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
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이 뉘우치고
힘들여 사는 자들일수록 고행의 순례길을 떠나고
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감사와 참회가 낡아빠진 문화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하여 내가사는 곳에 감사와 참회 따위가입에 오르는 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전에 낡은 체제를 혁명하고
또 혁명에 혁명을 거듭했기 때문에
더 혁명할 것이 없을 즈음에
마침내 어떤 진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많이 먹고 많이 가질수록 죄가 줄어든다는,

축의 시간


굵은 비 쏟아지는 산길
키 낮은 병꽃나무에 튼 둥지에서
새 한마리
알을 품고 있다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다 맞고

날개 지붕을 펴 둥지를 덮고
떨고 있다 쏟아지는 것은 쏟아지라고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알
시제가 없는 알

지금은 축의 시간
주둥이가 막힌 병
거센 물살 가운데 정지한 나무

꼭지가 막 떨어진 사과의 시간

지금은 오직 전체를 기울여야 할 때
시간은 수컷처럼 둥지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일 뿐

인간 형성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몸가짐이 거침없고 말이 시원시원하다
똥 푸러 오는 사람들 속이 훤히 다 보일 것 같다

종일 남의 집 똥구덩이에 고개를 박고
얼굴에 입술에 똥물 바르고 그 돈 벌어 밥 먹고
애들 학교 보내고 마누라 화장품도 사주고 조상 제사도 모시고
아무나 하는 일 아니다 속이 컴컴한 자들
근기 모자라는 자들은 근처에도 못 가는 일이다

꽃을 노래하고 별을 우러르고
영롱한 이슬을 글에 담는 사람들더러
영혼이 맑은 사람인 것 같아요 누군가 감동하자
그 영혼들이 우쭐대지만 속사정은 개뿔이다

속에 구정물이 가득해서 이슬을 찾고
당장 숨이 차고 혼미해서 꽃을 찾고
인간성이 시궁창이라서 향기를 찾고

영혼이 누더기라서 별로 기워야 했을 것
아니면 오염되기 쉬운 선천적 기형이라서
별과 이슬을 복용해야 하거나

인간이 제 손으로 똥 푸는 일이 없어지고
자기가 싸놓고 제 것이 아닌 양
혐오하고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고상한 습성을
동물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습성을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교차 신호등

삼십년지기 먼 길 배웅하고 돌아오던 밤길 지방도

마을도 교차로도 없는데 문득 켜지는 신호등 하나

너는 저만큼 가버리고 나는 어둠에 지워져 있고

길은 차갑게 식어 있고 따라오는 신호등 하나

낯선 길인 양 낯익은 길 오래되었으나 처음 들어선 길

나도 모르게 들어선 길 위에 둥근 달 신호등 하나

무무소유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 단식을 어떻게 이해하나
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잃을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거라지만
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지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할 때 그건 분명 진심이었을 거다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쓰는 작가는 좀 살 만한자다
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
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다
무소유는 소유라는 단어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

다 내려놓은 사람의 무소유는 이미 그 낱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야 무소유를 맘껏 가질 수 있다

모과


맹렬하게 뿜어내는 저 향기는 나무를 떠난 뒤 급격히 기우는 시간의 기울기를 만회하려는 몸짓인가

당신이 떠난 뒤 지상의 것이 아닌 이 슬픔의 실상은 당신과의 분리로 인한 급격한 시간의 기울기가 만들어낸 죽음의 냄새인가

꽃은 이미 분리를 시작한 불안한 시간의 빛과 향기 모든 향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 있어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향기가 우리를 매혹시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