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김혜순의 시집

또 다른 별에서 (1981)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994)
우리들의 음화 (1995)
불쌍한 사랑 기계 (1997)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2000)
한 잔의 붉은 거울 (2004)
당신의 첫(2008)
슬픔치약 거울크림(2011)

自序


가슴과 함께 뇌가 작동을 시작한 시한폭탄처럼 폭발하려고 한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언제나 같은 얼굴, 같은 표정, 같은 水面.

이 시집의 시들은 첫 시집 이후의 시들을간추려 모은 것이다. 또, 시집을 내주고, 만들어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진정코 한번 멋들어지게 폭발하고 싶다.
그래서 이 껍질을 벗고 한줌의 영혼만으로
저 공중 드높이..…....

1985년 여름
김혜순

기어다니는 나비


음악이 피리 구멍에서 나오듯
느타리버섯이 진창에서 벗어나오듯

어두운 자궁 속에서 고고의 힘찬 울음이 터져나오듯
쓰러진 육체의 구멍 속에서부터 고통에 찬 영혼이 벗어나오듯

그렇게 무거운 살을 털어버리며
영겁의 기억의 무게를 벗으며
터져나오려는
수천의 무지개빛 종소리를 틀어쥐고
고치를 벗어나 더듬이를 세우고
형형색색의 날개를 펴 마악,
저 푸른 하늘로 투신하려 할 때
갑자기 스러지듯 드러눕는
무심한 번개 한 자락
내 두 날개를 짓뭉개버렸지 - P11

전염병자들아
- 숨차게


푸르게, 시리게, 촉, 수, 만, 켜들고, 달려, 가라, 달려, 가라, 전신을, 파, 먹는, 구, 더, 기, 들에겐, 전신을, 주고, 다리, 사러, 온, 사람에겐, 다리, 팔고, 신나게, 경매를 외쳐라. 토하고, 싸고, 흘리며, 모두, 모오두, 나눠, 줘라, 네, 심지를, 꺼내 보여라. 뛰어라. 앓는, 몸아, 너를, 부르거든, 큰, 소리로, 살아있다살아있다, 외쳐, 대라. 도착하진, 말고, 떠, 나, 기만, 하, 거, 라. 주사, 바늘들이, 빠져, 달아나고, 희디흰,침대, 가, 다, 부서지도록,피똥이,튀고, 토, 사물과, 악취가, 하늘, 높이, 날리도록, 달리기만 하거라. 생명이, 나갔다가들어오고, 출발했다가도착하며, 생, 명, 을, 부렸다가다시, 지고, 또, 다, 시, 달려, 나가는, 않는, 몸아! 저기, 저기, 쳐다봐라,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행복이, 액자,
속에 담겨 있고, 이제, 막, 기쁨의, 사, 카, 린, 이, 강, 물, 처, 럼, 네, 피, 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누군가, 살아있냐 묻거든, 머리를, 깨부수고, 촉, 수, 를, 보여, 줘, 라.










! - P14

사연


너는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욕설과 증오가 반죽이 된
하나의 찬란한 이름이 되었다
오늘밤 나는 그 이름에게
더러운 옷을 입히고 두 손목을
포승줄로 꽝꽝 결박지어
이 거리 저 거리로 이랴이랴 몰고 다닌다

나도 스무 살박이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나를 향해 서러운 단어들이
기억의 숲 깊은 곳에서 몰려나왔다
그리고 어느덧 서글픈 문장들이 나를 둘러쌌다
가슴에 피멍든 사랑을 품고
거렁뱅이가 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오늘밤 나는 그 이름의 머리에 꽃 하나 꽂아주었다
더러운 처녀에게 비웃음 나는 향수도
토닥토닥 뿌려주었다

오늘밤 늙은 우리는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되었다
때묻은 기억일랑 세월로 짓뭉개버린 - P18

한 장 종이에 박힌 못난 두 얼굴이 되었다
밤새껏 구겨쥐었다 다시 펴보는
냄새 나는 사연이 되었다
늙은 얼굴에 비명을 감추고
한껏 웃어보려고 입술을 비틀며
시궁창 같은 사연에 가슴 설레는
낯선 두 남녀가 되었다 - P19

日沒


노을 속에 머리칼을 처박고
서 있다보면,
나의 발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밤의 정체를 숨죽여 바라보다보면,
긴 행렬을 짓고
개울을 가로질러 가는
물새떼들을 보다보면
뒤따라 슬픔이 자르듯이
가슴에 새겨지는 것을 보다보면,
얼굴엔 눈물이
생선 비늘처럼 꽂히는 것을
강물에 비춰보다보면,
나무들이 이리저리 돌아서고
들판이 한없이 접히는 것을 어지러워하다보면,
느닷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듯
내 뺨에 철썩 처얼썩 떨어지는
그의 손바닥을 보다보면
내 얼굴에서 강둑에 떨어져 번득이는
비늘을 보다보면, 내 눈알을 쏘아보다보면 - P20

비상 먹은 달이
팽팽하게 떠올라오지 - P21

비명


겨울 산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긴 목으로 일렁이며
가랑이를 공중에 쫙 벌린 채
거꾸로 선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입으로 흙이 들어가서
위장이 꽉 막히도록
놀란 머리카락들이
땅속에서 철사줄처럼
팽팽해지도록
비명을 질러댄다
겨울 산에 가보라
겨울 나무들이 벗은 살에
매운 매를 맞으며
땅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막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보이리라 - P23

추운 겨울 밤이 오면
산의 나무들은 더욱 큰
비명을 질러댄다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의 머리채와
거꾸로 선 나무들의
머리채가 서로 맞닿아
질긴 매듭이 지워지고
더욱 큰 비명들이 터져나온다.
추운 겨울 밤
산 나무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삼킨다
두 가랑이를 휘저으며
그 아래 열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펴고 펄렁이며
겨울 밤 나무들은
꽉 매인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는다
겨울 밤 산에 올라보라
거기 내가 네 발 아래
물구나무서서
차가운 별빛 같은 매를 맞으며 - P24

매서운 바람 같은 두 손바닥의 질타를
참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언 땅속에서 눈물을 비비고
막힌 사연을 품고
공포에 떨며떨며
비명만 질러대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 P25




나에게 찬물을 끼얹고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움켜들고 다니다가,
홍두깨로 사지를 좌악 밀어놓고는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도 쳐보다가,
그 위로 버스도 구르고, 탱크도 구르게
하다가, 또 싫증나면
밀가루 같은 것을 솔솔 뿌려
얼굴도 토닥거려주다가,
시퍼런 칼을 들고 나타나서는
머릿속을 쫑쫑 누비고 다니다가도
끓는 물 속에 풀썩 팽개쳐버리는,
하얗게 세어버린 내 머리카락을
물 속에 흔들어 건진 다음
양념에 무쳐 맛있게도 냠냠 칼국수를
말아먹는,
여름 한낮의

너.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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