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싼타
바람 부는 성탄 전야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그림동화 원고를 메운다 삼십여년 전의 아비가 되어……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고 여우가 시집 가던 시절에 인당수보다 깊고 보릿고개보다 높고 배고픔보다 서러운 산골에 참배같이 늡늡하고 댕돌같이 단단하고 비단처럼 마음씨 고운 나무꾼이 살았더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배고픈 호랑이가 산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어쩌면 외로워서 동무가 그리워서 혼자 겨울날것을 생각하니 까마아득해져서 그래서 호랑이는 산골마을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파랑병을 던지니물바다가 되고 빨강병을 던지니 불바다가 되고…… 그래서 호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고 나무꾼은 참배 같은 댕돌 같은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 P10
최저생계비도 되지 못하는 원고지만 그래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어서 좋다 삼십여년 전 아비도 그랬을까
삼십여년 전 아비의 그림동화 속에서 심청이는 심봉사와 해후하고 홍길동은 혁명을 시도하고 춘향이는 사랑을 꽃피우고 아비는 원고지에 무엇을 완성했을까 호랑이처럼 입 벌리고 있는 가난에 희망의 파랑 병 빨강 병을 던져 아비는 무엇을 구했을까
시인도 되지 못하고 소설가도 되지 못한 아비 아침이면 식구들의 양식이 되고 아이들의 양말이며 운동화가 될 원고지에 - P11
아비는 좌절된 해피엔딩을 꿈꾸었을까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 - P12
나의 아나키스트
1980년대를 거쳐온 1963년생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던 그러나 386 컴퓨터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나같이 비과학적 비문명적인 사람도 286이나마 컴퓨터가 있으니 참살기 좋은 세상이다. 자판을 누르기만 하면 척척 글자가 나오고 오자가 나오면 고쳐주고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은 지워주고 펜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내, 생각의 속도보다 앞질러 미리 시가 되어주고 원고지 백매 천매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주는, 또한 원고지 백매 천매라도 단 한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지워주는 이 286 컴퓨터는 1996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색인 교정 아르바이트 일당 4만원으로 장만한 내 재산목록 1호
부티나는 장정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멀리 바다 건너오느라 후진국 가난한 시인의 생계를 알 리 없겠지만 아무튼 일당 4만원의 노동으로 장만한 286은 그후 내 - P13
내 밥줄이 되어주었는데 386은 물론 486도 가고 586도가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보라는 속도의 최강자만이 살아남는 인터넷 시대에 내가 아직도 286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일당 4만원의 땀 밴 추억 때문도 아니고 재활용에 대한 알뜰한 집착때문도 아니다
원고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컴퓨터의 장점은 속도와 정보와 통신이라지만 정보와 통신이 두절되고 속도를 아예 잊어버린 그의 자폐적 태평세월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의 신중함이 열받을 땐 백매든 천매든 미련없이 날려버리는 그 화끈함이 내겐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워서 어떤 사상이든 어떤 정견이든 어떤 욕설이든 내뱉어도 발설하지 않는 나의 286은 외계와의 교신을 버린 아나키스트라서 흔적을 사냥하는 광견의 시대 팔공년대를 통과하면서 - P14
천기누설공포증이라 해도 좋을 풍토병을 다만 아웃사이더였을 뿐인 나까지 덩달아 않았으니 볼펜을 쥐는 것조차 두렵던 시절 시도 편지도 머릿속으로만 쓰는 습관이 들었으므로 전화번호를 씹어삼키는 버릇이 생겼으므로
이제 나의 286은 천하무적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어떤 사상을 꿈꾸어도 어떤 정치꾼을 욕한대도 어떤 정견을 갖고 있대도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와 286과의 암묵적인 약속, 수상한 문자는 깨끗이 지워준다는 불온한 유전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는 외계와의 교신은 완벽하게 끊어준다는 알리바이를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나는 철저하게 맹신한다 이것이 팔공년대에 대한 나의 증오이고 애정이라 해도좋다 머지않아 다시 컴퓨터대란이 올지라도 - P15
시의 힘 욕의 힘
시가 안될 때 요렇게 한번 해보렷다 개새끼! 그래도 안될 때 죽어도 안될 때 쫌스럽게 하지 말고 똑 요렇게 씹새끼! 설사가 나오지? 후련하지?
욕이라는 것은 그래서 좋은가 사람들은 그래서 사는가
개당 50원짜리 실밥따기에 코피를 쏟아도 개새끼! 사람들은 그 생의 들숨으로 온 밤을 버티지 - P16
종종 삶의 비탈길에서 허방을 짚어도 씹새끼! 사람들은 그 생의 날숨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지
그래 나도 시가 안될 때 한번 개새끼! 그래도 안될 때 죽어도 안될 때 씹새끼! 설사가 나온다 후련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좋다 나는 그래서 산다
순도 백 퍼센트를 내세우고도 모자라 순, 진짜만을 부르짖는 예술교주의파 시인들이 점잖게 경멸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 P17
힘을 준다는 것 견디게 해준다는 것 시와 욕은 그래서 하나라는 것 이것이 나의 시론이고 개똥철학일 수밖에 - P18
오늘밤 기차는
오늘밤 기차는 나비처럼 나비처럼만 청산 가자 하네 청산엘 가자 하네 북덕유 남덕유 지나 육십령은 너무 늙어 청산은 간 곳 없고 반야 천왕봉 시방 일러 꽃내음 아득하니 섬진강 물후미 돌아 남으로 남으로나 내려가자네 오늘밤 기차는
나비처럼 나비처럼만 청산 가자 하네 청산에 가자 하네 꽃아비야 너도 가자 쇠도 살도 산그늘에 흩어버린 채, 꽃각시야 너도 가자 감푸른 고기 떼 달물 결 타는 남해 큰바다 여수는 여수(麗水)로되 잠도 꿈도 곤곤하련만
나비야 심청이처럼 심청이처럼만 풍덩 뛰어든 심해 혼몽 끝에 꽃은 피어 온통 동백이로구나 그 환한 어혈 속에 집이 들어 비난수하는 할마이 잠마다 꿈마다 꽃이슬로 슬맺혀 있고나 나비야 청산가자 여수 14연대 구빨치 뫼똥도 없는 아비의 기일이면 달싹쿵달싹쿵 꽃몸살 하는 동박새 함께 놀다 가자 밥도 잠도 폭폭하면 꽃그늘 속 푸르고 바랜 이끼 위에 살폿 머물다 가자 - P19
겨울산
한시절 붉고 노란 단풍으로 내 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끝없이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 속을 헤매며 네가 내 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곁에 소스라치게 단풍 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da - P20
쌀 한줌 두부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 P21
울어라 기타줄
가진 것이라곤 달랑 깡통밖에 없던 그가, 무전취식에 문전결식에 다리밑 인생인 그가, 공중변소 안에 웅크려앉아 빵을 뜯어먹던 그가 사회정화의 몽둥이로 밑바닥을 일망타진하던 짭새들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 한 대목.
저거이 사람이냐 저거이 사내냐 니는 워디서 왔다 워디로 가는 인생이간디 뭐 묵고 헐 지랄이 없어서 노다지 동냥질이나 동냥질이 도대체 저 인생은 뭣으로 산다냐 왜 산다냐.
하며 짭새들이 밟아댔다는데 갑자기 그가 웃통을 훌떡벗어젖혀 순간, 어리둥절하며 할말을 잃은 광주의 어느 뒷골목, 팽팽한 기타줄처럼 쟁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는데, 포획당한 짐승의 눈빛은 솟구치는 쇳물꽃만 같았다는데..… 기타 치는 폼으로 기타줄 고르듯 그가 제 갈비뼈를 뜯으며 멋들어지게 뽑아댄 눈물의 십팔번이라는 것이 - P22
나앛서어얼으은 타햐아앙에에에서 그으나알 바암그으 처어녀어어가아 웨엔이이일이이인지이 나아르을나아아르을 모옷이이이잊게에 하아아아네에 기타아아아주우울에에 시일으은 사아라앙 뜨내애애기이 사라아앙 우울어어어라아 추우어어억의 나아의 기이이타아아여어
구절양장 산길을 타듯 솟구쳤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솟구치는 굽이굽이 강물이 흐르듯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유장한 목청 하나로 세상과 맞장을 떴다는데, 그의 기타줄도 그렇게 울었다는데
뭐 땀시 뭔 낙으로 사느냐고?
누더기 속에 감춰진 앙상한 갈비뼈…… 구절양장 그의 오장육부와 사라졌다 솟구치고 솟구치다 사라지는 그의 - P23
생애와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그의 사랑을 지탱해주는, 가래침 같은 모멸과 치욕과 증오를 다스리게 해주는, 아무도 모를 그의 직립의 비밀은 거기 있었다는, 흘러간 팔십년대 신파극 한 대목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는 이야기. - P24
눈물의 배후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덥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 P25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
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 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 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함도 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 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 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 - P26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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