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쏠쏠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저녁노을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엽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멈추자 멈추어야 한다 하면서 오늘도 다리를 건넜다 잘 드는 칼로 끊어버린 날도 많았다 달맞이꽃도 밤별도 알고 있으리라 바보같이 천치같이를 되풀이하며 회초리로 나를 때리며 새운 밤도 많았다 오늘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오늘도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면서
노란 잎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상사화
남쪽에선 태풍이 올라오는데 상사화 꽃대 하나가 쑥 올라왔다 자줏빛 꽃봉오리 두개도 따라 올라왔다 겁도 없다
숲은 어떤 예감으로 부르르 떨고 있는데 어떤 폭우 어떤 강풍 앞에서도 꽃 피우는 일 멈출 수 없다는 저 무모한 저 뜨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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