 전반의 움직임을 연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문화 인류학이 문학과 신화와 - P166

의례 등에 관심이 많고 순진한 세계주의자의 이상을 깔고 있었다면, 영국의 <사회 인류학>은 식민지 사회인 ‘이방 사회‘들을 다루는 학문으로써, 비교 정치학이자 비교 경제학이자 비교 인지학적인(구조주의적) 방법론적 바탕을 깔고 있었다.
그즈음 미국이라는 사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이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찰력과 분석력이 꽤 있는 편이었다. 집안에서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든가, 내가 관찰한 것을 대화로 나눌 수 있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든가, 항상 주위에 돌아가는 일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 못말리는 호기심을 가졌다든가, 종종 잔병치레로 아파누워서 세상 되어가는 일을 되짚어 보는 일을 즐긴다든가, 또 이사와 전학을 해본 경험 등이 그런 능력을 키워 주었을 것이다. 친해지다 보니, 기숙사 친구들은 의외로 ‘무식‘했고 ‘보편적 시각‘을 가지지 못했으며, 종교적인 보수성을 지닌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외로움을 많이 탔고, 이성 관계로 너무 많은 시간을보내거나 고민에 빠져 들곤 했는데, 그런 젊은이들이 내겐 측은해보였다. 나는 외로운 그곳의 젊은이들에 대해 좀더 관찰하기 시작했다. - P167

한국에서는 가족들의 지나친 끈끈함과 기대가 불행을 낳고 있는데, 미국의 가족 생활은 어떠하기에 이렇게들 고독해 하는가? 이들은 왜 주말에 애인이 없으면 곧 죽을 것처럼 불행해 하는가? 영화<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머리 속에 성 sex 이가득 들어 있는, ‘착실한 것 같으면서 끊임없이 불안해 하는 아이들, 매우 독립적인 것 같으면서 실제로는 매우 의존적인 정서 불안의 사람들, 나는 이들에 대해 분석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 젊은이들이 모이는 종교 단체를 석사 학위 논문 연구감으로 잡았다. 현장을중시하는 인류학에 다시 정을 붙이면서 나는 뉴욕으로, 로스엔젤레스로, 시카고로 다니면서 미국의 지배 문화가 낳은 부적응 집단이라 할 수 있는 <하레 크리시나 사람들>과 여름 몇 달을 함께 지냈다.
미국의 <하레 크리시나교>는 힌두교에 나오는 사랑의 신 크리시나를 모시는 종파인데, 인도에서 온 아주 자그마한 70대 노인이 교 - P167

주였다. 주로 20대 남녀가 대도시에 있는 절에서 살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신비스런 인도 음악에 맞추어 <하레 크리시나> 제단앞에 꽃을 바치고 춤을 추다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예배 의례에 참여한다. 그 교단에서 운영하는 초와 향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수시로 번화가에 나가서 춤과 노래를 부름으로써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히는 일을 한다. 결혼도 중매와 비슷한 형태로 하며, 인도 음식을 인도식으로 손으로 먹고,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경쟁 사회에 치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자신을 온통 바칠 곳을 찾고 싶어했던 것이며, 이 신비한 교단은 그러한 그들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 주고 있었다. 그들은 도피적인 방식이지만 자신들이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경쟁 사회 대신 도시속의 절을 택하여 안주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내게 신기했던 점은 이들이 만든 공동체였다. 이들은 내가 생각해 온 서로를 위해 주고 협력해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기 신과 개별적으로 만나는 군중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 P169

식사 당번, 청소당번 등 각자는 생활을 꾸려 가기 위해 맡은 책임들을 착실히할 뿐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연구의 기회를 통해나는 서양식의 ‘개인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내게 내면화된 ‘개인주의‘가 이들의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나는 "고맙다, 미안하다, 천만에" 따위의 말을 잘하지않는다. 그런데 그 말을 해야 될 때 안하면 상대방을 매우 불편하게만든다. 예를 들어 내가 친절한 일을 했을 때 상대방은 "고맙다"고 말을 하게 되어 있고 그러면 "천만에 you are welcome"라고 응대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 말이 입에서 잘 나오지가 않았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게 친절한 행동은 내가 때마침 그 장소에 또 그런 여력이 있어서 했을 뿐인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그 말을하면 그나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땅히 친절해야 하는 ‘공동체성‘
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쉽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즉각적 계산을 하기보다 장기적 계산을 하는,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깐 ‘상호 호혜적‘ 사고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 친절은 내게 직접 돌아오지 않더라도 - P169

다른 누구에게 돌아가면 된다. 마치 나 자신이 내가 직접 행하지 않은 친절의 혜택을 입어 왔듯이, 주고 받음에는 그런 긴 안목에서의 거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서구적이고 자본주외적인 계산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내가 한국의 토양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가지게 된 태도이자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즐겨 보았던 <러브 스토리>에도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안해‘라는 말을 안한다"는 이태리계 이민인 미국인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든가?
유학 생활은 내게 서양 사회를 연구하는 현장이 되었고 그 연구는 내게 탈식민화하는 자기 발견의 눈을 안겨 주기 시작했다. 또한 전문적 용어가 난무하면서 실제 내가 원하고 있던 ‘보편적 지식‘에 대해서 별로 많은 것을 말해 주지 못하는 인류학에 대해 실망을 하면서 나는 인류학 이론을 떠나 더욱 ‘현장 연구‘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탄생한 인류학이 가장 식민주의적이면서 가장 탈식민주의적일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낯선 것에 대해 끝없는 호기심으로 열려 있고, 현장을 중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 P170

미국 생활을 4년쯤 하고 나니까, 현장 조사를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미국 사회는 내게 충분히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아,
그냥 크고 강한 사회구나. 이제 슬슬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겠구나. 나는 인류학자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현지 조사를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연구 논문 주제를 ‘성 불평등‘에 관해 하기로 정하고 제주도 잠수 사회를 현장으로 잡았다. 나는 예비 전문가의 안경을 끼고 인류학도로서 다시 우리 사회를 관찰하기 위해 돌아가게 되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 속해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매우 달랐다. 같은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간첩 신고를 하는 것? 내가 현장 조사한 마을에는 텔레비전도 두어 대 밖에 없어서 우리집 할머니는 죽었다가 다음날 또 살아나는 탤런트를 보고 놀라시곤 하셨는데, 결 - P170

국 문화로 말한다면 실은 여러 가지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있는 미국과 서울이 서울과 이 마을보다 한결 가까운 것이 아닌가? 서울중심의 중앙 집권은 이 마을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을 한쪽에서 던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채워 가야 할 자료를 모으기에 바빴다.
나는 성별 분업과 권력 체계에 관한 이론적 가설을 가지고 잠수들의 사회를 관찰했고, 그들과 함께 물질도 하고 밭일도 하고, 마을의 제삿날이면 빠짐없이 제사떡을 먹으러 다니면서 잠수 마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읽어내 보고자 했다. 인간의 ‘보편적 삶과 정서‘ 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꼈다. 이제 언제나 관찰만 해야 되는 인류학자의 특이한 ‘떠돌이‘ 인생이 시작된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보편적 진리를 알아 가는 길목에 선‘ 고독한 학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장 조사에 들어가면 ‘인간적인‘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배고픈 것, 돼지가 잠들기를 기다려 ‘일‘을 보는 것, 성질 나쁜 주민의 비위를 맞추는 것, 그 외 내가 하는 일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질문등 장기간에 걸친 현장 조사를 해야 하는 인류학자들이 갖는 번민은 상당하다.  - P171

특히 현지 주민들의 삶을 깊숙이 파헤쳐 들어가는 연구가 그들을 번거롭게 한 만큼 그들에게 득이 되는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힘이 빠진다. 내가 제주도에 관한 정책 건의를 할 만한 좋은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현재적 삶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들이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에 학문에 대한 회의감도 들게 되었다. 그러나 강한 ‘계몽주의자‘로서의 ‘나‘는 인류의 지식 창고에 들어가야 할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찾아내었고 제주 아이들이 읽을 교과서를 다시 쓰기 위해서도 이런 연구는 해야 한다면서 그 연구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서 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제주 잠수의 사례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논의하는 글을 써서 학위를 받았고, ‘강한 여성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제주 잠수들을 그린 한 편의 논문을 미국의 인류학자와 페미니스트들에게 남겨 두고 짐을 쌌다. 학회에서 발표를 하였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또 다른 - P171

<아마조니언>이 동양에서 나타난 것처럼 좋아 했다. 내가 제시한 제주도에 대한 그림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그들은 그렇게 읽어내고 싶어했다. 그들에게는 ‘강한 여성‘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선물한 것인가? 나는 회의에 잠겼지만 그것도 이제 더 이상 내게 남겨진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집으로 떠날 테니까......
지도 교수는 그곳에 남아서 재미 교포 연구를 좀 하다가 가라고하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충분히 보았고 졸업할 때가 되었다. 이제 미국은 내게 선망의 땅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에 불과하다. 더 이상 그들의 문제에 내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나는 미국을 향해 고국을 떠날 때처럼, 미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계몽해야 할 땅‘으로 돌아왔다. - P174

79년 귀국했을 때 나라는 어수선했다. 그리고 반체제 운동은 이미 단단한 덩어리로 조직화되어 굴러가고 있었다. 그 덩어리는 너무 단단하여 나같이 무른 사람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고작 교수 성명서에 서명이나 하며 주변에 비껴나 있었다. 80년대에 나는 ‘주류‘의 역사에서 비껴난 자리에서 ‘딴짓‘을 했고, 바로 그 ‘딴짓‘은 주로 학생들과 만나 가는 일이었다.
귀국해서 나를 가장 곤경에 빠뜨린 것은 학생들이었다. 미국서 개론을 가르치는 식으로 강의를 하면 전혀 먹혀 들지를 않았다. ‘교차 사촌‘이니 ‘족외혼‘이니 하는 어려운 친족 관계를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러면 학생들은 시험 문제에 나올 것 같은 그 단어를 외우느라고 열심히 배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강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꼭 해내야 하는 문화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인류학 개론> 강의를 여러 번 하고서도 나는 매번 횡설 수설하고 있었다. 왠가? 학생들은 이방 사회에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 P174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나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다"는 말에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해 하면서 정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끔 용기있는 학생은 말했다. "저희들은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이런 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회학을 하지는 않는데요.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산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요?" 이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사회적 법칙을 알고 싶고, 어려운 사회 이론이 알고 싶을 뿐이다.
당시에 인류학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인류학이 ‘제국주의적 지배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말하곤 했다. 실은 그들은 그것만 알고 있었다. 나는 자기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학생들을 앉혀 놓고 문화적 상대주의에 대해서역설을 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타문화‘를 연구해 온 인류학이 초기부터 강조해 온 관점이다. 사회를 비교하려면 문화적 상대주의 시각이 철저하게 깔려야 한다. - P175

삶에 대한 기본적 전제가 다른 사회를 연구할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각이며 방법론인 것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대상을 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자세를 의미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내면화해 온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교류하려는 상대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판단 기준을 알아내고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세는 자신이 그 동안 가져온 전제와 신념을 의심함과 동시에 상대방이 가진 안경으로 사물을 보고, 그의 입장에서 느껴 보려는 노력을 할 때 익혀 갈 수 있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것에 대해 늘 "왜 그런가?"를 물어야 하며, 모두가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왜 안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익숙지 않다고 피하기보다, 낯선 것에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탐험적이 되어 이해해 가야 한다.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우위로서의 서열 ‘화가 아닌 ‘차이‘ 그 자체를 잡아 내도록 해야 한다.
이 상대주의적 자세는 실은 인류학의 독점물이 아니다. 모든 지 - P175

헤로운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취해 온 자세이기도 하다.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현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어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 아닌가? 단지 ‘상대주의‘ 앞에 ‘문화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침으로써 개인적 차이만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대한 ‘문화‘적 차이, 집단간의 차이에까지 그 원리를 적용할 수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고기가 물의 성질을 모르고도 헤엄을 칠 수있고, 우리가 문법을 모르고도 말을 할 수 있듯이 사람이 그냥 살아가기에는 꼭 문화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질 집단간의 만남이 잦아진 ‘국제화‘ 시대에 들어와서 ‘문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 되었고, 문화적 상대주의의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적 상대주의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류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시각이며, 각 문화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차이를 토대로 새로운 공존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 작업이 시급히 요구되는 시기에 출현한 방법론이다.  - P176

상대주의적 방법론을 익혀야 하는 것은 서구나 우리나 마찬가지일 것인데, 타자화가 심한 우리일수록 상대주의적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상대주의적 태도를 익혀 가는 면에서 불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해내야 한다. 특히 서구의 언어에 젖어 있는 식민지 지식인들, ‘제 땅에 사는 이방인‘이자 ‘일상적 문화의 미개인‘인 지식인들은 더욱 분발해야 한다. 그 동안 많은 인류학적 연구가 정치적 무기력을 낳고 ‘제국주의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충분히 상대주의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런 연구를 한 인류학자가충분한 역사적 인식을 가지지 못했던 때문이지 문화적 상대주의와는 무관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학생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가르쳐 보려 하였지만 잘되지 않았다. 여전히 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별로 소화해 내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의 획일주의적 문화가 그렇고, 입시 위주의 교육이 그렇고 또 80년대 정치적 상황을 보아도, 문화적 상대주의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나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강의하기보 - P176

다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우선 학생들의 생각을 알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우선 문화를 비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꾸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다른 문화에서 사람들이 어떤 짓을 하며 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화적 상대주의는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려는 ‘근대적 인간‘들에게, 또 문화적 우월주의에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관점이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위기에 처한 서구 산업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적응력을길러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인 것이다. 자신들이 옳고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온 생활 질서가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에서, 보다적응력 있는 가족 제도란 어떤 형태이며, 종교 생활은 어떠해야 하며, 국가간의 관계는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탐색하게 하는 안경이다. 그런데 산업화의 부작용보다 봉건성의 부담 속에 숨막혀 하는 우리 학생들이 미국서 강의하던 인류학 내용을 어떻게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왜 소화해 내야 한단 말인가? 우리학생들은 ‘미국은 아름답다‘는 우월주의 속에 살고 있는 미국인 학생들과 매우 달랐다. 그러니 우월감을 깨고 겸손하게 남의 사회로부터 배우게 하려는 식의 인류학 개론이 먹힐 리가 없다. 우리는 겸손하다 못해 비굴할 정도로 남으로부터 배우고 있지 않는가? 여기서 더 어떻게 겸손해지라는 건가? 나는 학생 편에 서려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 P177

우리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선망의 삶‘이 있고 그것의 결핍을원망하고 있었지,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이 싫어서 다른 새로운 것을추구하고 싶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인류학적 지식은 뭔가 자신의지금 상태와는 매우 다르게 살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준다. "지금 너의 문화에서는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더라도 너는 그것을 할 수 있어"라는 용기를 준다. 그러나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결핍 상태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은 아무런 흥미 거리가 되지 못한다. 자,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지? 나는 매 학기 학생들을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 왔다.
내가 이미 체계화된 인류학을 가르치는 전문적 학자이기 이전에우리 시대와 문화를 파악해 가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이다. 모든 인문 사회 과학자들이 비판적이고 급진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학자는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을 밑바탕까지 뒤흔들어야 할 때가있고, 나는 바로 그러한 시점에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 P178

나는 서서히 기존 학계를 포기하고 ㅡ 지금 생각하니 나는 포기해야 할 것은 매우 쉽고 빨리 포기하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ㅡ 비판이론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연구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 당시의 사회학계를 이렇게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다. 내가 귀국한 즈음 학계에서는 자체 내 사대주의 성향에 관한 자성의 소리가 일고 있었다. 그 소리는 70년대 이후부터 ‘사회학의 토착화‘라는 표어 아래 기성 사회학계 안에서 일어 온 것으로, 김진균, 한완상 교수 등이 학문의 ‘몰역사성‘과 ‘민중 지향성‘에 관한 주제로 본격적 토론의 장을 열었다. 그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 운동의 와중에서 소장파 학술 운동 단체 등을 중심으로 ‘학문의 어용화‘에 대한 고발과, ‘우리 식의 사회학‘을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 P179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 식의 사회학‘을 만들어 가자는 목소리는 주로 맑스주의와 제3세계론의 틀에서 이루어져 왔다. 논의의 초점은 ‘보편적인‘ 역사 발전 단계 속에서의 한국 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작업에 맞추어져 왔으며, 이들이 제기하는 민중 지향적 변혁론은 한동안 지성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적어도 ‘식민지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민중중심의 변혁을 지향하는 진보학계는 경험과 지식을 연결시키는 작업에서 역부족이었다. 변혁을 향한 운동이 ‘조직주의‘로 흐르게 되면서 ‘자기 성찰‘의 여지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직‘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80년대는 개인적 경험이나 자기 성찰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오히려 개인적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정당화되고, 자기 성찰은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기까지 한시대였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버려라. 조직을 위해 개인을 버려라. 개인적 문제에 연연하지 말라." 이런 상황에서 일상적 삶은 또 한번 뒤로 밀리고, 문화에 대한 논의는 싹을 틔우기도 어려웠다. - P179

지방의 자치적 문화는 급격하게 잠식당하고 있는데 그곳의 ‘의욕적인‘ 엘리트들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작업의 지부는 만들지언정 자생적인 일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으며,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 내부에 부여된 한정된 ‘부와 권력‘을 가지고 다툼을 하고 있었다. ‘중심‘과 타자화된 주변, 나는 그곳에서 타자화에 앞장서는 엘리트들의 언술들을 여실히 볼 수 있었고, 그 속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적 언어, 자기 분열의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소위 인텔리 또는 엘리트라는 집단이 자신의 경험을 성찰해 내는 능력이 가장 부족한 집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시골 현장 조사에 가면 종종만나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현명한 할머니들에 비해, 엘리트라는 - P180

우리는 얼마나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가? 존엄성을 지키며 살기에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 있는가?
나는 동시에 내가 아무리 제주도 전문 연구가라 할지라도 ‘서울사람‘이며 그곳의 삶을 일으키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인류학자로서, 신촌 캠퍼스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풀어가야 할 시급한 과제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내 현장은 강의실이며, 신촌 바닥이며, 아이들이 매맞고 오는 교실이며, 4학년이 되면 갑자기 의기소침해지는 여대생들의 모임이며 인류학회이다. 나는 좀더 내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야한다.
서양과 서양에 뿌리를 둔 ‘인류학‘을 본격적으로, 또 체계적으로거리를 두고 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영국 캠브리지에서 일 년간안식년을 보내면서였다. 영국과 미국의 차이를 보면서 나는 그때야비로소 서양 사회의 구체적 역사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존 스타인 백과 마가렛 미첼과 헤밍웨이가 미국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T.S. 엘리어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샤롯 브론테가 영국에서 나올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서도 인사를 하는 것이 원래 ‘서양적‘인 것이 아님도 알았다. 그것은 서구로 개척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서로를 적으로 의심하는 분위기를 신뢰의 분위기로 바꾸어 가려는 문화적 전략으로 나온 인사법임에 틀림없다. - P181

그곳에서 나는 또 인류학과 관련해서 늘 의문을 가져온 부분을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매주 열리는 그들의 교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학문적 논의를 만들어 가고 지식을 생산해 가는지를 주목해 보았다. 영국이 몇 세기에 걸쳐 광범위한 식민지를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인류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영국 인류학은 미국 인류학과 어떻게 다르며 왜 다른가?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와 덴마크는 또 왜 다른가? 나는 이때 인류학을 보편적 학문으로보기 이전에 각 사회가 발전시킨 이방 사회에 대한 독특한 지식 체계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찾으면서 각사회가 축적해 간 인류학적 자료가 얼마나 다른 대상을 또 얼마나다르게 다루어 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영국 내에서도스코틀란드계와 캠브리지 등의 학풍이 얼마나 다른지도 알 수 있었 - P184

다. 인류학을 ‘이방 사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 분과‘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린다면 인류학은 이방 사회와 가장 접촉이 많은 역사를 가진 사회에서 발전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식민지가 많은 사회나, 미국처럼 사회 자체내에 분명한 이질적 집단들(인디언과 흑인, 그리고 많은 소수 민족들)을 가진 사회에서나 발전할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통 인류학은 그러했다.
인류학 내에서도 인류학을 ‘이방 사회에 대한 연구‘라고 못박고있는 영국 계통의 사회 인류학자들은 미국의 문화 인류학을 가볍게보는 경향이 있다. 정통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영국 인류학 계통은 점차 이전의 식민지 국가에서 인류학자를 환영하지 않게 되면서 새로운 개척지인 사회주의 국가 쪽으로 현장을 옮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꾸기보다는 고수하고자 한다.
유럽인들에게 세계사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이며, 미국은 ‘주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은 주변이기 때문에 실험이 가능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미국이 아무리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막강해도 미국은 그곳의 엘리트들에게는 지부일 뿐이지 중심은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우리가 미국을 ‘서양‘의 대명사로 알아온 것을 바로 잡으면서, 또 서양을 ‘세계‘의 대명사로 알아온 것을 바로잡았다. - P185

다행히 최근 서구 인류학에서도 자성의 기운이 강하게 일고 있다. 그것은 식민지였던 사회가 힘을 갖게 되면서 생긴 변화이기도한데, 제3세계 출신 학자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서양 인류학자는 이제 더 이상 이방 사회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대변자‘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연구 대상자들이 아프리카 밀림 속에 머물고 있었던 때에 인류학자가 내놓은 지식은 ‘신의 말‘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손자가 이제 교실에, 공장에, 때로는 교수실을 차지하고 있다. 인류학은 이제 그 방법과 존재 이유를 새롭게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치카노 출신 인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다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왔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인류학을 ‘원주민 인류학 native anthropology‘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방 사회를 ‘총체적으로‘ 본다는 것, 다시 말해서 원주민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보면서 동시에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동안 ‘소수 집단‘에 속하는 자신들을 연구해온 성과물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전제를 고수하려들지 않는다. 그들은 ‘객관성‘을 가장한 연구의 허위를 밝혀 내면서, 연구자가 소속감을 확실히 할 것을 요구한다. ‘원주민을 위한, 원주민에 의한, 원주민의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며, 이는 ‘가치가 개입된 연구‘를 하는 국지적 지식인이 되겠다는 것을 뜻한다. - P186

인류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초월적인 전문가가 이방 사회의 주민을 대신해서 말해 주던 시기를 지나 각 집단에서 자기 스스로를 말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자명해지고 있다. 나는 우리의 인류학이 먼저 ‘타자화‘된 우리 자신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원주민 인류학‘ 내지 ‘자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으로 정착하여야 하며, 종국에는 ‘원주민 인류학‘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인류학을 탈제국주의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계 체제를 그려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 기업과 여행자들이 다니는 곳을 따라가고 외교 문서 뒤에 숨겨져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인류학자 중에는 강신표 교수와 같이 학문 이름을 ‘인학 ㅅ學‘으로바꾸자는 제안을 하는 분도 있고, 나도 가끔 ‘문화학‘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근대 학문이란 모두가 수입된 것인데다가 학문 분과별 계보와 전통을 따지는 우리학문 풍토에서, 또 세계적인 연대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시대에 그런 단절적인 시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한 효과를 낼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 학문 가운데서는 가장 적은 수의 전제와 고정의 틀을 가진 면에서, 또 현장을 중시하고 자기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면에서의 인류학을 좋아해 왔고 따라서 그런 인류학이 이 땅에 뿌리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P187

나는 여기서 내가 나름으로 탈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서방 세계에서 산 경험이 매우 중요했음을 이야기했다. 그곳을 구태여 둘러보지 않고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대답은 분명치 않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사람들, 특히 미국 지향성이 극히 심했던 우리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회에 가서 직접 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성을 알아 가기 위해, 또는 서양을 상대화시켜 보기 위해 그 사회에 직접 가서 살아 보는 것은 물론 필수적이지 않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그런 직접적인 경험이 없이도 많은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이미 우리 세대의 이러한 방황과 경험이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도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10년 전에 비하면 학생들도 많이 달라졌다. 호기심이 많아졌으며, 주체적이고자 하는 열망도 강하다.
서양의 친구들은 종종 "너희들도 와서 우리를 좀 연구해 주렴" 하고 부탁한다. 그런데 그럴 시간이 있는가? 나는 아직도 학생들과 제대로 의사 소통을 하는 교실을 만들지 못해 전전긍긍하는데...... 그러나 머지않아 조그만 보따리 하나만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후배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풀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 P188

이 책에서 제일 쓰기 어려웠고, 제일 많이 줄이고, 또 고쳐 쓴 부분이 바로 위에 쓴 부분이다. 내가 이 부분의 자기 진술을 통해서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식 생산에 관한 것이었다. 인류학을 하면서, 또 서양 여러 곳에서 유학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 터득한 한 가지분명한 사실, 곧 지식은 구체적 생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였다. 모든 지식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런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때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고, 그 과정이 파악되어야한다. 그 주체는 물론 개인들의 집합체일 것이고 지식이 생산되는자리는 일상적 삶이 경험되는 자리이면서, 권력이 개입된 자리이다.
서구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지식과 이론이 나온 맥락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구태여 그것을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지식의 생산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존 지식이 자신들의 구체적 삶의 맥락에 더 이상 적합치 않다고 느끼게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지적 계보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이들은 더욱 지식의 생산 과정에 대해 많은 논의를 벌이고 있다. - P189

지식은 이상적으로 공동체적 삶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로 지식은 개인의, 또는 특정 집단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더욱 많이 작용해 왔다. 또, 한 시대에 공동체적 선을 이루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진리‘가 다음 시대에 특정 집단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지식이 공동체적 삶을 위한 것이 될 수 있게 하려면 우리는 지식이 생산되고 유포되는과정과, 그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의 권력 의지와 욕망에 대해 좀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그 동안 지식면에서 생산적이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지식 생산을 해내야 하는 이들이 자신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서구의 언설을 곧바로 직수 - P189

말하는 문화에 살아왔다. 그런데, 실제 그런가? 가만히 살펴보면 직수입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어떤 지식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그런 선택을 하는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특정 집단이지식 생산을 독점하고, 과도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일이 없기 위해서 우리는 밖에서 들어온 지식의 생산 과정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함과 동시에 자기가 선 구체적 자리를 또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서양‘ 문법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을 이런 식으로 배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 내가 ‘개화‘된, 대화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상을 분석하는 것에, 또 기존의 지식 체계를 의심하는 것에 집요하게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환경적 조건은 물론 중산층 출신이라는 계급적 자리를 포함하며, 일제 치하에서 막 벗어나 새로운이상 사회가 오리라는 꿈을 꾸며 새 가정을 이룬 부모 아래서 자랐다는 사실이나 내가 ‘여자‘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리고바로 그 조건적 한계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매우 생산적인지식을 낼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는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우리가 공동체적인 지식을 생산해 가고자 한다면 각자가 지닌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불리우는 우리는실은 매우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우리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 ‘다름‘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식 생산의 주체로 나선다.  - P190

빛과 어둠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성 연습을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닌 곳에서
낯선 말을 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쫄기 시작하는
그대는 또 누구인가?

논리와 소유라는 계율로 만든
단음계의 노래는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할 수 없다. - P191

앞장에서 나는 지식 생산 과정에서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 장에서 나는 자신이 선 ‘주변‘의 자리, 그리고 일상의 공간에서 ‘부정‘의 정체성이 아니라 ‘긍정‘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내가 식민지 주민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주변화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주변의 자리에서 중심을 향해 호소하며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 하다가 그 언어를 포기하기까지, 그리고 분리주의의 언어를 갖게 되었다가 다시 그 언어를 이렇게 내놓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내게 새로운 준거 집단으로 등장하였고, 점차 경전적 지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되었고, 일상 속에서 게릴라전을 펴나가게 되기까지 많은 만남과 깨우침이 있었다. 알고 있던 많은 이름을 지우고 경험을 통해 새 이름을 붙이는 재미와, ‘반역적인‘ 할머니를 다시기억해 내기까지 많은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문화적 자생력을 기르는 것과 통하며, 탈식민화를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 것은 불과 일이 년 전이다. - P192

나는 상당히 뒤늦게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경우이다.
나는 여자도 자기 일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다하며 자랐으며 ‘여성‘적인 편이 아니어서 여자라는 의식을 거의 않고 살았다. 나는 ‘여성적‘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게 ‘여성적인 것‘은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쓴다거나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걷는다거나 내숭을 떠는 것과 관련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을 경멸했으며, 산을 오르면서 남에게 매달리며 우는 소리를 하는 여자를 싫어했다.
나는 그런 여자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이 싫어서 그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남자 친구들이 많았으나, 나를 여자로 대우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같은 학문을 하는 동료로서, 여행을 즐기는 친구로서 대해 주기를 요구했다. 나는 그들을 ‘형‘이라 불렀으며, 나의 그 - P192

러한 강한 ‘욕망‘이 그들에게 전해져서 그들은 나를 늘 ‘동등한 친구‘로 대해 주었다. 나는 홍일점일 때가 많았으며, 그런 자리에서어색해 하지 않는 나는 나중에 여성 운동을 하면서 이런 여자에게
‘명예 남자‘라는 별명이 있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면서 "너는 여자이면서 여자들이 겪는고통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무감각하니?" 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당시에 일기 시작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가 되어갔다. 나는 그 동안 웬지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했던 관습들, 예를 들어 아주 튼튼한 여자를 위해 비실비실해 보이는 남자가 뛰어가서 문을 열어 주는 ‘기사도‘인지
‘신사도‘라고 하는 관습, 돈이 없어서 쩔쩔매면서 꼭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야 하는 것 등이 당연히 불편하고 고쳐져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임을 알게 되었다. 학문적 관심이 깊어짐에 따라 나는여성들을 중심으로 본 역사를 쓴다면 매우 다른 역사가 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성학 공부를 통해서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억압에 대해 꽤 민감해졌고, 그러한 억압의 양상과 기재가 곧 연구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학위 논문의주제를 성역할 분담과 그에 따른 권력 관계를 알아보는 것으로 정하고 현장을 제주도 잠수 사회로 잡았다. - P193

여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성의 사회 정치적 자립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당시 미국 여성 운동계의 가설이 제주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현지 마을에서 ‘서울 애기‘로 불리운 나는 할머니들과 그곳 처녀들과 매우 깊이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의 시선을 내면화시키고 있는 그곳의 엘리트들과는 늘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제주도에서 현장 조사를 하면서 만난 그곳 엘리트들에 대한 기억은 내가 엘리트들의 식민지성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 주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가끔 왜 페미니스트 인류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엘리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주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처럼 여자로서 받는 고통을 면제당해 온 사람이 그런 문제를 연구해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제주도 현장 연구는 이런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나는 성역활과 그에 따른 기질의 차이와 권력 구조의 관련성을 밝히는 학위 논문을 쓴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 P193

점차 이 모임은 내게 삶을 실현하는 공간이면서, 우리 사회의 삶을 읽어 내는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 되어 갔다. 모임 활동을 통해내가 모르고 있던 가부장적 억압의 또 다른 양상을 보게 되고, 내가생각했던 이상으로 우리 사회가 획일주의적이고 토론이 없는 사회임도 알게 되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과 가깝게 부딪치면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일상적 억압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초반부에 우리는 독립적이고 능력 있는 ‘취업‘ 여성들을 만들어 내는것에 집중해 왔는데, 나는 그런 여성들이 재빨리 중심부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 몸 하나 챙기기에 바빠지고 마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자기 몸 하나 챙기는 것만도 장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모임에 참석하기는커녕 책도 제대로 사보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어 가야 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고리가 너무 강하여서 ‘자각‘을 한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 속에 묻혀 버린다는 것을 알고 고심했다. ‘의식전환‘은 아주 미약한 효과를 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어줍잖은 여성해방적 지식은 자기 분열만 가져온다. ‘주변성‘을 보다 확실히 할필요가 있다. 여성들 자신이 가진 ‘주변성‘에 보다 확실하게 정체성을 실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우리 모임에 있는 남자들을 둘러본다. 이 모임에는 획일주의가 싫어 모인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든다. - P198

딱히 ‘주변성‘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을 돌다가 사라진다. 나는 어느덧 ‘주변부‘라는 단어를 자주 쓰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중심부에 가까운 ‘명예 남자‘의 자리, 그리고 여전히 많은 특혜를 누리는 내가 선 자리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걸레를 하얗게 빠는 재주를 가진 여자들을 보면주눅이 들었다. 병구완을 잘하고 ‘뒤치다꺼리‘를 잘하는 이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을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해 보였다. 그렇다. ‘뒤치다꺼리‘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죽임의 문명을 바로잡는 ‘살림의 여성 운동‘
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정 주부‘라는 단어 대신 ‘사회 주부‘라는단어를 소개하면서 여성 운동의 이념을 대폭 수정/확장하였다. 우리는 동인지 편집의 글을 통하여 주변부에 있는 이들에게 전혀 다른 장기판을 짜나가자고 말했다."  - P199

어쩌면 이 모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인들이 가진 공통점은언어적 소외를 견디지 못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살고자 노력하며, 그 삶을, 특히 모순된 경험들을언어화해야만 살고 있다고 느끼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 모임에는 그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렇지 않던 사람들도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렇게 변한다. ‘상상력‘과 ‘자율성‘ 그리고 ‘반성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이 모임에 끌리게 되는 것은 바로 말을 중시하는 이 모임의 성격과 관련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이야기가 지배 담론을 흉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곳에 흡수될 형태의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한다.
우리가 해온 많은 이야기들이 책으로 나가면 소설이나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대사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물론대중 매체의 위력을 아는 우리가 의도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그 말들은 대개가 다른 맥락에서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곤 했다.
말의 내용만이 아니라 말이 전해지는 그릇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 안에서 심심잖게 텔레비전 제작에 개입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새로운 서사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 P202

어렵게나마 목소리를 내게 된 우리와 같은 ‘주변인‘이 아닌, 더욱 주변적인 사람들이 입을 열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
자신의 ‘현실‘을 빼앗긴 사람들이 ‘현실‘을 되찾아 가는 단계는 어떤 것일까? 주변에 있는 이들의 입을 막아온 언설의 틀을 바꾸면서
‘보편적 자아‘에 매달리지 않는 ‘자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를써가는 것,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좀더 알아 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 언어‘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때 그 주장을 담은 글은 매우 논리적이고, 단선적이며, 권위적인 것이었다. 우리 중에 몇몇 사람은 실은 다른 누구보다 논리적인 글을 잘 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가 실제 상황의 복잡성을 단순화해 버리는 강한 목소리임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으므로 문체를바꾸기로 하였다. 더 이상 소수의 남여성 지식인들에게나 읽힐 글은 쓰지 말도록 하자. 정작 억압에 ‘찌든‘ 이들은 읽어 내지 못하는형식의 글은 쓰지 말자고들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다룬 책을 낼 작업에 들어갔다.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나간 그 책의 편집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P203

지난 호까지 우리는 여성이 침묵을 강요당해 온 집단이었음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사실상 여성들은 공인된 언설에서는 배제되어 왔으나 완전 침묵하지는 않았으며,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꿈틀거려 왔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여성들의 살아 남기 위한 꿈틀거림, 그 생존 전략과 소극적, 적극적 저항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한다. 특히 여성들의 자기 진술이 다양한 생활의 장에서 어떤 양식들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그들의 생존 전략과 해방을 동시에담은 진술 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배적 언술의 양식이 아닌 체험을 풀어 내는 다양한 방식 - 대화체나일상성을 드러내는 일기체, 구술체 등 - 들을 찾아내고 여성 자신들이 자기 체험을 돌아보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채는것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그 동안 글쓰기가 왜 그렇게 억압적으로 느껴졌는지, 또 어떠한 글쓰기가 해방적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 주고, 굳어진 ‘혀‘를 풀어 주는 말, 죽어진 기를 살려 내는 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들의 ‘혀‘를 풀어 가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 - P204

이런 취지로 우리는 여성들이 살아 남기 위해 해온 ‘말‘ 같지 않은 ‘말‘을 찾아 나섰다. 공인된 언술 행위의 범위에서는 제외된, 침묵이라든가 ‘아픔으로 말하기‘라든가 ‘수다‘라든가 하는 것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아이들과 시달리면서도 전화에 매달려 한 시간씩 떠들어야 하는 젊은 아내들의 말하기. 그것은 대부분이 생존을위한 전략에서 나온 ‘소극적 저항‘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역시 상호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한 ‘말‘이다. 억압의 상태에서벗어나려면 해방의 언어만 배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배 언어의 눌림 속에 만들어진 그 ‘말 같지않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해방의 언어‘를 만들어갈 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착각인가? 그런 착각은 ‘해방의언어‘를 외부에서 끌어 오는 ‘식민지 엘리트‘들이나 할 일이다. 이제는 오히려 지배 담론에서 비껴나 있는 그 ‘횡설수설‘ 하는 말을바탕으로 새 말을 만들어 가야 한다. 억압 상황에서 ‘말 같지 않게‘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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